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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암 류인석, '대유학자→의병대장' 역사적 의미 수정된다

춘천문화원, 1910년 십삼도의군도총재 추대 '의병대장' 의미 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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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유경석기자 |  2015.03.19 09:03:30

화서학파의 학통을 이은 의암 류인석선생에 대한 역사적 의미가 '대유학자'에서 '의병대장'으로 새롭게 부여될 전망이다. 춘천문화원은 의암 류인석 선생 순국 100주기를 맞아 그간 구국의 일념으로 붓을 내던진 '대유학자'에서 아는 바를 실천한 '의병대장'으로 역사적 의미를 새롭게 부여하는 작업에 돌입했다.


류종수 춘천문화원장은 "류인석 선생이 역사적 의미를 갖는 것은 대유학자보다는 의병대장이었기 때문"이라며 "국가보훈처가 류인석 선생의 선양사업을 지원하는 것도 이 때문"이라고 강조했다.


의병대장 류인석 장군에 대한 의미를 다지기 위해 전장을 누비던 장군의 모습으로 전신 영정을 새롭게 제작하고 춘천 가정리 생가 복원과 화약 제조창, 여의내골 의병훈련장 등을 복원할 계획이다.


앞서 류종수 춘천문화원장은 지난달 25일 서울 광복회관에서 박승춘 국가보훈처장을 만나 춘천 가정리 의암 생가 복원과 의병훈련장 조성 지원을 요청, 연내에 생가복원 기공식이 이뤄질 수 있도록 예산을 지원하겠다고 약속을 받았다.


류종수 원장은 "1910년 조국이 위기에 처하자 십삼도의군도총재(十三道義軍都總裁)에 추대됐다"면서 "이는 현 육군참모총장과 같은 것으로 육군약사에는 '의병이 육군의 효시'라고 기록돼 있다"고 설명했다.


의암 류인석은 1842년 1월 춘천 남면 가정리에서 태어나 연원이 높고 깊은 화서학파에서 공부했다.


하지만 54세 되던 1895년 단발령과 명성왕후 시해사건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키도록 여러 곳에 격문을 보내 지시하고, 그해 12월 24일에 영월에서 호좌창의대장으로 등단했다.


이후 제천과 충주를 빼앗고 친일 관찰사 김규식 목을 베는 등 기세를 떨쳤으나 신무기로 무장한 일본군과 관군에 밀려 1896년 7월 20일 중국 통화현으로 망명했다.


이곳에 최초로 해외의병기지를 건설하고 그곳을 기반으로 의병을 재결집하는 등 조직을 강화하기 위해 노력했다.


1900년 10월 서울로 돌아와 여러 곳을 돌아다니며 대강회와 향음례를 시행하는 등 후학을 양성했으나 1908년 7월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로 다시 망명, 1910년 십삼도의군도총재(十三道義軍都總裁)에 추대됐다.


하지만 조국의 광복을 보지 못한 채 1915년 3월 14일 중국 요녕성 방취구에서 향년 74세로 세상을 떠났다.


현재 의암 류인석 선생의 뜻을 기리기 위해 매년 6월 1일 의암기념사업회 주관으로 의암유적지에서 의암제를 열고 영상상영과 추도식 등 다채로운 행사를 열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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