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린은 붙박이? 자유자재 이동
반려동물처럼 내 몸에 ‘착’ 붙어
옛 PMP 시절의 환호 재현되나
“대한민국은 IT강국”이란 말은 이제 잘 쓰지 않습니다. 당연하게 여기는 이유가 가장 클 텐데요. 그만큼 국내 정보통신산업은 급속도로 성장하며 세계에 이름을 날려 왔습니다. 날로 고도화되는 기술, 이를 바탕으로 탄생한 혁신적인 제품들이 증거입니다. 그리고 그 수많은 결과물에는 반드시 이야기가 숨어 있습니다. ‘IT 이야기’, 줄여서 [잇(IT)야기]에서 그 설을 풀어봅니다. <편집자주>
‘영상 재생기’ 들고 다닌 그 시절
2002년, 대한민국은 두 가지에 미쳐 있었습니다. 하나는 아시다시피 월드컵이고 하나는 도토리를 먹고 사는 싸이월드 미니홈피였습니다. 상갓집에서조차 “대~한민국~!”을 외치고 슬퍼서 눈물이 나는 데도 얼른 찍어 미니홈피에 올릴 지경이었으니 그야말로 광기가 지배하던 시절이었습니다.
그 무렵, 학생들을 미치게 만든 것은 따로 있었습니다. PMP로 불리는 포터블 미디어 플레이어입니다. 들고 다니는 영상 재생장치죠. 당시엔 혁신이었습니다. 4인치 가량 되는 대화면(?)에 인강(인터넷 강의)을 띄워 공부하고 쉬는 시간에는 영화도 볼 수 있었으니 혁명의 아이템이었습니다.
단점이라면, 나중에는 개선됐지만 16GB 밖에 되지 않는 용량이라 자주 동영상을 넣고 빼야하는 번거로움이었습니다. 많은 영상을 한번에 담기엔 무리가 컸습니다. 그렇지만 아무리 수고스러워도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어디서나 영상을 재생할 수 있어서 엄청난 인기를 자랑했었습니다. 그 당시 신인이던 배우 강동원이 등장해 엄청난 미모(?)를 자랑한 PMP TV광고는 아직도 회자되곤 합니다.
1990년대 말, 당장 브라운관 속 교육방송을 보며 수능을 준비하던 때와 비교하면 격세지감입니다. 수능강의가 방송될 때면 아버지는 뉴스를 끄고 방에 들어가시곤 했습니다. 방송 중에 실제 수능 문제가 나온다는 믿거나 말거나인 소문을 맹신한 어머니가 아버지의 채널 선택권을 박탈하셨습니다. 당시에 휴대용 재생장치가 있었다면, 아버지를 거실에서 몰아내는 불효를 저지르지는 않았을 텐데, 라고 늦었지만 후회해봅니다.
PMP의 전성기는 짧고 굵었습니다. 약 10년 뒤 검정 터틀넥을 입은 남자가 세상을 놀라게 하면서 역사의 한 페이지로 남았습니다. 인터넷, 동영상, 음악 할 것 없이 손바닥만 한 기기에서 전부 실행 가능한 기술적 진보도 놀라웠지만 무엇보다 휴대성이 큰 충격을 줬습니다. 이전에는 가방에 휴대전화니 PMP니 MP3니 전부 넣어 다녔는데 한 기기에 다양한 역할들을 몰아넣어 짐을 줄여준 겁니다. 돌이켜보면, 스마트폰도 PMP도 결국 수용과 이동의 한계를 넘은 것이 소비자들의 선택을 받은 요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움직이는 스크린의 역습 ‘더 프리스타일’·‘LG 스탠바이미’
스마트폰의 시간은 지금도 유효합니다만 아쉬움은 물론 있습니다. 화면의 크기인데요. 아무리 화질이 뛰어나도 크게 볼 때의 시원시원함을 충족시킬 수는 없습니다. 최근에 잘 나간다는 두 스크린 제품은 두 가지 기능으로 화제의 중심에 섰습니다. 양립하기 어려운 조건, 대화면과 휴대성입니다. PMP와 묘하게 겹쳐 보이는 대목입니다.
삼성전자의 포터블 스크린 ‘더 프리스타일’ 얘기부터 해보겠습니다. 지난달 초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폐막한 세계 최대 전자 전시회 ‘CES 2022’에서 공개해 주목을 받은 제품입니다.
