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시의 가습기 살균제로 인해 100명이 넘는 사망자가 발생한 것으로 집계되고 있는 가운데 보상과 사과 문제를 두고 피해자, 시민단체가 옥시 측 태도에 반발하고 있다. 환경운동연합이 지난 4일 서울 용산구 한강로동 이마트 용산점에 옥시제품 진열장에서 옥시제품에 반대하는 시위를 벌이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가습기 살균제 사망 사건’이 불거진 지 5년여 만에 검찰 수사가 본격화되고, 핵심 관계사 ‘옥시레킷벤키저’가 뒤늦게 사과 성명을 발표한 가운데, 해외에서도 유사한 사건이 발생해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존슨앤드존슨의 파우더로 인한 난소암 가능성이 법원에서 인정되어 수백억 원에 이르는 손해배상 판결이 난 것. 하지만 국내 법정에서는 옥시 제품의 유해성이 입증된다 해도 피해자들에게 돌아갈 손해배상액은 턱없이 낮을 것으로 보인다. (CNB=강소영 기자)
韓-美 배상제도 ‘극과 극’
법조계 “제도 개선 시급”
檢, 외국기업 봐주기 논란도
▲영국에 본사를 둔 레킷벤키저는 홈페이지를 통해 최고경영자(CEO)가 지난 6일 피해자 유족 김덕종씨와 이 사건에 관여해온 환경보건시민센터 최예용 소장을 만나 거듭 사과했다고 주장했다. (사진=옥시 영국본사 홈페이지)
‘가습기 살균제 사망 사건’의 핵심 관계사로 지목돼온 옥시레킷벤키저(RB코리아)의 영국 본사 레킷벤키저(RB)는 지난 3일(현지시간) 자사 홈페이지에 “한국에서 일어난 가습기 살균제 비극의 모든 희생자에 진심 어린 사과를 전한다. 이 사태에 대한 완전한 해결을 위해 할 수 있는 역할을 다하겠다”고 밝혔다.
환경보건시민센터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지난 4월 기준으로 피해자는 1528명으로 집계됐으며, 사망자는 239명에 이른다. 이 가운데 옥시 제품으로 인한 사망자는 103명으로 추정됐다. 문제의 가습기 살균제가 1994년부터 2011년말 정부에 의해 퇴출되기 전까지 18년 동안 매년 20만 병씩 판매됐다는 점을 감안하면 피해자의 수는 더욱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옥시는 1994년 출시한 가습기 살균제를 리뉴얼해 2001년부터 폐손상 및 호흡기 질환을 일으키고 사망에 이르게 할 수 있는 강독성 물질 폴리헥사메틸렌구아디닌(PHMG) 성분이 든 살균제를 판매해왔다.
2011년 피해사례가 처음으로 접수됐지만, 보건복지부가 발병 원인을 ‘가습기 살균제’라고 밝힌 후 환경부와 지식경제부에 보상안을 떠넘기는 사이, 검찰은 수사의지를 보이지 않아 유야무야 수년이 흘러갔다. 시민단체와 피해자모임이 2014년 8월 검찰 고발을 다시 진행한 다음 해에야 본격적인 수사가 시작됐다.
사건 발생 후 5년만인 지난 6일, 옥시레킷벤키저 아타 사프달 대표는 서울 여의도 콘래드호텔에서 고개를 숙이며 “우선 1등급과 2등급 판정을 받은 피해자 가운데 옥시 제품을 사용한 피해자를 대상으로 보상안을 마련할 것이며, 그 외 가습기 살균제로 고통 받은 다른 분들께는 지난 2014년 50억원의 기금 외에 추가로 50억원을 출연해 100억원의 기금을 쓰겠다”고 언급했다.
옥시로 인한 사망자만 100명이 넘는 것을 감안하면 100억원의 기금은 부족한 감이 있다. 만약 해외에서 이런 일이 벌어졌다면 옥시는 어느 정도의 배상액을 준비해야 할까?
