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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벌 호랑이이자 통합의 화신

<기획시리즈 - 우리 고장 순국선열의 혼을 찾는다> 3. 안동 김동삼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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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홍석천기자 |  2014.12.22 18:21:25

우리나라가 광복을 맞은 지 거의 70년이 됐지만 아직까지도 일본은 독도가 자국영토라는 망언이나 역새왜곡 등 도발을 계속하고 있다. 이같은 상황에서 조국의 독립과 국토수호에 헌신한 애국지사들에 대한 관심 역시 높아지고 있다. 이들의 숭고한 애국애족 정신을 본받아 시대를 살아가는 시금석으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다. 전국에서 가장 많은 독립운동가를 배출한 경북이지만 많은 지역민들은 이들이 조국을 위해 지역에서 어떤 활동을 펼쳤는 지 모르는 경우가 많은 것이 현실이다. 나라를 구하겠다는 일념으로 목숨을 던진 경북의 순국선열들을 지역별로 알아보는 시간을 가진다.<편집자 주> 

김동삼은 1878년 6월 23일 경북 안동시 임하면 천전리(내앞마을)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긍식(肯植) 혹은 종식(宗植)이며, 호는 일송(一松)이다. 

안동문화권 최고 학자요 의병 지도자였던 김흥락을 스승으로 모시고 공부하던 김동삼은 서른이 되던 1907년 협동학교 설립에 참가하면서 독립운동에 뛰어든다. 

교사를 거쳐 교감을 맡은 김동삼에게 이것은 독립운동의 출발점이었다. 김동삼은 신민회와 대동청년단에 가입해 활동했다. 신민회와 동지적 결속관계를 가지며 협동학교를 운영하는 한편, 서상일과 안희제 등을 중심으로 영남지역에서 조직된 대동청년단에 들어가 영남의 계몽운동가를 묶어 나갔다. 

겉으로는 협동학교라는 공개된 공간에서 민족문제를 해결해 나갈 새로운 지성을 키워내고, 속으로는 독립군 양성으로 방향을 가늠하고 있었던 것이다. 

◆만주 독립군기지 건설에 나서다 

1910년 8월 국내에서 인재를 양성하기 어렵다고 판단한 김동삼은 만주로 망명해 독립군 기지를 건설하고, 독립군을 키우기로 결심한다. 이상룡, 김대락, 류인식 등이 동참한 망명은 대단위로 이뤄졌다. 

내앞마을 의성김씨 문중과 역시 안동에 자리 잡은 이상룡의 고성이씨 문중에서 각각 150명 정도가 만주로 향했다. 또 이들과 혼반관계를 가진 영덕의 무안박씨, 울진의 평해황씨, 안동의 흥해배씨, 그리고 영양 주실마을의 한양조씨 문중 등도 참가했다. 

한 가문이 아니라, 학연과 혼반으로 얽힌 거대한 혈연집단이 이동한 것이다. 1911년 1월 남만주 유하현 삼원포에 도착한 김동삼은 신흥학교를 설립하고 경학사(耕學社) 결성에 참가한다. 

초대 사장 이상룡을 도와 독립운동기지 건설에 힘을 쏟았던 것이다. 경학사는 동포의 이주를 지원할 경작지 확보 사업을 했고, 인력을 양성하는 기관은 신흥강습소와 그를 이은 신흥학교ㆍ신흥무관학교였다. 

이 시기인 1913년 3월 이름을 중국 동삼성(東三省)의 호칭을 따서 동삼(東三), 동생은 동만(東滿, 1920년 순국)으로 이름 지었다. 김동삼은 1915년 신흥학교 졸업생 등 400명에 가까이를 인솔하고 통화현 팔리초 깊은 산 속에 들어가 ‘백서농장’이라는 군대를 창설한다. 망명 이후 첫 결실이라 할 수 있다.

▲백서농장(경상북도 제공)

이후 서간도의 독립운동 전선이 재편되면서 김동삼은 백서농장을 해체하고 서로군정서 참모장에 취임한다. 독립운동계의 거성으로 자리 잡아 가는 것이다. 

