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첩 하나가 정국을 뒤흔들고 있다. 박근혜 대통령의 것이 아니다. 새누리당 김무성 대표의 수첩이다.
한 청와대 행정관이 집권여당 대표와 중진 의원을 ‘정윤회 문건 유출’ 사건의 배후로 지목했다는 내용이 적힌 수첩 메모가 포착되면서 정국이 떠들썩하다.
지난 12일 언론사 카메라에는 김무성 대표가 국회 본회의에서 수첩을 유심히 들여다보는 장면이 잡혔다. 사진 속 수첩에는 ‘문건파동 배후는 K, Y. 내가 꼭 밝힌다. 두고 봐라. 곧 발표가 있을 것’이라고 기재돼 있었다.
이를 두고 각종 추측이 나왔다. 그러다 13일 김무성 대표의 수첩 속 영문이니셜 K, Y의 주인공이 다름 아닌 ‘김무성, 유승민’이라는 주장이 제기됐다. 예상 밖 반전이었다.
지난해 12월 18일 청와대 음종환·이동빈 행정관과 신용한 대통령직속 청년위원장, 이준석 새누리당 전 비대위원, 손수조 새누리당 부산 사상 당협위원장은 저녁 모임을 가졌다고 한다. 사전에 약속된 것은 아니고 ‘번개’ 형식이었다.
이 자리에서 음종환 행정관이 술에 취해 김무성 대표와 유승민 의원을 지목, 이 같은 이야기를 했다. 그후 이준석 전 위원이 김무성 대표에게 이를 전한 것으로 알려졌다.
음종환 행정관은 이정현 최고위원의 보좌관을 지냈다. 이동빈 행정관은 김문수 혁신위원장이 의원 시절 비서관 등으로 활동했다. 이준석 전 위원은 유승민 의원의 인턴사원 출신이다.
수첩 파문은 점점 커졌다. 김무성 대표는 기자들에게 문자를 보내 “수첩의 내용은 얼마 전 지인으로부터 들었던 것을 메모해 놓았던 것”이라며 “내용이 황당하다 생각해 적어놓기만 하고 더 이상 신경 쓰지 않았다”고 해명했다.
유승민 의원도 보도자료에서 “지난 1월 6일 저녁 새누리당 의원들의 저녁식사 자리에서 ‘청와대의 모 인사가 문건의 배후는 김무성, 유승민이라는 발언을 했다는 이야기를 처음 들었다”며 “너무 황당하고 터무니없는 거짓말이라 대꾸할 가치조차 없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1월 6일은 김상민 의원의 결혼식날이다. 김 대표를 포함한 전현직 의원들이 있던 뒤풀이 자리에서 이준석 전 위원이 이 같은 내용을 공개했다고 한다.
음종환 행정관의 발언은 사석에서 취중 발언이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청와대 행정관이 집권여당 대표와 중진 의원을 겨냥했다는 점에서 파문은 커졌다. 가뜩이나 꼬여 있는 당청 관계가 악화일로를 걷는 것이 아니냐는 관측도 제기된다.
수첩 내용을 두고도 온갖 추측이 나온다. 김무성 대표를 흔들고 있는 친박 주류 측의 의도된 ‘기획설’부터 김 대표가 일부러 수첩 내용이 보이도록 했다는 ‘음모론’까지 터지고 있다.
이를 계기로 당청 갈등이 부각될 가능성도 제기된다. 새누리당 김성태 의원은 14일 라디오 인터뷰에서 “김무성 대표가 별 거 아니라고 진화 했지만 제3자들이 볼 때는 청와대와 당의 갈등구조가 표면화 될 수 있는 여러 가지 개연성이 있다”고 말했다.
청와대를 향한 인적 쇄신 요구도 커질 것으로 예상된다.
앞서 12일 박근혜 대통령은 신년 기자회견에서 이른바 ‘문고리 권력’으로 불리는 이재만·정호성·안봉근 비서관을 적극 두둔했다. 김기춘 비서실장의 교체에 대해서도 애매한 답변을 남겼다. 인적 쇄신 요구는 잦아드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김무성 수첩파동’이 터지면서 청와대도 더 이상 밀려드는 인적 쇄신 요구를 외면할 수 없게 됐다.
◇ 청와대 ‘당혹’, 향후 당청관계-인적쇄신 주목
김무성 대표의 수첩 메모가 정가를 강타하면서 14일 오전부터 당 분위기는 뒤숭숭했다.
공교롭게도 이날 신년 기자회견이 잡혀 있던 김무성 대표는 오전 회의에서 굳은 표정으로 별다른 언급을 하지 않았다. 이완구 원내대표도 말을 아꼈다.
