앎도 병인가, 정(情)도 병인가. 학창시절 꽤 공부를 잘한 여성이 있다. 순탄하게 성장한 여성은 전문직 남편과 행복의 둥지를 틀었다. 결혼 생활 10년쯤 지난 뒤 여성은 고민에 빠졌다. 남편의 두상에서 모발을 찾기 쉽지 않은 탓이었다. 남편은 마흔 살이 넘자마자 가발을 썼다. 남편은 더위에 민감한 체질이다. 여름에는 가발이 땀에 흥건히 젖었다. 결국 몇 년 뒤 가발을 벗어야 했다.
머리가 벗겨진 남편은 또래보다 10살은 많아 보였다. 여성에게는 큰 스트레스였다. 나이차 많은 부부처럼 비친 생활이 십 수 년 계속됐다. 이 기간에 그녀는 모발에 대해 공부를 했다. 피부과 전문의 못지않게 모발에 관한 앎을 자랑하게 됐다. 그러나 그게 전부였다. 남편은 치료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평생 탈모 억제약을 복용해야 하는 데 대한 부담 때문이었다.
그녀는 중년이 된 남편의 탈모 치료를 포기했다. 대신 시선을 아들에게 돌렸다. 고교를 졸업하고 재수중인 아들은 스트레스를 받았다. 공부를 하다가 습관적으로 손으로 두상을 쥐어짰다. 여성은 탈모 유전자에, 두피 건강을 악화시키는 습관을 가진 아들을 걱정했다. 분명히 조기탈모가 올 것을 예견했다. 매일 아들의 모발을 확인했다.
어느날, 아들의 정수리 모발이 빠진 듯한 느낌을 받았다. 다음날에는 더 빠진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녀는 아들의 탈모 진단을 요청했다. 필자가 아들을 보았다. 스무 살 청년의 모발은 힘이 넘쳤다. 어머니가 의심하는 정수리도 모발 밀도가 높았다. 탈모가 아니었다.
그러나 여성은 우겼다. “제 아들은 탈모가 시작됐습니다. 초기일 때 빨리 치료를 시작해야 합니다.” 그렇다고 탈모가 아닌 사람에게 모발회복 치료를 할 수는 없다. 여성을 설득했다. 아들이 탈모라고 맹신하는 엄마는 설득이 되지 않았다. 대안으로 3개월이나 6개월을 지켜본 뒤 모발이 더 빠진 듯하면 내원 하라고 했다.
자기 확신에 빠진 여성은 2개월 후에 아들과 함께 내원했다. “두 달 전에 비해 확실히 머리카락이 많이 빠졌다”고 했다. 2개월 전 사진과 현재의 모습을 비교했다. 모발 탈락 증상은 없었다. 소득(?)없이 돌아간 여성과 아들은 2개월 뒤에 다시 찾아왔다. 물론 그때도 머리카락이 수북했다.
아는 게 많은 여성은 탈모 불안증이 있었다. 아들이 남편처럼 탈모가 될 것이라는 믿음이었다. 엄마와 생활한 아들도 탈모 강박관념이 있었다. 탈모에 대한 어머니의 지식과 지나친 정이 아들을 힘들게 한 케이스다. 어머니가 모른 게 있었다. 탈모 유전자가 활동을 하려면 유전자 발현(Gene expression)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글쓴이 홍성재 의학박사/웅선클리닉 원장
의학 칼럼리스트로 건강 상식을 이웃집 아저씨 같은 살가움과 정겨움이 넘치는 글로 소개하며 대중의 사랑을 받고 있다. 저서로 ‘탈모 14번이면 치료된다’, ‘탈모 11가지 약으로 탈출한다’, ‘진시황도 웃게 할 100세 건강비법’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