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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사의 비극은 괴담이 되어...’

경북의 기묘한 이야기 ② 슬픈 역사를 간직한 ‘경산 안경공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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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김희정기자 |  2013.07.24 20:18:15

▲코발트 광산 폐갱도 입구. 현장 훼손을 막기 위해 철문이 굳게 닫혀있다.(사진/김락현 기자)

경북 경산시에는 수만의 영(靈)들이 모여 있어 단순한 호기심만으로는 절대 가지 말아야 한다는 장소가 있다. 우리나라에서 손꼽히는 빙의 체험 공간이라는 섬뜩한 소문도 돌고 있다.

바로 ‘경산 안경공장’이라고 불리는 곳이다.

이 장소에 대한 악명은 여타의 흉가들처럼 건물 자체의 문제라기보다는 인근 코발트 광산에 서린 역사적인 아픔으로 인해 더욱 높아졌다는 설이 있다.

이곳은 6·25전쟁 중 최초의 집단 민간인 학살인 ‘국민보도연맹 사건’이 일어난 슬프고도 끔찍한 장소 중 한 곳이다.

코발트 광산은 일제가 태평양전쟁에 소요되는 군사용 코발트 공급을 위해 1930년대에 채광을 시작한 곳으로 1942년께 폐광 후 방치됐고, 산 전체가 개미굴처럼 뚫려있어 당시 학살의 적지로 지목됐다고 추정되고 있다.

현재 안경공장 터에는 요양병원이 들어서 있다. 그 뒤에는 골프장까지 지어졌다. 한 차례 소나기가 퍼붓던 24일 오전 이곳을 찾았다.

요양병원 입구에서 오른쪽으로 난 길로 30m, 다시 샛길로 10m정도 내려가면 폐갱도 입구가 나온다. 코발트 광산 사건 현장이다. 입구는 현장 훼손을 막기 위한 철문이 굳게 닫혀있다.

어두컴컴한 철문 틈 사이로 땅속 깊은 곳의 찬바람이 폐 갱도를 따라 바깥으로 뿜어져 나왔다. 습한 기운도 함께 느껴졌다. 갱도 바닥을 흐르고 있을 물 때문일 것이다.

닫혀 진 철문에 가만히 손을 댔다. 한 여름 무더위에도 철문은 물기를 머금은 한기를 내뿜었다. 순간 몸이 움츠러들었다. 꼭 철문의 서늘함 때문만은 아닌 듯했다.

이곳에서 요양병원 주차장 쪽으로 2~3분정도 올라가면 요양병원 건물 한쪽 귀퉁이에 위치한 또 다른 갱도 입구가 나온다. 다른 갱도와는 달리 철문이 열려있었다. 입구부터 안쪽으로 일렬로 달려있는 전구 불빛에 언뜻언뜻 내부가 드러났다.

바닥에는 광산 안쪽에서 흘러나온 물이 고여 있고, 입구 쪽에는 수 십 개의 하얀 리본이 묶여져 있었다. 이미 번져버려 알아볼 수 없는 리본의 추모 문구가 눈에 들어왔다. 갱도 속 습기와 흘러간 세월의 흔적일 것이다.

경산 코발트 광산과 관련된 국민보도연맹 사건의 전말은 이러하다. 민족상잔의 비극인 6·25가 발발하기 1년 전. 남한 정부는 좌익인사 교화 및 전향을 목적으로 좌익 운동을 하다 전향한 사람들을 모아서 ‘국민보도연맹’이라는 반공단체를 만들었다.

▲요양병원 건물 한 쪽에 위치한 또 다른 갱도의 입구. 다른 곳과는 달리 철문이 열려 있다.(사진/김락현 기자)

주로 사상적 낙인이 찍힌 사람들을 대상으로 했고, 가입인원이 말단 행정기관에 할당돼 본인의 의사와 상관없이 강제로 가입되기도 했으며, 일부지역에서는 비료나 배급 등 각종 혜택을 준다고 유인해 가입시킨 경우도 있었다고 전한다.

1949년 말 보도연맹 회원 수는 전국적으로 무려 30만명에 달했고, 전쟁이 일어나자 정부는 초기 후퇴 과정에서 보도연맹 회원들을 사살하기 시작했다. 이들을 남겨두고 후퇴하면 그들이 곧 남한의 적이 될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러한 사실은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저서 한국근현대사사전 등에서 확인할 수 있다. 또 인터넷 포털사이트에서 ‘보도연맹’ 혹은 ‘국가보도연맹’으로 검색해 봐도 상세한 내용을 알 수 있는 현대사의 비극이다.

