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8년 6월 16일 소떼 방북 당시 故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 (사진=현대그룹 제공)
남북정상회담 만찬상에 현대그룹 창업자인 고(故) 정주영 명예회장을 기리는 ‘서산한우’가 등장해 범(凡)현대가 기업들의 만감이 교차하고 있다. 앞서 열린 남북합동공연도 생전에 그가 건립한 평양 류경정주영체육관에서 열렸다. 남북한 모두에서 그의 삶이 다시 조명 받고 있다. 왜 일까. (CNB=도기천 기자)
문재인·김정은 만난 자리 ‘서산한우’ 등장
서산에서 소 몰고온 정주영 회장 뜻 기려
‘류경정주영체육관’ 유일한 南기업인 명칭
이번 남북정상회담 만찬 테이블에는 서산한우와 함께 평양 옥류관 냉면, 김대중 전 대통령의 고향인 신안 가거도산 민어해삼 편수, 노무현 전 대통령의 고향인 봉하마을산 쌀로 지은 밥이 오른다. 청와대는 “우리 민족의 평화통일을 위해 애쓰셨던 분들의 뜻을 담았다”고 밝혔다.
서산한우가 만찬 메뉴로 선정된 이유는 1998년 정주영 회장이 소떼를 몰고 방북했을 당시를 기념하기 위해서다.
당시 83세의 정 회장은 자신의 충남 서산 농장에서 기르던 소 1001 마리를 이끌고 해방 후 처음으로 육로 방북했다. 외신들은 소떼가 북상하는 장면을 생중계하며 “남북의 휴전선이 열렸다”고 보도했다. 세계적인 문명비평가인 기 소르망 (Guy Sorman)은 ‘20세기 최후의 전위예술’이라고 극찬했다.
이는 남북민간교류의 물꼬를 트는 기념비적 사건이었으며, 금강산 관광과 개성공단 건설의 단초가 됐다. 또한 외환위기(IMF 구제금융 사태) 직후 어려운 경제상황에 처한 국민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안겼다.
1차 방북에서 정 회장은 북측과 금강산 관광개발사업 추진에 합의했다. 2차 방북 직후인 1998년 11월 18일 현대상선의 ‘금강호’가 첫 출항을 했다. 당시 실무를 맡았던 현대아산의 한 관계자는 CNB에 “지금도 그날의 감격을 잊을 수 없다”고 전했다.
2000년 6월에는 분단 이후 최초의 남북정상회담이 개최됐고, 같은 해 8월 남북은 개성공단 건립에 합의했다. 개성공단에 입주한 기업은 한때 150여개에 이르렀고 북측 근로자수는 5만명에 달했다. 2010년 9월에 입주기업 생산액이 10억 달러를 돌파했다.
하지만 금강산 관광은 2008년 박왕자씨 피격 사건 이후 전면 중단됐으며, 개성공단 또한 남북 긴장이 고조되면서 2016년 폐쇄됐다.
▲1998년 6월 16일 소 500마리를 실은 트럭이 경기도 파주시 통일대교를 통과하고 있다. (사진=현대그룹 제공)
남북한 함께 추모하는 ‘왕 회장’
정주영 회장을 추모하는 마음은 북측도 마찬가지다.
정 회장이 이끌던 현대그룹은 현대아산을 통해 북한과의 경제교류를 확대했다. 현대아산은 금강산 관광과 개성공단 개발 등을 도맡은 ‘남북경협의 상징’이었다. 2000년 8월 북한 노동당 외곽기구인 조선아시아태평양평화위원회와 ‘개성공업지구건설운영에 관한 합의서’ 체결 등을 통해 북한 내 각종 개발사업에 참여했다. 현대아산이 대북사업에 투자한 자금은 2조원에 이른다.
북한은 이런 공로를 인정해 남한 기업인으로는 처음으로 북한 내 시설물에 ‘정주영’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2000년 7월 착공돼 2003년 완공된 평양의 ‘류경정주영체육관’이다. 이 체육관은 남북 합작사업으로 지어졌다. 현대건설이 시공을 맡았고, 북측은 원자재와 노동력을 제공했다.
북한은 남북정상회담을 앞둔 지난 3일 이곳에서 남측과 합동공연을 열었다. 가수 겸 배우 서현과 조선중앙TV 방송원 최효성의 공동 진행으로 김광민·서현·조용필·이선희·레드벨벳·YB·최진희·백지영·알리·정인이 김옥주·송영 등 북측 대표 가수들과 한 무대에 올랐다.
평양에는 류경정주영체육관 보다 더 큰 규모인 ‘평양체육관’이 있다. 18개 종목의 경기를 치를 수 있으며, 대규모 대중집회도 자주 열리는 북한 최대의 실내 체육관으로 알려져 있다.
그럼에도 북측이 정주영체육관을 택한 것은 남북교류의 상징성 때문이다. 한 탈북자 단체 관계자는 “북에서는 지금도 정 회장이 ‘왕(王)회장’으로 불리고 있다. 특히 40이상의 중년층에서 그를 기억하는 이들이 많다”고 말했다.
▲남북정상회담 만찬에 쓰일 서산한우로 만든 구이 요리. (사진=연합뉴스)
다시 북녘땅 밟게 될까
하지만 정주영 회장의 삶은 순탄하지 않았다.
현대그룹은 2000년 3월 ‘왕자의 난’이라고 불리는 경영권 승계 다툼이 벌어졌다. 이를 계기로 정 회장의 차남 정몽구 회장이 현대자동차 등 10개사를 이끌고 현대그룹으로부터 독립했으며, 나머지 계열사들은 현대중공업그룹, 현대해상, 현대백화점그룹 등으로 분리됐다.
모(母) 기업인 현대그룹의 경영권은 5남 정몽헌 회장에게 넘어갔다. 이후 정몽헌 회장이 급작스레 숨지면서 부인인 현정은 회장이 회사를 이끌고 있다. 현대그룹은 대북교류가 중단되면서 상당한 타격을 입었다. 현대증권, 현대상선 등 주요계열사들이 채권단 손에 넘어가 매각되면서 자산규모가 크게 줄었다.
정 회장은 현대가 여러 갈래로 나뉘고 있던 와중인 2001년 86세를 일기로 숨을 거뒀다.
그의 한평생 소원은 통일이었다. 북한땅인 강원도 통천군 아산리에서 태어난 그는 17세때 부친의 소 판돈 70원을 들고 경성(서울)으로 가출했다. 이후 남북이 38선으로 가로막히며 실향민 신세가 됐다. 이후 현대자동차공업사를 설립해 세계적인 대기업으로 성장시켰다.
그는 숨질 때까지 고향을 그리워했다. 대북사업을 주도한 ‘현대아산’은 고향인 ‘아산리’에서 따온 명칭이었다. 방북 날 아침 정 회장은 “한 마리의 소가 1000마리가 돼 그 빚을 갚으러 꿈에 그리던 고향산천을 찾아간다”고 감회를 밝힌바 있다.
현대그룹 관계자는 CNB에 “소떼 방북은 하루아침에 이뤄진 게 아니다. (정주영 회장은) 방북하기 오래 전부터 서산 농장에서 수천마리의 소를 기르며 준비해 왔다”며 “그분이 그토록 바랬던 남북교류가 10년 만에 다시 재개되고 있어 뭐라 표현하기 힘들 정도로 벅차다. 다시 금강산을 밟게 되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고 말했다.
(CNB=도기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