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온 폐기물…그 놀라운 쓰임
바꾸고 다시 쓰자 일어난 변화
플라스틱 쓰레기가 공원 벤치로
장갑·가방·쿠션… ‘묻지마 부활’
가히 아나바다 운동의 부활이다. 아끼고 나누고 바꾸고 다시 쓰자던 1990년대 그 캠페인 말이다. 시간이 흘러 농도가 더욱 짙어졌다. 거센 친환경 열풍이 추억의 캠페인을 소환했는데, 기업들이 최근 중요시 여기는 ESG 경영과 맞물려 더욱 강력해져서 돌아왔다. 네 가지 행동 지침 중 현재 가장 각광받는 구호는 ‘바’와 ‘다’로, 바꾸고 다시 써서 나온 결과물들이 놀랍다. 일상에 깊숙이 침투한 친환경 시대 제2막을 상편에서 짚어본다. (CNB=선명규 기자)
튄다는 것은 주변과 어우러지지 않는다는 얘기다. 조화와 동떨어진 말이기도 하다. 과거 친환경을 목적으로 탄생한 재생품은 튀었다. 재활용품임을 부단히 티냈다. 자연을 위한다는 의미에서 대체로 녹색을 많이 썼다. 쓰레기였던 과거의 거친 모습을 정제하지 않은 채 드러내기도 했다. 이 물건의 출발점이 무엇인지 상기하라는 소리없는 아우성이다. 이와 같은 표시장치를 통해 사람들에게 경각심을 주려한 것이다. 애써 규정짓자면, 친환경 시대 제1막에는 그랬다.
요즘은 크게 달라졌다. 존재감을 싹 감췄다. 이제 누구나 친환경의 중요성을 알게 되자 이와 관련된 결과물도 놀랍게 변했다. 대표색은 버리고 외형도 말끔해졌다. 무엇보다 어디에 놔도 조화롭다. 고개를 돌려보시라. 어느새 나를 위해 쓰임을 다할 뿐인 친환경의 세계가 일상의 자리에 불쑥 들어와 자리하고 있다.
튀지 않고 엉덩이를 감싸는 조화로움
“몰랐죠. 뭐가 다른 데요?” 지난 16일 오후 가을볕이 내리쬐던 광화문 인근 종로 홍보관 앞. 의자에 앉아 한가로이 십자수를 놓던 중년 여성에게 우문을 던지자 이런 현답이 돌아왔다. “지금 앉은 벤치가 재활용으로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아냐”는 말로 인터뷰를 풀어갈 요량이었다. 어리석은 질문에 그녀의 눈동자엔 물음표가 동동 떠다녔다. 그걸 어떻게 알 수 있냐는 표정이었다. 회색 바닥 위에 보호색처럼 회색인 의자가 놓여있을 뿐이라 어쩌면 당연한 반응이었다. 눈을 씻고 봐도 재활용 티가 나지 않는 자연스러움은 어떻게 연출 가능했을까?
접점이 흐릿한 두 기업의 원료가 쓰였다. 아모레퍼시픽의 화장품 플라스틱 공병과 삼표그룹의 초고성능 콘크리트인 UHPC(Ultra High Performance Concrete)이다. 둘을 섞자 하나의 의자가 완성됐다. 양사가 처음 힘을 합친 것은 지난해. 당시 합심해 만든 벤치 8개를 ‘벤치 더 놓기 프로젝트’를 추진하는 서울시 종로구청에 전달했다. 그 의자 중 하나가 2021년의 가을, 십자수를 놓는 시민의 엉덩이를 받친 것이다. 다 쓴 화장품 통을 다시 쓰고 바꿔 쓰니 ‘쓸모’라는 생명력을 얻었다.
올해는 자원순환의 날(9월6일)을 맞아 종로구에 두 번째 기증을 했는데, 역시나 주변과 어우러지는 점이 눈에 띈다. 벤치가 설치된 곳은 서울 창덕궁 옆 공원. 풀밭 즐비한 이곳에는 흙색을 써서 주위와의 일치감을 높였다.
디자인을 담당한 아모레퍼시픽 리테일 크리에이티브팀 허유석 디자이너는 “앉는다는 행위 자체가 디자인의 결과물이 되도록 곡선 라인을 강조했다”며 “벤치가 설치될 창덕공원과 잘 어울리도록 색감 등을 고려했다”고 설명했다.
여기뿐만 아니다. 이제 친환경 의자는 어디서든 쉽게 만날 수 있다. 아무리 등잔 밑이 어두워도 눈에 불을 켜고 보자. 풍광 수려한 제주도 올레길을 걷다가 잠시 쉴 때 어느덧 엉덩이를 감싸고 있을 지도 모른다.
장소는 여기. 18코스 별도봉, 11코스 모슬봉, 15코스 한림읍 귀덕리다. 이 길을 걷는다면 예의주시하자. 힌트를 하나 더 제시하자면 단추처럼 생겼다. 항아리 뚜껑과도 닮았다. 방석만큼 크다. 주로 돌무덤 위에 있다. 색도 돌과 비슷하다. 그래서 돋보이지 않고, 그러므로 자연 한복판에서 이질적이지 않다.
