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석제 제일약품 대표이사 사장(왼쪽)과 윤재승 대웅제약 회장. (사진=CNB포토뱅크)
대웅제약이 제일약품을 상대로 제기한 상표권 무효 청구소송에서 특허청이 제일약품의 손을 들어주면서, 제약업계의 ‘유사 네이밍’ 논란이 다시 주목받고 있다. 동일한 의약용어를 기반으로 상표명을 짓거나, 오리지널 의약품의 명성을 판매전략에 활용하기 위해 지나치게 ‘작명 센스’를 발휘하다 보니 제약사들 간 상표 분쟁이 끊이지 않고 있다. 특허당국의 판단도 제각각이라 표준기준 마련이 시급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CNB=도기천 기자)
니코프로·니코프리 ‘유사 네이밍’ 논란
동일한 의학용어 작명…소비자들 혼란
툭 하면 소송…‘표준 매뉴얼’ 제시해야
천문학적인 비용을 들여 개발한 오리지널 의약품의 특허 기간이 끝나면 제네릭(복제약)의 춘추전국시대가 열린다. 제네릭은 연구·개발(R&D), 임상실험에 비용이 거의 들지 않는다는 점에서 제약사 입장에서는 놓칠 수 없는 먹잇감이다.
이로 인해 업계에서는 오리지날 약과 유사한 상품명을 짓는 것이 관행처럼 여겨지고 있다. ‘비아그라’(화이자 제약)의 특허가 만료되면 ‘누리그라’(대웅제약), ‘자이그라’(동구 바이오), ‘헤라그라’(CJ헬스케어)가 등장하는 식이다.
또 후발주자들이 선두주자의 명성을 이용해 비슷한 상표명을 내놓는 사례도 비일비재하다. 이는 제약사들 간 분쟁의 불씨가 되고 있다.
최근에는 대웅제약과 제일약품이 금연보조제(니코틴패취) 상품명을 놓고 공방을 벌였다.
대웅제약이 제일약품의 ‘니코프로’를 두고 자사 제품 ‘니코프리’와 비슷해 오인·혼동될 우려가 있다며 상표권 무효청구 심판을 제기한 것.
니코프리와 니코프로 모두 니코틴이 주성분인 금연보조제다. 니코프리가 2010년 4월 먼저 허가받았고, 니코프로는 2015년 2월 허가받았다. 니코프로는 원래 상표명이 니코매진이었는데 니코프로로 변경해 상표등록 했다. 그러자 대웅제약이 이를 문제 삼은 것이다.
하지만 특허심판원은 지난달 13일 두 상표가 혼동의 우려가 없다며 대웅제약의 청구를 기각했다.
대웅제약 관계자는 CNB에 “네 글자 중에 세 글자가 동일해 소비자 혼란이 클 수밖에 없다고 판단해 청구를 제기했다”고 말했다. 반면 제일약품 관계자는 “프로와 프리는 상식적으로 충분히 구분할 수 있다는 게 특허심판원의 결정 취지”라고 밝혔다.
▲약 이름이 비슷한 의약품이 많아 소비자들에게 혼란을 주고 있다. 한 대형약국에서 약사가 환자에게 전달할 의약품을 조제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오리지널의 명성 노려라”
제약업계에서 이 같은 분쟁은 낯설지 않은 풍경이다.
2013년 노바티스의 혈압강하제 ‘디오반’은 디오텐(삼일제약), 디오살탄(유한양행), 디오르탄(대원제약), 디오패스(일동제약) 등을 탄생시켰다. 노바티스는 이들을 상대로 상표권 무효소송을 제기했지만, 재판부는 기각했다.
2015년 만성 B형간염 치료제 ‘바라크루드’ 제조사인 다국적기업 BMS는 ‘바라’라는 이름을 상표로 출시하지 말 것을 국내 제약사들에게 요청했다. 하지만 당시 국내 제약사들은 ‘바라’가 포함된 상표명으로 이미 허가를 받은 상태였다. 이에 BMS는 동아ST의 ‘바라클’이 상표권을 침해했다며 소송을 제기했지만 패소했다.
이외에도 면역증강제 ‘셀레나제’, 조현병치료제 ‘아빌리파이’ 등도 유사한 명칭의 제네릭 상표들에 대해 무효 청구를 진행했지만 모두 기각된 바 있다.
발기부전 치료제인 비아그라의 특허가 만료되자마자, 유사한 상표가 시장에 쏟아진 사례도 마찬가지다. 수십종의 ‘그라’ 시리즈가 탄생했지만 특허청은 이를 제지하지 않았다.