일단 한손으로 감쌀 만큼 작습니다. 무게도 830g이라 가볍습니다. 들고 다니기에 부담스럽지 않다는 뜻입니다. 전원 플러그 연결 없이 USB-PD, 50W/20V 외장 배터리 연결로 사용이 가능합니다. 오래 외출해도 된다는 얘기입니다.
기존 스크린 제품과 다른 점은 자유로운 각도 조절입니다. 얼핏 천체망원경을 닮았는데, 빛을 쏘는 원통 부분이 180도로 회전이 됩니다. 벽이나 천장, 바닥 등에 원하는 각도로 비춰 사용할 수 있는 요건을 갖춘 셈이죠. 일단 쏘면 100형(대각선 254cm)의 대화면으로 콘텐츠를 즐길 수 있습니다.
‘더 프리스타일’보다 앞서 나온 LG전자의 라이프스타일 스크린 ‘LG 스탠바이미’에 먼저 눈이 가는 것은 이름입니다. 리버 피닉스가 호연한 1986년 영화 ‘스탠바이미’와 동명입니다. 네 명의 친구가 꼭 붙어서 여정을 떠나는 줄거리로, 성장 영화의 교본으로 꼽히는 그 작품입니다.
‘LG 스탠바이미’의 가장 큰 특징은 단짝처럼 붙어 다니는 스크린이란 점입니다. 대각선 길이가 약 68센티미터 되는 27형(인치)인데 스탠드 아래에 바퀴, 즉 ‘무빙휠’이 탑재돼 끌고 다닐 수 있습니다. 화면 각도를 좌우, 앞뒤, 위아래로 꺾을 수 있어 눕거나 앉거나 선 상태서 모두 시야각에 맞게 볼 수도 있습니다.
이쯤에서 의문이 들 것입니다. 모니터 역할만 하는 것이 아닌가? 반드시 주변기기에 연결해야만 볼 수 있는가? 그건 아닙니다.
더 프리스타일은 넷플릭스, 디즈니+ 등 국내외 다양한 OTT를 포함한 스마트 TV 서비스를 삼성 TV와 동일하게 지원합니다.
LG 스탠바이미는 LG 스마트 TV 플랫폼과 동일한 webOS를 탑재해 넷플릭스, 디즈니플러스, 왓챠 등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최근에는 LG 스탠바이미에 카카오엔터테인먼트의 웹툰 플랫폼 카카오웹툰도 론칭해 이용 가능한 콘텐츠의 영역을 확장하기도 했습니다.
한시적 호기심일까?
반응은 뜨겁습니다.
관련 업계에서는 ‘반려스크린’의 시대가 열렸다고 보고 있습니다. 반려동물처럼 붙어 다니는 재생기기의 인기가 심상치 않기 때문입니다.
삼성전자는 지난달 11일 ‘더 프리스타일’의 예약 판매를 온라인에서 시작했는데, 40분만에 준비한 물량 100대가 완판 됐습니다. 당초 삼성전자는 20일까지 예약 판매를 진행하려 했는데 일찌감치 전부 팔려 해지기도 전에 문을 닫은 셈이 됐죠. 이 제품의 가격이 결코 저렴하지 않은 119만원임을 감안하면 놀라운 판매 속도입니다.
‘LG 스탠바이미’ 역시 완판 행렬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나오면 팔린다”는 얘기가 괜히 나오는 게 아닙니다. 중고거래 사이트에선 웃돈을 얹고서라도 사려는 수요가 있으니, 과거 품귀현상을 일으켰던 ‘허니버터칩’을 연상시킬 만큼 대란입니다.
이렇듯 두 제품 모두 출발은 순조롭습니다. “함께 다니기 좋고 크게 볼 수 있다”는 점이 소비자들의 호응을 얻은 겁니다. 이쯤에서 궁금해집니다. 과연 이 레이스는 어떻게 될까요? 이동의 제약을 풀어 큰 인기를 얻은 PMP처럼 긴 돌풍을 일으킬까요, 아니면 한시적 호기심에 그쳐 금세 잊힐까요? 두 자유롭게 움직이는 스크린이 혁신 아이템으로 두고두고 회자될지 지켜볼 일입니다.
(CNB=선명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