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련희씨가 병 치료차 찾은 중국에서 탈북 브로커에 속아 남한에 온 지 5년이 흘렀다. 그녀는 “내게 조국은 부모님과 같다”며 가족이 있는 북으로 돌려보내 줄 것을 요구하고 있다. 어쩌다 김련희씨는 남한으로 온 ‘평양 시민’이 되었을까. 지난 22일 CNB가 김련희씨의 5년을 들어보았다. (사진=강소영 기자)
김련희, 그녀를 수식하는 말이 두 가지 있다. 하나는 ‘자발적 간첩’, 또 하나는 ‘북송 요구탈북자’다. 김련희씨는 2011년 남한에 입국한 뒤부터 ‘탈북자’라는 범주에 자신이 해당되지 않는다고 생각해왔다. 자발적 탈북이 아닌 탈북 브로커에 의해 속아 왔기 때문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각종 언론과 외신이 주목하고 있는 그녀를 CNB가 직접 만나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CNB=강소영 기자)
서울에 살고 있는 ‘평양시민 김련희’
“조국은 내 가족이 살고 있는 곳”
이곳은 돈이 최고…사람 냄새 그리워
지난 22일 봄기운이 느껴지는 따뜻한 낮에 김련희 씨는 반갑게 취재진을 맞이했다. 그녀는 낯선 대한민국에서 5년째 살아가고 있다.
현재 김련희 씨는 곧 북으로 갈 수 있다는 희망을 품고 양심수 후원회(민주운동을 하다가 부당하게 구속된 양심수의 석방운동을 진행하는 단체)에서 마련해준 낙성대역 근처 ‘만남의 집’에 머물고 있다.
그녀는 베트남 영사관에 망명신청을 하러 가기도 하고, 통일부 앞에서 1인 시위도 해봤으나 북으로 가는 길은 열리지 않았다.
김 씨는 탈북 브로커의 “남한에서 큰돈을 벌어 북으로 갈 수 있다. 여섯 달만 머무르면 여권이 나온다”는 말에 속아 남쪽으로 오던 중 여권을 빼앗겼다. 그녀는 현재 대한민국에서 ‘신원특이자’라는 이유로 여권 발급이 금지돼 있는 상태다.
이윽고 김 씨는 간첩이라는 위험한 결정을 하기에 이르렀다. 그럼 남한에서 강제추방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다방의 운전기사로 일하며 탈북자 17명의 신상을 파악해 “북에 보고하려 했다”며 경찰에 알렸다.
그러나 추방은커녕 10개월 동안 감옥에서 지옥 같은 시간을 보내야 했다. 여러 번 자살시도 끝에 김 씨는 마음을 다잡고 자신의 상황을 알리기로 했다. 지금은 뉴욕타임즈, CNN 등 주요 외신들도 김 씨의 사연을 조명하고 있다. 이날 그녀는 5년 간 남한에서 겪은 것들을 기록하듯 또박또박 뱉어냈다.
- 남한에 오게 된 경로가 어떻게 되나.
나는 간경화를 앓고 있었다. 북한에서 치료를 하다 더 좋은 의료진을 찾기 위해 중국으로 가게 됐다. 중국에서 살고 있는 친언니를 찾아갈 요량이었는데, 중국에 도착해보니 언니의 번호가 바뀌어 있었다. 당황하던 내게 중국말을 잘하는 브로커가 다가와 이곳저곳을 수소문해 언니의 연락처를 알려주었다. 너무 고마운 마음에 언니를 만난 후에도 계속 안부를 물으며 브로커와 연락을 하게 됐다. 그러다 언니 집이 있는 중국 산둥성 웨이하이시에서 선양으로 치료비를 벌기 위해 식당에서 일을 했다. 그러다 브로커를 만나게 됐다. 악마의 속삭임을 듣지 않았어야 했다.
▲김련희씨의 북송을 위해 종교인을 비롯해 변호사 단체와 시민 단체 등 많은 사람들이 돕고 있다. 종교인들은 “김 씨가 원하는 곳으로 갈 권리가 있다”며 종교인들은 시국기도회를 열어 김 씨의 북송을 촉구하기도 했다. (사진=기독교평화행동목자단 이적 목사)
- 온 이후에도 북한으로 돌아가겠다고 피력한 것으로 안다.
한국에 도착하자 국정원에 가서 “나는 여기서 살 사람 아니다”라며 북에 보내 달라 했다. 그러나 국정원은 “(탈북자가) 들어온 다음에 보낼 수 있는 현행법이 없다”고 했다. 근 한 달을 햇빛도 들어오지 않는 독방에 갇혀 한국 국민으로 살겠다는 서약서를 쓰길 강요받았다. 여기서 죽으면 내 사정을 아무도 모를 것이라는 생각에 서약서에 사인을 했더니 다음 날 바로 풀어줬다.
- 이후 한국에서의 생활은 어떠했나.
경북 경산시의 임대아파트에 머물며 재활용 공장에 다녔다. 나에 대한 언론 보도가 이어진 후에는 경찰에서 수시로 찾아와서 내 상태를 살폈다. 회사의 부담감이 컸을 것이다. 곧 회사에서는 퇴사를 권했다. 병원에 입원해 있어도 공개적으로 보호관찰소에서 왔다고 하는 등 나를 범죄자 취급하며 찾아와 그 어디에도 취업할 수 없었다. 그나마 현재는 양심수 후원회가 운영하는 ‘만남의 집’에서 지내면서 기초수급비가 나와 그걸로 교통비를 충당하고 있다.
- 남한에서의 5년 동안 느낀 점이 무엇인가.
북쪽에서는 교육, 의료 문제, 주거 문제 등 국가가 해주는 부분이 많다. 일례로 북한에서는 결혼을 하면 집이 공급된다. 내가 살던 집은 여기 평수로 따지면 20평 정도다. 거기에 부모님을 모시거나 아이가 생기면 더욱 큰 평수의 집을 공급한다.
남한은 어떤가? 당장 집을 옮겨야 할 상황이어도 돈이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이곳은 돈이 곧 자유더라. 남한은 돈이 우선시 되다보니 사람 사는 정이 사라진 곳 같다. 북한에서 살 땐 누구 집에 몇 명이 사는지 사정이 어떤지 다 알 수 있었다. 이곳은 옆집에 누가 사는지, 들여다볼 시간도 그럴만한 관심도 갖고 있지 않은 것 같다.
- 남한 정착을 생각한 적 있나.
내 조국에 부모와 남편, 딸이 있다. 여기서 내가 정착해 아무리 잘 먹고 잘 산들 가족과 함께가 아니라면 무슨 의미가 있을까. 북으로 가게 된다 해도 여기보다 잘 살 수 있으리라는 보장은 없다. 그렇지만 풀죽을 먹어도 가족과 함께라는 게 의미 있는 것이지 않나. 내가 북으로 돌아가야 하는 이유다.
- 지금 가장 생각나는 사람이 누군가.
남편과 딸이다. 가끔 외신 기자들이 가족의 영상을 찍어 보여주곤 해서 모습을 봐오기는 했다. 지금 걱정은 부모님이 칠순을 넘기셔서 몸이 많이 약해지셨다. 남편이 의사니까 부모님 건강을 잘 챙겨서 건강하신 부모님 모습을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딸도 내가 없어도 꿋꿋하게 잘 견디고 있는 것 같아 다행이다. 우리 가족이 많이 보고 싶다.
(CNB=강소영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