특허당국이 유사 명칭을 크게 문제 삼지는 않는 데는 동일한 의약용어를 기반으로 상표명이 탄생되는 제약업계 만의 특성이 배경이 되고 있다.
가령, 오리지널 의약품인 ‘타미플루’의 경우, ‘타미’는 약의 성분, ‘플루’는 ‘감기’를 뜻하는 용어다. 타미플루의 특허가 만료되자 30개 넘는 제약사가 제품명에 ‘타미’와 ‘플루’를 넣어서 상표 등록 신청했고 특허청은 이중 대부분을 받아줬다.
일반적으로 보면 네 글자(타미플루) 중 두 글자(타미 또는 플루) 이상이 동일해 허가받기 어렵다고 예상할 수 있지만, 이런 결과가 나온 것은 전문용어가 사용됐기 때문이다. ‘타미’와 ‘플루’를 제외한 나머지 음절만 심사(식별) 대상이다.
하지만 의약용어를 기반으로 하지 않은 경우는 얘기가 다르다. 애경그룹은 명인제약 잇몸치료제 ‘이가탄’을 넘보다 망신을 당했다.
‘이가탄’은 전문용어가 아니다. 잇몸을 ‘탄탄’하게 해준다는 의미의 순우리말에서 비롯됐다.
애경산업과 애경유지공업은 2015~2016년 수차례에 걸쳐 이와 비슷한 이름으로 상표 등록을 시도했다. 애경산업이 ‘이가탄 Igatan’이라는 상표명을 특허청에 등록 신청한 것을 시작으로, 애경유지공업은 ‘덴탈크리닉 2080 잇몸탄탄 이가탄탄’, ‘덴탈크리닉 2080 시림잡고 이가탄탄’, ‘덴탈크리닉 2080 잇몸탄탄 이가탄탄’ 등 총 3개 상표를 출원 신청했다.
하지만 특허청은 이를 모두 불허했다. 같은 구강관련 제품이라 소비자 혼동이 예상되며, 이로 인해 경제적 피해를 입을 수 있다는 명인제약 측의 주장을 받아들인 것. 애경은 중소기업이 공들여 만든 브랜드를 가로채려 했다는 따가운 시선만 받고 물러나야 했다.
▲대웅제약과 이탈리아 제약기업 이탈파마코 간의 상표권 분쟁은 특허심판원(특허청 소속기구)과 특허법원의 판단이 각각 달라 시장에 혼란을 줬다. (사진=연합뉴스)
오락가락 판정, 혼란 더해
하지만 특허심판원과 특허법원의 판단이 각각 달라 시장에 혼란을 준 경우도 있다. 대표적인 사례가 대웅제약과 이탈리아 제약기업 이탈파마코 간의 분쟁이다.
대웅제약 계열사인 대웅바이오는 지난 2000년부터 이탈파마코로부터 원료를 공급받아 국내에서 인지장애 개선제 ‘글리아티린’을 제조해 판매했다. 매년 600억원대 매출을 기록하는 효자상품이었으나, 2016년 초 양사의 계약이 종료되면서 국내 판권이 종근당에 넘어가게 된다.
이후 대웅바이오는 글리아티린의 제네릭인 ‘글리아타민’을 출시했다. 그러자 이탈파마코는 대웅을 상대로 상표무효 소송을 제기했다.
그런데 1심과 2심의 판단이 달랐다. 1심 격인 특허심판원은 글리아타민이 글리아티린과 외관, 칭호 등이 달라 혼동되지 않는다고 심결 했다.
하지만 특허법원은 특허심판원의 결정을 취소하고 이탈파마코의 손을 들어줬다. 두 제품의 포장이 비슷한데다, 과거 업무상 거래관계 등을 고려할 때 상표권 무효가 인정된다는 것이다. 이에 대웅 측은 대법원에 상고했고 현재 재판이 진행중이다. 제약업계 관계자는 CNB에 “전문약의 경우, 주된 소비자가 의·약사라서 오인·혼동할 우려가 적다는 이유로 대부분의 심판청구가 기각돼 왔다는 점에서 상당히 이례적인 사례”라고 말했다.
법조계 관계자는 “전문의학용어가 상표에 사용되는 제약업계의 특성과 재산권 침해라는 두 가지 요소가 서로 얽혀 있다 보니 (제약업계 상표권 분쟁은) 심판청구나 소송으로 가는 경우가 대부분”이라며 “특허당국이 사전에 의약품 상표권리와 관련된 구체적인 매뉴얼을 제시해 송사(訟事)를 줄이는 등 정책적인 노력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CNB=도기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