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콩깍지 시효는 대략 1년 남짓이다. 신비감과 호기심이 사라지면 데면데면 해진다. 혼인을 하면 현실에 직면한다. 어느 순간부터 사랑 보다는 정(情)이나 습관으로 산다. 정(情)에는 미운정, 고운정이 다 포함된다. 아들 낳고, 딸 낳고 그럭저럭 산다. 아내나 남편 보다는 아이를 보면서 산다. 아이들이 커가면서, 혼인 생활이 오래 되면서 부부 싸움도 준다.
서로의 가치관을 인정하고, 체념하는 덕분이다. 그러나 혼인의 이상향을 잊은 것은 아니다. 남 보다 잘 살고, 자랑하고 싶은 사회 본능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공격 본능이 죽은 사화산이 아닌 잠시 쉬고 있는 휴화산에 불과하다.
잠재된 휴화산은 가끔 탈모 병원에서 분출된다. 활화산이 돼 거대한 용암을 내뿜는다. 청소년이나 20대 탈모인은 부모와 병원을 찾는 경우가 제법 있다. 요즘 자녀는 1~2명에 불과하다. 그만큼 귀한 자식이다. 아버지가 대머리이면 아들의 모발탈락 확률도 높다.
젊은 탈모 남성이 부모와 함께 진료실을 찾으면 종종 진풍경이 펼쳐진다. 유전에 의한 탈모 진단이 내려지는 순간, 엄마의 곱지 않은 눈빛이 아버지에게 고정된다. 엄마의 입에서는 한마디가 튀어나온다. “아들에게 별걸 다 물려줬네….” 이때부터 아버지는 큰 죄를 진 것처럼 기가 죽는다. 가끔 “그럼 왜 나하고 결혼했어”라고 핏대를 올리는 아버지도 있다. 그러나 이는 매를 버는 일이다.
엄마의 속사포 말 펀치에 비틀거린다. “당신이 대머리가 될 줄 알았으면 내가 결혼 했겠어~!” 순간, 상황 종료다.
아들의 탈모치료가 시작된다. 하지만 대부분은 아들보다 아버지의 탈모치료가 시급하다. 나이가 들수록 모발탈락이 많고, 자칫하면 탈모치료 골든타임을 놓칠 수 있기 때문이다. 엄마에게 아버지의 치료에 대해 이야기를 한다. 아버지도 기다렸다는 듯이 관심을 보인다. 당연히 남편은 본전도 못 찾는다.
“돈이 어디 있어? 당신, 나 몰래 감춰둔 비상금 있어? 그걸로 해~!”
중년 아버지의 탈모치료는 물 건너간다. 아버지는 의사에게 간절한 도움의 눈빛을 보낸다. 필자는 “아들은 되는데, 남편은 안 되나요”라고 거든다. 엄마는 0.1초도 안 돼 답한다. “아들은 내 아들이고, 남편은 남의 아들이에요.”
중년 부부가 아들의 탈모 치료를 위해 병원에 동행하는 것은 꼭 바람직하지는 않다. 아들의 모발탈락이 대머리인 아버지 탓이라는 것을 다시 확인하는 순간, 부부 사이에는 한랭전선이 흐를 가능성이 있다. 알고 있었다고 해도 다시 확인되는 순간 유쾌하지는 않다. 더욱이 엄마 입장에서는 목숨보다 귀한 아들에게 탈모를 물려준 남편이 연애시절처럼 사랑스럽지는 않기 때문이다.
글쓴이 홍성재 의학박사/웅선클리닉 원장
의학 칼럼리스트로 건강 상식을 이웃집 아저씨 같은 살가움과 정겨움이 넘치는 글로 소개하며 대중의 사랑을 받고 있다. 저서로 ‘탈모 14번이면 치료된다’ ‘진시황도 웃게 할 100세 건강비법’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