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법·부정·혼탁…이번에도 여전
막강한 권한, 후보자 탈법 유혹
“아낌없이 쓰자”…갈수록 복마전
과거부터 농·축·수·산림조합의 조합장 선거는 불법과 부정이 난무했다. 2005년부터 지역 선관위가 관리를 맡았지만 이러한 관행은 사라지지 않았다. 이에 대한 보완책으로 지난해 6월 ‘공공단체 등 위탁선거에 관한 법률’이 제정됐다. 그간 개별조합 단위로 치러지던 조합장 선거를 중앙선거관리위원회 관리 하에 일률적으로 실시, 공명선거를 실천하겠다는 취지다.
이에 따라 제1회 전국동시조합장 선거가 내달 11일 열리게 됐다. 그러나 조합장 선거 혼탁은 여전한 상황이다. 중앙선관위에 따르면 공식 선거운동은 오는 26일 시작되지만, 현재까지(2월9일 기준) 부정·불법 선거운동이 포착돼 조치를 취한 건수가 고발 38건, 수사의뢰 8건, 경고 171건으로 총 217건에 이른다.
선관위에 적발된 몇몇 사례는 이렇다.
충남의 한 마을에서는 농협조합장으로 출마할 예정인 A씨가 지난해 8월부터 올해 1월 사이에 관내 마을을 순회하며 총 150여명의 조합원 또는 조합원 가족에게 지지를 호소했다. 이 과정에서 A씨는 한 사람당 20만원~100만원씩 총 6000만원의 현금을 제공한 혐의로 고발됐다.
전북의 한 동네에서는 현직인 B조합장이 연임을 위해 출마예정자 C씨에게 불출마를 조건으로 총 1억원을 제공하기로 약속하고 이중 2700만원을 주선자를 통해 지급한 후 나머지 금액은 조합장 당선 후에 제공하기로 약속했다가 적발돼 기소됐다.
경남에서는 축협조합장에 나설 예정이던 D씨가 적발됐다. 대낮에 고성군의 한 호텔 주차장에서 지인을 통해 현 조합장에게 출마 포기를 대가로 현금 5000만원을 건넨 혐의다.
이처럼 부정선거 사례는 금품이 오간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이밖에도 ▲본인의 이름이 적힌 옷을 입고 거리 활보(경고) ▲행사 경품 지원하며 전단 협찬 내역에 본인 이름 명시(경고) ▲홍보 문자메시지 발송(고발) 등 다양한 방식의 부정 선거가 이뤄지고 있다. 과거 관행에 비춰보면 선거일이 다가올수록 불법·부정 선거 운동은 더 심해질 가능성이 높다.
무소불위 권한…사실상 ‘지방 대통령’
관계기관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불법·부정 선거가 사라지지 않는 것은 조합장의 막강한 권한 탓이라는 지적이 많다. 실제로 농·축·수협의 조합장으로 선출되면 지역사회의 황제급 행세를 할 수 있는 것이 현실이다.
지역과 조합규모에 따라 차이는 있지만 조합장은 대략 4000만원~1억2000만원 가량의 고액 연봉과 별도의 업무추진비 수천만원 그리고 조합 임직원 인사권, 금리와 대출 한도 조절, 각종 사업 결정권 등을 갖고 있다.
또한 조합장 경력을 바탕으로 지방 시·도의원 등으로 진출하는 등 정치권 진출에도 유리하다.
뿐만 아니라 알려지지 않은 숨은 권한도 막강하다. 대표적인 예로 조합장은 조합 지역과 조합원을 위해 사용하는 교육지원사업비(수억~수십억 규모) 지출에 대한 재량권을 갖고 있다. 또 상임이사와 감사 추천권도 갖고 있어 견제 세력까지 장악할 수 있는 권한도 있다. 권한에 비해 감시, 견제는 거의 받지 않으며 무소불위의 권한을 행세할 수 있다는 의미다.
선관위 관계자는 10일 CNB와 통화에서 “아무래도 조합장의 권한이 막강하다 보니 일부 출마예정자들이 당선을 위해 불법행위도 불사하고 있는 것 같다”며 “비상근무 체제로 불법·부정 선거 단속을 강화하고 있다”고 말했다.
투표권을 가진 조합원의 규모가 작다는 점도 불법·부정 선거를 부추기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한 단위 지역 농협조합원의 평균 규모가 대략 2000여명에 불과해 일부 유권자를 매수할 경우 당락에 영향을 끼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일부 조합장 출마예정자들 사이에서는 ‘당선을 위해 비용을 아끼지 말자’라는 생각이 만연한 상황이다. 일각에서는 ‘5당4락(5억원 쓰면 당선, 4억원 쓰면 낙선)’이라는 말까지 나오고 있다.
채찍도 당근도 무용지물?
선관위가 불법·부정 선거 척결을 위해 금품, 음식물 등을 제공받은 사람에 대해서는 예외 없이 10배 이상 50배 이하, 최고 3000만원 과태료 부과(자수자 면제)하는 등 ‘채찍’과 조직적 금품 선거를 신고한 사람에게 최고 포상금 1억원을 지급하는 등 ‘당근’을 함께 사용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조합장 선거 혼탁이 여전한 것이 현실이다.
이런 가운데 사법당국이 부정 선거 사범에 대한 철저한 대응을 예고하고 있어 선거 이후 당선이 취소되는 등 선거 후유증도 만만찮을 것으로 보인다.
이와 관련, 소병철 농협대 석좌교수는 지난 9일 ‘연합뉴스 TV’와의 인터뷰에서 “1차적으로는 정부기관(선관위·검·경)에서 철저한 단속을 해야 하고, 2·3차적으로는 선거 문화 인식의 변화, 지속적 제도 보완 등의 노력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농림축산식품부 관계자는 “그동안 출마예정자들을 대상으로 공명선거 실천 결의대회, 입후보 안내 설명회 등을 통해 관련 법규안내가 수차례 있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미스러운 일이 지속적으로 발생하고 있어 안타깝다”며 “조합장이 개인의 영달이 아니라 조합원을 위해 봉사하는 자리라는 인식의 전환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CNB=허주열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