서로군정서 참모장으로서 1920년에 사령관 이청천과 함께 300여 명의 서로군정서 독립군을 지휘한 김동삼은 청산리전투 이후 서간도에 남아 독립전선을 재정비한다. 

청산리전투에서 대승을 거두었지만, 일본군의 보복공세로 말미암아 서간도나 북간도지역 한인사회는 참변을 겪는다. 1920년에 벌어진 경신참변에 김동삼의 가족도 예외가 아니었다. 

일본군은 삼원포 삼광학교 교장이던 동생 김동만을 살해한 것이다. 이에 김동삼은 집안 인사들을 급히 북만주로 옮기면서 서간도 시절을 마무리하고 북만주 시대를 열게 된다.  

◆독립운동계 통합을 끌어낸 최고 지도자 

김동삼에게 주어진 역사적 책무는 경신참변으로 붕괴된 한인 동포사회를 다시 일으켜 세우는 것과 작게 분산된 독립군 조직을 통합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1922년 한인사회와 독립군 통합을 도모했으니, 그 결실이 바로 통의부(統義府)였다. 1923년 중국 상해에서 열린 국민대표회의는 한국독립운동사에서 가장 많은 대표가 집결하고, 가장 오랜 기간 동안, 또 민주적으로 진행된 독립운동가 대표 총회였다. 

국내와 국외에서 지역대표와 단체대표 400명 정도가 상해에 집결했고, 그 가운데 의결권을 가진 대표가 130명을 넘을 만큼 규모가 컸다. 

1921년 이후 침체 현상을 보이던 독립운동에 활력을 불어넣고 임시정부 쇄신 방안을 찾던 이 회의에서 김동삼은 서로군정서와 남만주 대표로서 참석했고 의장에 선출됐다. 하지만 당시 독립군 단체들은 지리멸렬한 상태였다. 

김동삼은 1924년 10개 단체대표를 모아 전만통일회의주비회(全滿統一會議籌備會)를 열었다. 거기에서 김동삼은 의장에 선임돼 그해 11월 24일 정의부(正義府)를 탄생시킨다. 

1927년 이후 김동삼은 국내외에 걸쳐 전개된 유일당운동(唯一黨運動)에 힘을 기울였다. 이것은 독립군 단체 위에 하나의 지도 정당을 만들자는 것이고, 좌우세력을 통합하자는 운동이었다. 

끊임없이 독립운동계의 통합과 통일을 추진하던 김동삼이 이에 앞장 선 것은 너무나 당연한 사실이다. 1928년에는 정의부를 대표해 참의부ㆍ신민부 등과 삼부통합회의를 개최한다. 이후에도 그는 독립운동계의 통합과 효율적인 투쟁방안 모색에 집중한다. 

▲김동삼 선생 생가(왼쪽)와 어록비(경상북도 제공)

◆만주사변 직후 체포돼 끝내 순국
오랜 형무소 생활로 1937년 순국 한창 활동을 하던 그는 1931년 일본군의 만주침공 직후 일제에 의해 체포당한다. 하얼빈 주재 일본영사관 경찰에 체포당한 그는 모진 고문을 받으며 고생하다 국내로 압송된다. 

평양감옥에서 고생하다 서울 서대문형무소로 옮겨진 그는 육순이 되던 1937년 4월 13일 순국한다. 평소 그를 극진히 존경했던 한용운은 자신이 머물던 성북동 심우장에서 장례를 치른 뒤, 김동삼의 유언대로 화장해 유해를 한강에 뿌렸다. 

김동삼이 유언은 다음과 같았다. ‘나라 없는 몸 무덤은 있어 무엇하느냐. 내 죽거던 시신을 불살라 강물에 띄워라. 혼이라도 바다를 떠돌면서 왜적이 망하고 조국이 광복되는 날을 지켜보리라.’ 

만주 한인사회에서 이념이나 지역적인 차이로 비난받지 않은 지도자가 드물지만 김동삼은 어느 쪽으로부터도 비난받지 않는 큰 인물이었고, 지도자였다./홍석천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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