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들은 모두 ‘얼리어답터’였다.” 저자는 말한다. 화가들은 당대의 최신 도구와 재료를 사용하는 데 누구보다 앞섰으며, 마치 연금술사가 액체(수은)를 빛나는 고체(금)로 바꾸기 위해 분투한 것처럼, 그들은 금속과 암석, 심지어 벌레 같은 생명체를 달걀과 기름에 섞어 액체(물감)로 만들려고 애썼다고. 그리고 남들이 알아주지 않는 일에 미친 듯이 몰두하는 이 괴짜 얼리어답터들이 있었기에 미술의 역사는 새로워졌다고 강조한다.
곰브리치로 대변되는 서양 미술의 역사는 완성된 미술 작품과 화가의 작품 활동을 다루지만, 화가들이 어떻게 그림을 그렸는지, 무엇으로 그렸는지는 자세히 알려주지 않는다. 하지만 템페라와 유화 물감, 캔버스와 종이라고 씌어 있는 간단한 작품 캡션에는 그 시대의 과학과 기술의 결정체가 숨어 있다. 이 책은 미술 작품과 화가 그 둘 사이에서, 그들이 사용한 도구와 재료를 통해 작품이 만들어지는 과정에 주목했다. 즉 작품보다 작품의 캡션 뒤에 숨은 미술의 역사를 탐구한 것.
저자는 “연금술의 언어로 그림을 읽어보라”고 권한다. 은유와 상징으로 가득한 관념적인 용어를 걷어내고 나면 작품에 어린 냄새와 온도, 통제되지 않는 것을 통제하기 위해 벌였던 지독한 투쟁까지 읽을 수 있다고 말한다. 마트에 쌓인 달걀을 보며 피에로 델라프란체스카를, 부엌 찬장의 밀가루 봉지를 보며 렘브란트를, 모니터의 그림판 팔레트 아이콘을 보며 르브룅을 떠올리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책의 첫머리에는 한눈에 파악할 수 있는 화가들의 도구와 재료의 ‘연표’가 있으며, 각 장 서두에는 당시 ‘화가들의 작업실 상황’을 실감나게 재현해 독자들이 쉽게 내용을 파악할 수 있도록 돕는다.
이소영 지음 / 1만 7500원 / 모요사 펴냄 / 30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