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그룹 계열사인 삼성바이로직스(왼쪽)와 삼성그룹과 무관한 삼성제약의 광고이미지. 두 회사의 영문 표기(SAMSUNG)도 동일하다. (각사 홈페이지 캡처)
대기업들이 새로운 먹거리를 찾아 바이오·제약 분야에 뛰어들면서 기존 제약사들의 사명(社名)과 혼선을 빚는 경우가 늘고 있다. 국내 제약업 역사가 100년이 넘는데다 제약사가 300여개에 이르면서, 대기업 사명과 네이밍이 겹치는 경우가 한둘이 아니다. 사업영역을 확장하려는 대기업 입장에서는 상당히 신경 쓰이는 부분이다. (CNB=도기천 기자)
120년 제약 역사, 수많은 회사명 존재
상당수 네이밍이 대기업과 겹쳐 혼란
대기업들 제약업 진출하며 더 헷갈려
‘대기업 계열사’라는 오해를 받고 있는 대표적인 제약사는 ‘삼성제약’이다. 삼성제약은 1929년 ‘삼성제약소’로 출발했다. 1954년 주식회사로 전환했으며, 1963년에 회사 이름을 삼성제약공업(주)으로, 2014년부터는 삼성제약으로 변경했다. 창립 이래 90년 가까이 ‘삼성’이라는 이름을 사용해온 것이다.
이 회사는 삼성그룹과는 무관하다. 삼성의 모태기업은 1938년 3월 세워진 삼성상회다. 창업주이자 초대 회장인 고 이병철 회장이 대구에서 시작한 기업이다.
따라서 삼성제약의 ‘삼성’이 삼성그룹의 ‘삼성’보다 9년 정도 앞선다. 그래서 삼성그룹이 문제 삼을 수가 없다.
오히려 삼성 명칭을 앞서 사용한 삼성제약 측에 기득권이 있지만 상표 분쟁이 발생할 가능성은 없어 보인다. 80~90년 전에는 상표권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었기 때문. 또 대기업 계열로 오해 받는 것이 중소제약사인 삼성제약 입장에서는 나쁘지 만은 않다.
반면 삼성그룹 입장에서는 불편한 구석이 있다. 삼성은 이미 2007년경부터 바이오·의료 분야를 미래먹거리로 정하고 삼성경제연구소를 통해 여러 건의 연구를 진행해 왔다.
이런 가운데 2011년에 삼성바이오로직스를 설립했다. 이 회사는 스위스 론자, 독일 베링거인겔하임에 이어 세계 3위의 바이오의약품 생산능력을 갖추고 있다. 2012년 미국 바이오젠과 합작 설립한 삼성바이오에피스를 통해 바이오시밀러(복제의약품) 분야에서 성과를 내고 있다.
삼성그룹이 바이오 분야에 진출하기 전까지는 삼성제약을 염두에 둘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삼성바이오로직스가 제약시장에 자리 잡으면서 삼성제약이 삼성 계열사로 오해 받는 일이 잦아졌다고 한다. 삼성제약 측은 CNB에 “바이어들이 삼성과의 관계에 대한 묻는 경우가 최근 몇 년 새 크게 늘었다”고 밝혔다.
두 회사는 사명이 아니면 공통점이 전혀 없다. 삼성제약은 까스명수, 우황청심원 등을 만들고 있는 연매출 500억원 안팎의 중소기업이다. 삼성바이오로직스는 국내 최대 규모의 바이오의약품 위탁생산(CMO) 업체로 작년 매출이 4600억원에 달한다.
▲대기업과 무관한 제약사들의 로고. 이들은 사명(社名) 때문에 대기업 계열이냐는 질문을 많이 받는다고 한다.
삼성·한화·현대 “헷갈려”
한화제약도 한화그룹과 무관하지만 잘못 알고 있는 이들이 많다.
한화제약은 1976년 양지약품으로 창업했다. 1982년 네덜란드 다국적 기업인 오르가논과 합작해 이때부터 한화제약이라는 사명을 사용해왔다.
이 역시 한화그룹보다 네이밍이 더 앞선다. 한화그룹은 1952년 한국화약주식회사로 설립된 뒤 1993년 한화로 사명을 바꿨다.
한화제약이 한화그룹 계열사로 오인 받기 시작한 것은 한화가 제약업에 진출하면서부터다.
1996년 의약사업부를 신설한 한화는 2004년 에이치팜을 흡수합병 했으며, 2006년에는 한국메디텍제약을 인수해 드림파마라는 회사명으로 제약산업에 뛰어 들었다. 주로 비만 치료제 시장을 공략했다. 이 과정에서 일부 소비자들은 한화제약을 한화 계열회사로 인식했다.
