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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내 아들 김훈 중위, 왜 죽어야 했나요”

고인 18주기…진상규명 ‘6581일 싸움’ 김척 전 장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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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강소영기자 |  2016.03.02 09:13:10

▲군 의문사로 대표되는 김훈 중위 사건이 18주기를 맞았다. 김 중위의 아버지 김척 전 장군은 아직도 아들의 죽음을 ‘자살’로 단정 짓는 군 당국과 싸움 중이다. 그 긴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사진은 지난 24일 서울 명동 천주교인권위원회에서 열린 김 중위 사건 18주기 미사 모습. (사진=강소영 기자)

“아들의 죽음을 기억 속에서 되새겨야 하는 게 힘들었다. 그래도 타살이라는 확신이 있었기에 진실을 밝히는 게 우선이었다”

지난 24일 명동성당 입구에서 만난 김척 전 장군은 일흔을 넘긴 나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열정적이었다. 그는 자신의 아들 김훈 중위(사망당시 25세)가 군에서 알 수 없는 죽음을 당한 1998년부터 꼬박 18년을 군 당국과 싸우고 있다.
 
김 전 장군의 바람은 하나다. 아들의 죽음을 조작한 이들이 사과하는 것. 시간이 많이 흘렀다. 법적으로 다스릴 수 있는 공소시효까지 지났다. 하지만 아직 범인은 베일에 가려있다. 

김 전 장군은 아들을 죽인 사람보다 이를 감춰온 군 당국에 더 분노한다고 힘주어 말했다. 칠순을 넘긴 노병의 결기는 살을 에는 겨울바람보다 더 서슬 퍼렇게 날이 서 있었다. 
 
김 중위 사건은 18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판문점 공동경비구역(JSA) 경비대대 경비중대 2소대장이었던 김 중위는 촉망받는 육사 출신 장교였다. 주변 사병들을 돌볼 줄 아는 리더십 있는 엘리트 군인이었다. 

육사 동기들은 그를 “확실한 목표의식을 가진 사람이었다. 체력이 좋아 훈련 때 동기생들을 격려하며 이끌었고, 정의감이 넘쳤다”고 회상했다.

1998년 2월24일, 그날은 김대중 대통령의 취임식이 있기 전날이었다. JSA 241GP 3번 벙커에서 한 발의 총성이 울렸다. 정오 무렵 김 중위는 오른쪽 관자놀이에 중상을 입은 채 사망해 있었다.

당시 그의 머리에는 총구를 직접 겨누고 자살한 이들에게서 보이는 별표나 십자가 모양의 자살흔이 남아 있지 않았다. 김 중위는 오른손잡이였음에도 그의 왼쪽 손바닥에서 화약흔이 검출됐다.  

유족은 진상을 밝혀달라고 군당국에 호소했지만 외면당했다. 세월이 지나 미국 군수사 연구소는 “오른손에 일체 화약이 없고 왼손손바닥에만 뇌관화약이 있다. 이는 타살을 뒷받침하는 근거“라고 밝혔다.

여러 차례 진상조사와 재판이 이뤄졌다. 그럼에도 법원과 전문가집단, 군 당국의 결론은 전부 달랐다.

국회 군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는 ‘사인규명 불능’, 국민권익위원회는 ‘타살이 확실하다’며 순직권고를 했다. 법원은 ‘자살을 입증할 수 없다’면서도 ‘타살’로 규정짓진 못했다. 군 당국은 아직도 ‘자살’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지난 24일은 김훈 중위가 의문의 죽음을 당한 지 18주기였다. 김 전 장군은 언제나 그랬듯 서울 명동의 천주교인권위원회 3층 강당에서 아들의 죽음에 대해 목소리를 높이고 있었다. 그를 거기서 만났다. 

▲김척 전 장군(김훈 중위 아버지)이 18년 동안 모은 자료를 설명하고 있다. 그는 칠순이 넘은 나이에도 아들의 죽음 앞에서 강인한 아버지의 모습을 보였다. (사진=강소영 기자)

- 국가인권위가 ‘순직’ 처리를 권고했다. 왜 군 당국은 함구하고 있나.

국방부는 (내 아들을) ‘정신질환자 자살’로 몰려 한다. 이를 인정해야만 순직이 될 수 있고 국립묘지에 묻힐 수 있다는 것이다. 훈이(고 김훈 중위)는 아직도 차가운 ‘벽제 1군단 헌병대 영현창고’에 안치돼 있다. 하지만 유족은 국립묘지에 가기를 원치 않는다. 진실을 밝히고 사과 받기를 원한다. 