친박(친 박근혜) 맏형으로 불리는 서청원 최고위원은 회의에 불참했고, 친이(친 이명박)계 좌장인 이재오 의원은 회의에 참석했다. 두 의원은 평소 별다른 일이 없는 한 회의에 거의 얼굴을 보이지 않는다는 공통점이 있다.
이재오 의원은 이날 박근혜 대통령의 신년 기자회견에 대한 날선 비판을 가했다. 청와대 홍보수석을 지낸 이정현 최고위원은 반박했다. 계파 대립으로 비쳐졌다.
이재오 의원은 박근혜 대통령이 비서관 3인방을 교체하지 않겠다고 말한 데 대해 “인적쇄신의 대상이 되는 사람들에게 오히려 면죄부보다도 더 큰 힘을 실어줄 수 있는가. 실제로 문고리 3인방이 실세가 돼 버렸다”며 “이제는 (음종환)행정관까지 나서서 헛소리를 하고 돌아다닌다. 이래서 되겠는가”라고 지적했다.
심재철 최고위원도 “청와대 문건 유출과 관련해 온 국민은 대통령이 신년 회견에서 어떤 생각을 갖고 있고 어떤 쇄신을 보여줄 것인지 주목했다”며 “하지만 국민들이 기대했던 전반적인 쇄신 요구는 마치 잘못된 것인냥 치부되고 말았다”고 비판했다.
이에 이정현 최고위원은 “대통령은 신년 회견에서 국민이 먹고 사는 문제에 집중해야 한다는 점과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굳건하겠다는 의지를 밝힌 것”이라며 “그 밖의 다른 사안(인적쇄신 등)은 다른 기회에 얼마든지 말씀할 기회가 있고, 그렇게 해야 마땅하다”고 강조했다.
김무성 대표의 이날 ‘경제 살리기’를 주제로 한 신년 기자회견도 수첩에 묻혀버렸다.
김 대표는 연설 내내 일본과 한국의 경제 상황을 비교, ‘경제 살리기’를 강조하며 박 대통령의 신년 기자회견과 같은 목소리를 냈다. 그러나 기자들조차 첫 질문부터 ‘수첩’ 이야기를 꺼내며 당청 간 갈등설을 언급했다.
김무성 대표는 “당과 청와대는 한 몸이자 공동운명체”라며 “당청 간에 간극이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겠지만 지금까지 불편 없이 소통해왔다. 조금 더 밀접한 소통이 필요하니 앞으로 대통령과 정기적으로 만나서 대화하겠다”고 밝혔다.
또 “신년 기자회견에서 국민들에게 잘 알려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우리 경제에 대한 내용으로 전체를 할애했는데 일문일답에서 중요하지 않은 문제가 부각돼 걱정”이라며 “처음 들었을 때 하도 황당한 얘기라서 수첩에 메모를 했다. 너무 황당한 이야기라 신경 쓰지 않고 있었는데 본회의장에서 다른 메모 찾다가 찍힌 것”이라고 거듭 해명했다.
이유야 어찌됐든 김무성 대표의 수첩 메모로 인해 청와대는 곤혹스럽게 됐다. 민경욱 대변인은 “사실 관계를 확인 중”이라고 밝혔다.
해당 발언을 한 것으로 알려진 음종환 행정관은 “모르는 얘기”라며 강력 부인한 뒤 사표를 제출했다.
김무성 대표의 수첩 메모는 전당대회를 앞두고 있는 새정치민주연합도 난감하게 만들었다. 전대 열기를 띄우며 주목 받아야 할 시기에 당청 갈등으로 세간의 관심이 쏠려버렸기 때문이다.
수첩에 기재된 김무성 대표와 유승민 의원은 2007년 대선 경선 때 앞장서서 박근혜 대통령을 도왔던 인사들이다. 누구보다 대통령을 잘 알고 있다는 얘기다. 그러나 각종 현안에서 박 대통령과 다른 목소리를 내며 현재는 비박계로 분류돼 있다.
김무성 대표는 친박 주류로부터 공격당하고 있고 유승민 의원은 차기 원내대표 경선을 준비 중이다. 이런 이들을 문건 유출 배후로 지목한 내용이 담긴 수첩 여파는 한동안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결국 이를 풀 수 있는 열쇠는 박근혜 대통령이 갖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하루빨리 여론을 감안한 인적 쇄신을 단행하고 당청과 제대로 소통하는 모습을 보여야 사태를 수습할 수 있다는 얘기가 적지 않다.
(CNB=최정숙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