혹여 올레길을 순례하다 이 둥그스름한 의자에서 휴식을 취한다면, 다음 경로와 함께 여기에 들어간 재료를 생각해 보는 것이 좋겠다. 벤치 한 개 당 버려지는 플라스틱 16kg이 쓰였다. 생활용품 기업 락앤락이 소비자들로부터 수거한 밀폐용기에서 나온 것들이다. 코스 통틀어 벤치가 총 10개 설치됐으니 그 양이 어마어마하다. 제품으로 환산하면 플라스틱 밀폐용기(460ml 기준) 1450개가 사용된 꼴이다. 다시 써서 일으킨 효과가 이렇게나 크다.
역할 분담이 확실하다. 사단법인 제주올레가 업사이클링 벤치 조성을 위한 공간 마련 및 유지와 보수, 비영리공익재단 아름다운가게는 락앤락이 기부한 제품과 조성 기금을 제작에 활용하도록 도왔으며, 제주 로컬 기업인 간세팩토리가 제작을 맡았다.
락앤락 HR센터 강민숙 상무는 “많은 관광객들이 제주올레 길에 설치된 모작 벤치를 이용하면서 자원순환의 의미를 되돌아볼 수 있길 바란다”고 말했다.
위험한 판스프링이 안전지킴이로
상전벽해인가 환골탈태인가. ‘도로 위 흉기’로 불리는 화물차 적재함 보조 지지대, 즉 판스프링이 스쿨존에서 아이들의 안전을 지키는 방호울타리로 돌아온다. 화물차에서 이탈해 다른 차량을 덮치면서 사고를 유발하는 그 쇠붙이가 안전지킴이로 탈바꿈하는 것이다. 바꿔 쓴다는 아이디어가 대반전을 일으켰다.
이런 개과천선의 작업을 위해 많은 손이 맞잡았다. 현대자동차, 국토교통부, 경찰청, 서울특별시, TS한국교통안전공단이다. 이들은 ‘화물차 불법 판스프링 제거를 통한 어린이 보호구역 안전 울타리 설치 캠페인'을 통해 정식 구조변경승인을 받지 않은 판스프링을 회수해 어린이 보호구역 안전펜스로 다시 제작해 설치하고 있다.
이를 위해 현대차는 다음달 31일까지 상용차 전용 블루핸즈(전국 50개소)를 방문해 캠페인 참여를 신청하는 선착순 300명의 화물차주에게 판스프링 제거 비용과 주유상품권(10만원)을 지원한다. 대상은 차종과 제조사를 가리지 않는다.
현대차 관계자는 “작은 실천으로 도로 위 안전을 위협하던 판스프링이 아이들을 지키는 보호장치로 완전히 탈바꿈할 수 있다”며 “전국에 계신 화물차주 및 트럭커와 함께 교통안전 문화를 개선할 수 있는 다양한 프로그램을 마련할 것”이라고 말했다.
'잘 버리기'가 출발점
다시 쓰고 바꿔 쓰기의 시작은 '잘 버리기'이다. 한 데 모아져야 재생이 용이하다.
대표적인 사례가 있다. ㈜스타벅스커피 코리아는 지난 3월부터 약 한 달 간 매장에 플라스틱 전용 수거함을 설치하고 플라스틱컵과 투명 페트병을 모았다. 이렇게 저축한 용기들을 세척하고 재생섬유로 전환하는 작업을 거쳐 장갑, 가방, 쿠션 등 MD 상품으로 만들어 14일부터 매장에서 선보이고 있다. 한낱 쓰레기를 모았더니 한껏 볼만한 새제품이 탄생한 것이다.
롯데지주는 유통·화학 계열사 등과 함께 국산 폐페트병 재활용을 체계화한 플라스틱 선순환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는데, 시작점은 전용 수거 기기 설치다.
먼저 AI기반의 페트 회수 로봇 개발 및 보급, 그리고 수거된 페트를 원료화하는 작업을 맡은 소셜벤처 ‘수퍼빈’에 상생협력기금 9억원을 지원한다. 페트 회수 로봇은 이달 초부터 롯데마트와 세븐일레븐에 순차적으로 배치돼 ‘페트 수집’의 거점 역할을 담당한다.
이렇게 모은 페트는 롯데케미칼과 연계해 친환경 제품 생산에 쓴다. 롯데케미칼은 자체적으로 ‘프로젝트 루프(Project LOOP)’를 진행하며, 수거한 폐플라스틱을 활용해 친환경제품을 제작하고 있다.
롯데지주에 따르면 향후 롯데케미칼은 저품질 폐페트도 원료로 사용할 수 있으며 반복적인 재활용에도 품질 저하가 없는 화학적 재활용 페트(C-rPET) 생산량을 2030년까지 연간 34만 톤까지 늘릴 계획이다.
한 업계 관계자는 “아껴 쓰고 재활용이 용이한 소재로 바꿔 쓰자던 기업들의 친환경 활동이 전환기를 맞고 있다”며 “장차 핵심은 그렇게 비축한 것들로 전혀 새롭고 또 이로운 물건을 만드는 일”이라고 말했다.
(CNB=선명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