국방부는 여전히 우울증으로 인한 자살로 몰고 있다. 나는 이에 대해 김관진 국방부장관(현 청와대 국가안보실장)에게 타살임을 입증하는 11번의 내용증명을 보냈고, 현재 한민구 국방부장관에게 6번의 내용증명을 보냈다. 

(김 중위) 유족이 당시 조사본부장과 수사관 등에 대해 조작에 대한 처벌을 청원했지만, 국방부는 “전역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는 말 뿐이었다. 

- 아들은 어떤 군인이었나.

김 중위는 누구보다 정의감이 넘쳤고 그 덕에 육사 동기생들 사이에서 ‘바른손’이라 불렸다. 어렸을 때부터 나를 따라다니며 온 부대를 뛰어다닌 덕에 기본 체력을 갖추고 있었고, 달리기도 매우 빨랐다. 무거운 군장을 들고 행군을 할 때도 낙오되는 이들을 보살피는 역할을 하는 등 전우애와 리더십이 남다른 군인이었다. 

- 그간 국방부의 수사과정을 알려달라.

국방부는 미군 범죄수사대(CID)와 1998년 4월까지 1차 수사를 진행했다. 그해 6월부터 11월까지 육군본부 검찰부가 2차 수사를 했고, 다시 대규모 합동조사단이 구성돼 이듬해 4월까지 3차 수사가 진행됐다. 

사인의 조사결과는 모두 자살이었다. 당시 국방부는 사건 발생 후 김 중위 외 소대원들에 대해 일체 권총발사 여부를 확인하지 않았다. 소대원 중 단 한명인 K중사의 장갑, 피부 등에 대한 조사를 사건 발생 10개월 후인 12월 28일경 실시했을 뿐이다. 

지난 2012년에는 12명의 특전사 소속 요원들이 6명씩 다른 자세로 방아쇠를 당기는 사격 실험을 진행했다. 김 중위가 왼쪽 손바닥에서 화약흔이 검출된 것과 달리, 대부분 손등에서 화약흔이 검출됐다. 이는 자살이 아님을 입증하는 증거다.

- 그날 상황을 설명해 달라.

국방부는 김 중위가 사망한 후 현장 검시도 하기 전에 ‘자살’이라고 발표했다. 당시 현장에는 김 중위의 손목시계가 깨져 있었고, JSA에서 유사시에 사용하기 위해 비치된 크레모아(대인지뢰의 일종) 스위치 박스가 훼손돼 있었다. 

그 다음날은 김대중 대통령의 JSA 방문이 예정돼 있었다. 

당시 JSA 소속의 한 병사는 전역 후 “VIP(김대중)의 방문이 예정돼 있었다면 크레모아 스위치 박스는 그날 즉시 수리됐을 것”이라고 증언했다. 즉, 폭발물로서 중요하게 관리되는 만큼 파손된 이유가 격투의 흔적일 수 있다는 얘기다.  

또 김 중위의 손목시계가 훼손된 것은 누군가와 격투를 벌이고 있었음을 반증하는 것이다. 그러나 보존되어야 할 시신을 닦고 헌병대 수사관이 물청소를 하는 등 증거의 흔적을 지움으로써 사건이 조작됐다.

▲김 전 장군이 김 중위 사건 현장에서 ‘철모’가 찍힌 사진을 들고 있다. (사진=강소영 기자)

- 누가 그를 죽인건가. 

1999년 4월 2일 국방부 특조단이 당시 국방위소속 한나라당(새누리당의 전신) 하경근 의원에 제출한 사건현장 사진에서 철모가 발견됐다. 사건 당일 오후 1시경 유엔군사령부 경비대대소속 포터 하사가 촬영한 것이다. 하지만 이후 2시간 30분뒤 도착한 CID가 찍은 사진에서는 사라졌다. 

철모에는 형광물질로 이니셜이 쓰여 있으나, 자세하게 누군지 알 수 없었다. 철모에 대해 특조단은 사건 당일 미군 경비대대 소속 아리스 군의관이 낮 12시57분께 현장에 도착해 벙커 내부로 들어가 사체 검안을 위해 벗어놓은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당시 벙커 근무를 섰던 병사는 “미군이 천으로 된 모자를 쓰고 있었다”고 진술해 국방부 주장은 신빙성을 잃었다.

- 아직 장례를 못 치뤘다고 들었다.

내 아들은 아직도 경기도 벽제 헌병대 창고에 잠들어 있다. 순직 처리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국민권익위에서 ‘순직’을 국방부에 권고했지만, 국방부는 묵묵부답이다. 나는 아들의 명예회복보다 그들이 잘못을 인정하길 원한다. 그리고 부모들이 아들을 믿고 보낼 수 있는 군(軍)이 되길 원한다. 그것이 내 마지막 소망이다.
 
(CNB=강소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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