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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예종·서도원·하재완·이수병·김용원·송상진·우홍선·여정남…‘박정희 사법살인’ 희생자 50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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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도기천기자 |  2025.04.10 11:19:20

박정희 정권이 조작한 ‘인혁당 사건’ 50년
법원 판결 18시간만에 8명 형장의 이슬로
1975년 4월 9일은 '사법사상 치욕의 날'
2007년 재심 통해 희생자들에 ‘무죄’ 선고

 

박정희 정권이 조작한 인혁당 사건으로 희생된 도예종, 여정남, 송상진, 하재완 열사가 잠든 경북 칠곡군 지천면 현대공원 4.9통일열사묘역. (사진=4.9통일열사 50주기 행사위원회 제공)

(CNB뉴스=도기천 기자)

경북 칠곡군 지천면 현대공원에 마련된 4.9통일열사묘역은 박정희 정권이 조작한 인혁당 사건으로 희생된 도예종, 여정남, 송상진, 하재완 열사가 잠든 곳이다.

 

지난 9일 오전 11시, 인혁당 사건 희생자 50주기를 맞아 4.9통일열사묘역에서 4.9통일열사 50주기 행사위원회 주최로 추모제가 열렸다. 유족, 시민사회단체 관계자 등 80여 명이 참석해 끝까지 자리를 지켰다.


인혁당 사건은 박정희 정권의 억압적 독재정치를 상징하는 대표적 공안 조작 사건이다. 1974년 중앙정보부는 유신 반대 투쟁을 벌인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민청학련)을 수사하면서 인혁당 재건위를 배후로 지목하고 인혁당 조직이 “북한의 지령을 받아 정부 전복을 획책했다”고 발표했다.

 

9일 오전, 경북 칠곡군 4.9통일열사묘역에서 유족, 시민사회단체 관계자 등 80여 명이 인혁당 사건 희생자들의 넋을 기리고 있다. (사진=4.9통일열사 50주기 행사위원회 제공)

이 사건과 관련해 1024명이 연행돼 253명이 구속됐다. 그해 6월 시작된 재판은 1심과 2심 군법회의를 거쳐 대법원에서 확정판결이 날 때까지 10개월밖에 걸리지 않았다. 대법원은 이들 중 8명에게 사형을, 나머지에는 징역 15년에서 무기징역을 확정했다.

1975년 4월 8일 오전 10시 사형이 확정된 8명은 그로부터 불과 18시간 만인 다음 날 새벽 서울 서대문 서울구치소에서 차례로 형이 집행됐다.

희생자들의 이름은 도예종(당시 50세)·서도원(52)·하재완(43)·이수병(38)·김용원(39)·송상진(46)·우홍선(45)·여정남(30)이다.

 

9일 오전, 경북 칠곡군 4.9통일열사묘역에서 유족, 시민사회단체 관계자들이 인혁당 사건 희생자들의 넋을 기리고 있다. (사진=4.9통일열사 50주기 행사위원회 제공)

이들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1975년 4월 9일’은 대한민국 사법 사상 가장 치욕스러운 날로 꼽힌다. 당시 스위스에 본부를 둔 국제법학자회(International Commission of Jurists)는 이 날을 ‘사법사상 암흑의 날’로 명명했다.

이들의 유가족들은 평생 ‘빨갱이 가족’이라는 오명을 뒤집어쓰고 사회적으로 고립된 채 경제적 어려움 속에서 살아야만 했다.

하지만 이들은 진상규명을 위한 힘겨운 투쟁에 나섰고, 마침내 2002년 9월 대통령소속 의문사진상규명위가 이 사건이 중앙정보부의 고문에 의해 조작됐음을 밝혀냈다. 국정원 과거사건진실규명을통한발전위도 2005년 12월 ‘중앙정보부에 의한 고문조작 사건’임을 밝히고 국가에 재심을 권고했다.

이후 재심이 개시돼 법원은 2007년 1월 23일 사형수 8명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다. 같은 해 8월 법원은 국가가 유족에게 손해배상금을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민주주의를 갈망했던 선량한 지식인들이 국가폭력에 의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지 32년 만이었다.

 

1975년 인혁당 사건 재판 모습. (사진=연합뉴스)

(CNB뉴스=도기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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