이후 드림파마는 대주주인 한화케미칼이 유동성 위기를 겪으면서 근화제약에 매각됐으며, 근화제약은 미국 제약사 알보젠에 흡수됐다.
한화의 제약산업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지만 한화제약은 여전히 사명 때문에 종종 혼선을 빚고 있다고 한다.
기능성 음료인 미에로화이바, 탈모치료제 마이녹실 등으로 유명한 현대약품도 범(凡)현대가 기업으로 오해 받고 있다.
현대그룹은 2000년 3월 ‘왕자의 난’이라고 불리는 경영권 승계 다툼이 벌어졌다. 이를 계기로 창업주인 고 정주영 회장의 차남 정몽구 회장이 현대자동차 등 10개사를 이끌고 현대그룹으로부터 독립했으며, 나머지 계열사들은 현대중공업그룹, 현대해상, 현대백화점그룹 등으로 분리됐다.
이처럼 그룹이 여러 갈래로 분화하는 과정에서 현대약품 또한 이 중의 한 계열사가 아닌가 하는 인식이 확산된 바 있다.
하지만 현대약품은 1965년 고 이규석 회장이 창업한 의약품 제조 기업으로, 정씨 문중인 현대가(家)와는 아무 연관이 없다.
이 외에도 크라운제약, 대림제약, 경동제약, 한솔신약, 경남제약, 영풍제약 등 사명으로 인해 소속이 헷갈리는 제약사는 꽤 많다. 이들은 각각 크라운해태, 대림그룹(대림산업), 경동나비앤, 한솔그룹, 경남기업, 영풍그룹을 연상시키지만 실제로는 아무 관계가 없다.
▲대기업들의 바이오산업 진출이 확산되면서 기존 제약사들이 대기업 계열사로 오해 받는 경우가 늘고 있다. LG화학 생명과학사업본부 연구원들이 의약품 실험을 진행하고 있다. (사진=LG화학 제공)
제약사들 속으로 웃는다?
유독 제약업계에 대기업과 유사한 사명이 많은 이유는 오랜 역사와 특유의 보수성 때문이다.
우리나라 근대 제약산업은 1897년 동화약품이 창립되면서 시작됐다. 대웅제약(1945), 일동제약(1941), 제일약품(1950), 동국제약(1968), 동아제약(1949), 종근당(1941), GC녹십자(1967), 보령제약(1957) 등 현존하는 대형제약사 대부분이 50년 이상의 역사를 갖고 있다.
또 보수적인 문화가 강해 2~3세에게 경영이 승계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러다보니 사명에 대한 애착이 강할 수밖에 없다. 121년 된 동화약품의 경우, 1897년 설립 당시 이름이 동화약방으로 지금과 큰 변화가 없다. 이러다보니 과거 한 대기업이 중견 제약사의 상표권리를 사들이려는 시도까지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대기업들의 제약·바이오 진출이 활발해지는 추세와 맞물려 앞으로 네이밍 혼란은 더 커질 전망이다.
포스코그룹은 최근 바이오·의료기기·신약 분야의 경력직을 대거 채용했는데, 업계에서는 이를 바이오 분야로의 영역 확장에 나선 것으로 보고 있다.
국내 대표 태양광 기업인 OCI도 미래 먹거리 사업으로 제약·바이오 분야를 검토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우현 OCI 사장은 지난 3월 정기주총 후 “제약·바이오 쪽을 관심 있게 보고 있다”고 밝히기도 했다.
SK그룹 계열사인 SK바이오팜도 조만간 독자개발한 뇌전증 치료제, 수면장애 신약 등을 내놓을 계획이다.
물론 포스코, OCI, SK 등과 사명이 겹치는 제약사는 없어 당장 이름이 헷갈릴 일은 없어 보인다.
하지만 이런 추세가 계속된다면 삼성제약, 한화제약 등의 경우처럼 혼란이 생길 수 있다. 상표권리에 있어 기득권을 가진 기존 제약사들이 대기업 계열 후발주자들의 비슷한 사명을 문제 삼지 않는 분위기도 이런 혼란을 키울 가능성이 있다.
제약업계 한 관계자는 “대기업과 유사한 사명의 제약사들이 많지만 아직 상표 분쟁이 벌어진 적은 없다”며 “이는 중소 제약사 입장에서는 (유사한 대기업 이름이) 오히려 소비자에게 친숙하게 다가갈 수 있는 이점이 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CNB=도기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