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의점에서 감기약 ‘판콜’을 사 먹는 장면이 광고에서 사라진다. 편의점에서 안전상비약으로 판콜이 팔리는 것을 불편해하는 약사들의 항의 때문이다. 광고 내용 자체는 문제가 없지만 약사들의 ‘갑질(?)’에 제약사가 몸을 낮춘 셈이다. 제약사들의 말 못할 속사정을 들여다봤다. (CNB=이동근 기자)
약사들 “감 놔라, 배 놔라” 압박
제약사들 별문제 없어도 눈치보기
눈밖에 나면 매출↓ 법보다 무서워
지난 18일부터 방영되고 있는 동화약품의 감기약 ‘판콜’ 광고에서 편의점 아르바이트생이 재채기한 뒤 판콜을 개봉하는 부분이 빠질 예정이다. 약사의미래를준비하는모임(약준모) 등 약사단체와 일선 약사들의 항의 때문이다.
광고 내용은 비교적 간단하다. 직장인, 편의점 아르바이트생, 운동하는 사람이 각각 등장해 감기 증상이 나타난 뒤 해당 제품의 뚜껑을 따는 것이 전부다. 이 중 약사들의 심기를 건드린 부분은 편의점 알바생이 판콜을 개봉하는 부분이다.
안정상비약인 판콜을 편의점에서 쉽게 구매할 수 있다는 점을 자연스럽게 보여주고 있는데, 이 부분이 약사들에게 불편했던 것. ‘편의점=판콜’이라는 인식을 심어줄 수 있고, 감기기운을 느낀 뒤 판콜을 복용하는 것은 의약품의 오남용 차원에서도 문제가 될 수 있다는 것이 약사들의 주장이다.
동화약품은 광고에서 이 부분을 들어내고 재심의를 받을 계획이다.
약사·의사·정부…모두가 ‘갑’
약사들의 이런 압력은 제약업계에서 사실 비일비재하게 벌어지는 일이다.
대표적인 예가 동아제약(동아쏘시오그룹) ‘박카스’와 관련된 논란이다. ‘박카스’는 정부 정책에 따라 2011년 의약외품으로 분류되면서 그동안 약국에만 판매되던 것이 대형마트, 편의점 등에서도 판매가 되기 시작했다.
이에 약사들이 분노하자 동아제약은 약국용 ‘박카스D’와 일반 마트용 ‘박카스F’를 구분해서 공급하기 시작했다. 가격도 약국용은 500원, 마트용은 800원 수준에 팔리도록 했고, 성분에서도 차별점을 두었다. 같은 의약외품임에도 약국용 제품에 특혜를 준 셈이다.
그러던 중 2015년 초 대한약사회가 “일부 대형마트에서 박카스D가 팔리는 것을 발견했다. 해명과 사과를 촉구하며, 이 요구에 응하지 않는다면 약사회와 전국 2만1000여개의 약국은 즉각적인 대응에 돌입할 것”이라며 동아제약을 재차 압박했다. 이원화해서 팔겠다는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는 것이다.
결국 이 논란은 동아제약이 “유통 이원화를 철저히 준수 하겠다‘는 입장을 표명하는 수준에서 마무리됐지만, 동아제약 입장에서는 억울한 면이 없지 않았다. 모든 소매업소에 박카스를 직접 공급하는 것이 아니다 보니 도매사업자가 약국용 박카스를 공급하는 것을 완벽하게 막지 못 하는 일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게다가 동아제약의 약국용·일반소매업소용 이원화 정책은 어디까지나 동아제약의 정책일 뿐 법적 강제 사항은 아니다. 둘 다 ‘의약외품’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소비자 입장에서는 동아제약이 약국과 일반소매점을 차별한다는 지적이 나올 수 있다.
동아제약은 약사들에게만 압박을 받은 것이 아니다. 2011년 약사들이 박카스의 의약외품 전환에 반대하자 “진짜 피로회복제는 약국에 있습니다”라는 문구를 넣은 TV광고를 했다가 당시 식품의약품안전청으로부터 ‘약사법 위반’ 경고를 받고 광고를 중단한 바 있었다. 동아제약이 약사들의 눈치를 보며 박카스를 마트 등에 제대로 공급하지 않자 정부에서 공개적으로 압박한 것.
제약사들은 의사들의 눈치도 봐야 한다. 대표적인 것이 삼일제약과 안과의사회의 대립이었다. 삼일제약이 2008년 광고모델로 당시 인기 있었던 윤은혜를 모델로 내세우면서 야심 차게 판매했던 ‘EYE2O’(아이투오)가 문제가 됐던 사례다.
아이투오는 일반 약으로 허가가 났던 인공누액제로 당시 상당한 인기를 끌었다. 하지만 당시 안과의사들 사이에서 “아이투오 때문에 안과를 가야 할 환자들이 약국으로 간다”는 주장이 나오자 삼일제약 불매운동이 벌어졌다.
결국 삼일제약은 이 논란으로 인해 상당한 어려움을 겪었고, 그 후 아이투오가 예전의 매출을 회복하는 일은 없었다.
계속되는 ‘갑질’에도 침묵 “왜”
이처럼 제약업계가 의사, 약사, 정부로부터 압박을 받는 경우는 사실 흔한 일이며, 위 사례들처럼 알려진 것은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
제약업계는 “우리는 산업 특성상 乙(을) 중의 乙 위치에 있을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일반의약품은 약국이라는 특수한 유통경로를 통해 판매되기 때문에 약사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고, 제약사들의 매출 중 약 80%를 차지하는 것으로 알려진 전문의약품은 의사의 처방이 있어야 판매되기 때문에 의사의 눈치도 봐야 하며, 약의 허가와 약값 결정은 국민건강보험공단 등 정부 기관의 결정에 달려 있기 때문에 정부의 눈치도 봐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갑’들의 압박은 법보다 무섭다는 것이 업계 관계자들의 공통된 하소연이다. 의, 약사들이 법보다 위에 있는 셈이다.
실제로 위 사례들만 보더라도 판콜은 편의점에서 시판되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으며, 의약외품인 박카스 중 약국용 제품이 일반 마트에서 팔린다고 해서 동아제약이 법적 책임을 질 일도 없다. 아이투오도 일반약으로 허가가 난 이상, 법리적으로나 도덕적으로 제약사가 잘못했다고 지적하기는 어렵다.
물론 의·약사들의 갑질이 너무 심하다 싶으면 제재가 이뤄지는 경우도 있다.
공정거래위원회는 약준모가 지난 2016년 유한양행 등 91개 주요 제약회사에 한약사가 개설한 약국과 거래하지 말 것을 강요한 사실을 적발해 약준모에 대해 과징금 7800만원을 부과했다. 약준모는 한약국에 일반의약품이 공급되는 것을 막기 위해 불매운동 및 제약사에 대한 공문발송 등의 행위를 한 것으로 확인됐다.
하지만 이런 사례는 매우 드물며, 설사 이겼다고 해도 제약사들 입장에서는 ‘찝찝한 결과’로 남는다는 게 관계자들의 설명이다.
업계 관계자는 CNB에 “제약업체의 광고나 판촉행위는 엄격한 기준 아래 이뤄짐에도 갑질 피해를 보고 있어 억울한 면이 있는 것은 사실”이라면서도 “법적으로 이겨도 현장 의사나 약사들에게 미운털이 박히면 결국 손해다. 논란이 다시 언급되는 것 자체로 부담스럽다”며 고개를 저었다.
(CNB=이동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