이 사건으로 인해 1950년 7월부터 9월까지 경산, 청도, 대구지역의 국민보도연맹원 1천여명과 대구형무소에 수감돼 있던 재소자 2천500여명 등 수 천 명의 민간인들이 이곳 폐 코발트 광산 인근에서 집단 사살돼 매장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실제로 몇 해 전 대규모 발굴 작업을 통해 수 백점의 유골이 발견되기도 했다. 당시 유골 더미는 반경 2∼3m에 불과한 좁은 지역에 층을 이루고 쌓여 있어 학살의 규모와 처참함을 그대로 보여줬다고 한다.

이러한 슬픈 역사는 이후 이 터에 들어선 공장들의 악재와 맞물리면서 흉흉한 괴담들을 낳게 된다. 코발트 광산 사건 때 희생된 원혼이 떠돌고 있다는 소문 외에도 인터넷 등에 떠도는 경산 안경공장에 관한 이야기는 이렇다.

코발트 광산 사건 이후 1960년대 초 이 터에 섬유공장이 들어섰으나 알 수 없는 화재의 연속으로 공장이 망하면서 사장이 자살했고, 그 뒤 구두공장이 생겼으나 같은 이유로 사장이 자살했다는 것이다.

마지막이 안경공장인데, 사장이 미쳐 기숙사에서 자던 직원 20여명에게 석유를 뿌린 후 불을 질러 죽이고 자신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소문이 돌고 있다.

▲열린 갱도 내부의 모습. 바닥에 고인 물과 추모의 글이 적힌 하얀 리본이 눈에 들어온다.(사진/김락현 기자)

최근 흉가체험을 목적으로 경산 안경공장 일대를 다녀온 손창규(29)씨는 “밤에 너무 어두워서 길을 잘 찾지 못했다. 요양병원에서 마실 나온 듯 보이는 한 할아버지께 길을 물은 뒤, 다시 걸어가다 무심코 뒤를 돌아봤는데, 순식간에 할아버지가 사라졌다”면서 “거동이 불편해 빠른 이동은 불가능한 분이었다. 소름이 끼쳐 더 이상 체험을 하지 못하고 돌아왔다”고 말했다.

코발트 광산 사건은 감출 수 없는 역사적 비극이지만 경산 안경공장에 대한 소문은 그저 괴담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1988년 국제광학이라는 안경제조업체가 있었는데, 이 공장이 97년도에 부도나서 문을 닫은 것일 뿐, 방화와는 상관없다는 이야기도 있다. 20명이 화재로 죽었으면 언론에서 대대적으로 떠들었을 텐데, 그런 흔적이 없다는 것이다.

사실 여부야 어찌됐건 말끔한 요양병원이 들어선 경산 안경공장과 철문으로 굳게 닫힌 폐 코발트 광산은 이제 표면적으로는 비극도, 괴담도 모두 잊은 듯 한 모습이다.

하지만 코발트 광산 사건 희생자들의 유족들은 지금까지도 진상규명과 명예회복, 손해배상을 위한 소송을 진행하고 있고, 아직 수습하지 못한 유골도 수 천 점에 달한다.

또 경산 안경공장은 마니아들이 흉가체험을 위해 많이 찾고 있는 곳이 됐다. 겉모습은 변했을 지언 정 그 안에 깃든 비극과 괴담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인 것이다.

경산에서 50여년을 살았다는 한 할아버지는 안경공장에 대한 괴담은 전혀 알지 못했다. 그는 다만, “어떤 이유로 코발트 광산 사건과 귀신이야기가 엮였는지 알 수 없지만 6·25전쟁 때 코발트 광산에서 많은 사람들이 죽은 것은 맞다”고 전했다.

그러면서 “이 사건에 대해 직접적으로 아는 사람들은 점점 나이를 먹어 가고 있고, 젊은 사람들은 ‘귀신’ 어쩌니 하는 이야기에만 관심 있으니 안타깝다”며 “비극이 끝나지 않는 한 무서운 소문들도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코발트 광산 사건은 불과 60여년 전 우리 민족에게 일어난 일이었다. 이 사건도 끔찍한 민족의 아픔이고, 경산 안경공장을 둘러싼 괴담도 물론 섬뜩하다.

하지만 우리의 무분별한 호기심으로 아픈 역사가 덮어지거나 왜곡되고, 혹은 무관심으로 점차 잊혀져가고 있다는 것이야 말로, 그 어떤 괴담보다 더욱 무서운 일이 아닐까? /김희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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