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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생현장] 청년 윤동주, 그가 걸었던 연희동·인왕산 자락 가보니

영화 ‘동주’ 100만 돌파 목전…누상동 하숙집에서 연세대 핀슨홀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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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강소영기자 |  2016.03.09 14:29:39

▲영화 ‘동주’의 흥행세로 시인 윤동주의 삶이 재조명되고 있다. 시(時)를 잃어버린 세상에 영원한 스물여덟살 윤동주의 시심은 많은 이들의 마음을 울리고 있다. (사진=영화 ‘동주’ 스틸컷)

영화 ‘동주’의 흥행은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적은 상영관수에도 불과하고 100만 관객 돌파를 목전에 두고 있다. ‘동주’ 열풍을 타고 그의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초판본이 교보문고 종합 베스트셀러에 올랐고, 시인을 기리는 발길이 ‘윤동주 문학관’, 연희전문학교(현 연세대)로 이어지고 있다. 28세 꽃다운 나이에 세상을 등져야만 했던 시인 윤동주의 시간이 닿아있는 골목골목을 CNB가 돌아봤다. (CNB=강소영 기자)

‘별 헤는 밤’ 태동, 1941년 ‘누상동 9번지’

영화진흥위원회 영화관입장권 통합전산망에 따르면 영화 ‘동주’(감독 이준익)는 9일 박스오피스 5위를 기록했다. 누적 관객 수는 95만2714명이다.

‘왕의남자’를 연출했던 이준익 감독과 배우 강하늘, 박정민이 힘을 합친 5~6억짜리 저예산 영화가 이렇게 ‘대박’을 낼지 아무도 몰랐다.

윤동주가 머물던 서울 하숙집과 기숙사, 학교 등지로 사람들의 숨죽인 발걸음이 끝없이 이어지고 있다. 

경복궁역에서 내려 효자동 쪽으로 발걸음을 옮기다 통인 시장을 통과하면 일명 ‘서촌’의 고즈넉한 카페 골목이 나온다. 

▲시인 윤동주는 연희전문학교 재학시절 기숙사에서 나온 뒤 소설가 김송의 집에서 기거하며 주옥같은 시들을 남겼다. (사진=강소영 기자)

즐비한 카페와 유명 맛집을 지나 다세대주택 골목으로 이어진 종로구 옥인길 초입에는 누상동 9번지가 있다. 지금은 행정구역명이 바뀌어 옥인길 57번지가 된 평범한 한 주택의 담장에는 태극기와 함께 윤동주 하숙집 터라는 표식만이 그를 기억한다. 

소설가 김송의 집이었던 이곳에서 청년 윤동주는 연희전문학교 시절을 보냈다. <별 헤는 밤>, <자화상>, <또 다른 고향> 등 그를 대표하는 시들이 이때 탄생했다. 

시인이 남긴 또다른 흔적은 청와대 뒤편에 위치한 청운동과 부암동의 경계 지점 ‘윤동주 문학관’에 남아 있다. 

이곳은 지대가 높은 청운동에 위치했던 옥인 아파트에 물을 끌어오기 위한 수도가압장이자 물탱크로 쓰이다 2012년 문학관으로 탈바꿈됐다. 시인의 하숙집과 이곳은 2킬로 남짓하다. 문학관 뒤편으로는 인왕산 줄기가 뻗어 있다. 교통이 불편했던 시절, 시인은 걸어서 인왕산을 자주 올랐다고 전해진다.      

종로문화재단에 따르면, 지난 1월 총 4581명이 방문, 평균 176명이 윤동주 문학관을 다녀갔고, 2월에는 총 3805명(24일까지 집계 기준), 평균 211명이 방문했다. 재단 측은 “학생부터 노년의 부부까지 다양한 연령층이 찾고 있다”고 전했다.  
 
“산모퉁이를 돌아 논가 외딴 우물을 홀로 찾아가선 가만히 들여다봅니다 /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습니다”

시인의 작품 ‘자화상’에 그려진 우물은 문학관의 주테마가 되었다. ‘영혼의 가압장’이 주제인 이곳에는 3개의 우물이 있다. 

제1전시실 중앙의 목판으로 된 우물은 미국의 윤동주 시 낭송모임인 선양회가 그의 생가인 중국 길림성 화룡현 명동촌을 수차례 답사한 후 직접 공수해온 것으로 유명하다. 

이어 제1전시실 문을 열고나서면 천장이 뚫린 열린 우물(제2전시실)과 작은 빛만을 허용한 닫힌 우물(제3전시실)이 있다. 이곳은 각기 다른 빛의 양과 모양으로 윤동주가 살아온 삶에 대해 생각케 한다.

▲윤동주 문학관 뒤로 성곽을 따라 꾸며진 시인의 언덕이 있다. 윤동주는 자신이 기거한 기숙사와 가장 가까운 인왕산을 오르며 시상을 떠올리고 다듬었을 것으로 보인다. 시인의 언덕 끝자락에는 시비와 함께 종로의 풍광이 펼쳐진다. (사진=강소영 기자)

문학관을 뒤로한 채 ‘시인의 언덕’에 오르는 사람들을 따라갔다. 성곽을 따라 조성된 이 길은 시인이 종종 시상을 다듬으며 올랐다고 한다. 길의 끝에는 서시가 새겨진 시비가 우뚝 서있다. 그 앞에서 크게 심호흡 하며 시비 뒤로 펼쳐지는 종로의 풍경을 시인처럼 눈에 담았다.

연세대 후배들 “동주 선배 앞에 부끄럽다”

부암동에서 다시 경복궁으로 발길을 돌려 사직동을 지나 이화여대 후문을 지나면 연세대가 나온다. 사촌지간인 동주와 몽규는 1938년 연희전문대(현 연세대) 문과에 나란히 입학해 3년을 이곳에서 보냈다. 

연세대 정문을 지나 5분 정도 걸어 올라가면 시인이 묵었던 기숙사 건물 ‘핀슨홀’이 있다. 1968년 11월 핀슨홀 앞에는 유작 ‘서시’가 새겨진 윤동주 시비가 모교인 연세대 교정에 세워졌다.

▲연세대 정문에서 약 5분을 걸어 올라가면 보이는 핀슨홀은 윤동주가 연희전문학교(현 연세대) 재학 후 초기에 묵었던 곳이다. 이 앞에는 윤동주의 시비가 세워져 있고, 연세대 학생들이 사색을 하기에 좋은 곳이다. (사진=강소영 기자)

취재진은 그 앞에서 지나는 이들을 붙잡고 윤동주에 대해 물었다. 

철학과에 갓 입학한 박연희(20·가명) 학생은 “평소 윤동주 시인을 좋아했다”며 “영화에서 연세대가 배경으로 나와 어쩌면 나와 동시대를 살고 있는 사람이라는 느낌이 들어 친숙했다”고 말했다.

핀슨홀 앞에서 친구들과 담소를 나누던 영문과 졸업생 박솔(24)양은 “윤동주 시인과 같은 과 출신이라는 것에 적잖이 놀라고 부끄러웠다”면서 “그 당시에는 정치를 의무라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사회에 관심을 갖는 것 자체가 힘들지 않나. (정치적) 의무감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는 계기가 됐다”고 전했다. 

새들이 지저귀던 핀슨홀을 지나자 콘크리트 건물들 사이로 학생들이 쏟아졌다. 곳곳의 웃음소리는 커졌고 시인이 남기고 떠난 시(時)도 사람들의 가슴속에 커졌다. 

(CNB=강소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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