▲최근 미국에서는 존슨앤드존슨 베이비파우더를 수십 년 사용한 이들로부터 난소암을 유발한다는 소송이 이어졌다. 미국 법원은 피해자의 손을 들어주며 실손액과 더불어 징벌적 손해배상에 해당하는 10배의 손해액을 배상하라고 판결했다. (사진=온라인 커뮤니티)
‘피해액’보다 10배 더 큰 ‘징벌액’
최근 미국 법원은 비슷한 사건에서 피해자의 손을 들어주었다.
미국 미주리 주 세인트루이스 지방법원은 “난소암에 걸린 여성에 존슨앤드존슨이 5500만 달러(630억원)를 배상할 것”을 판결했다. 승소한 글로리아 리스테선드(62)는 지난 40년간 존슨앤드존슨의 베이비파우더와 여성위생제품을 사용해오던 중 난소암 진단을 받았다.
현지 언론에 따르면, 500만 달러는 피해에 대한 보상 성격이며 5000만 달러는 징벌적 손해배상액에 해당한다. 징벌적 손해배상액이란, 죄질이 악의적이라고 판단될 때 실제 보상액보다 많은 벌금을 부과토록 하는 제도다.
이번 판결은 지난 35년 동안 베이비파우더를 써오고 난소암 판정을 받은 재클린 폭스에 7200만 달러(800억원)을 배상하라는 지난 2월 판결에 이은 두 번째 판결이다.
피해자들은 모두 난소암 발병의 원인으로 파우더에 쓰이는 ‘탈크 가루’를 지목했다. 일명 ‘활석(滑石) 가루’로도 불리는 이 가루는 석면 성분을 포함하고 있어 20년 전부터 발암 가능성 물질로 지목돼왔다.
존슨앤드존슨은 판결에 불복, 항소를 선언했지만, 법원이 피해자들의 손을 두 번이나 들어줬고, 유사한 소송 1200건이 제기돼 있는 상황이다.
이 사안과 관련해 한국 존슨앤드존슨 측은 CNB에 “1970년대부터 존슨앤드존슨은 소비자들에게 석면 성분이 포함되지 않은 베이비파우더를 판매하고 있다”는 입장을 12일 밝혔다.
한국은 실손 배상…많아야 몇 억 수준
한국과 미국의 법에는 중요한 차이가 있다. 바로 ‘징벌적 손해배상’이다.
익명을 요구한 법조계 관련자는 CNB와의 통화에서 “현재 옥시 불매운동 등 여론이 악화된 상황이라 옥시레킷벤키저는 기소가 될 것으로 보이지만, 우리나라에서 피해자 사망 시 최대 보상액은 몇억 원 수준에 불과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미국은 제조업자에 피해책임을 부과해 전통적으로 10배가 넘는 보상액을 지급하도록 하는 ‘징벌적 손해배상’이 마련돼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실손액 배상주의’라 미국처럼 몇 백억, 몇 십억의 배상을 하진 않는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피해자들이 옥시 본사를 상대로 민사소송과 형사고발을 한다는 것에 대해 “옥시 영국 본사가 유해성을 알고 있었다는 의견이 사실이라면 ‘과실치사죄’와 ‘증거위조’ 등 우리나라 법으로 물을 수 있는 손해배상의 중요 증거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반면, 일각에서는 외국인 투자위축에 대한 검찰의 우려도 있을 수 있다고 말한다.
허덕회 법학박사는 9일 CNB와의 통화에서 “검찰 내에서는 외국인 투자기업의 투자활동을 위축시키지 않기 위한 고민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외환은행 헐값매각 의혹 등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미국계 사모펀드 회사 론스타의 존 그레이켄 회장을 피의자 신분으로 국내 소환한 예가 있어, 현재 여론을 감안할 때 피해 책임 수사에 대한 고민이 더 클 것”이라고 내다봤다.
(CNB=강소영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