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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림박물관, 조선시대 금속활자본에 깃든 국가 통치 이념 새롭게 조명

금속활자본 특별전 '움직이는 글자, 조선을 움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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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왕진오기자 |  2014.12.01 10:46:23

▲'자치통감강목(資治通鑑綱目)'. 경자자(庚子字), 22.7×14.9㎝, 1442년.(이미지=호림박물관)

우리나라는 현존 최고의 금속활자본으로 평가받는 '직지(直指)'를 비롯해 세계에서 최초로 금속활자를 제작하여 사용한 나라로 예로부터 인쇄술의 강국이었다.

금속활자 인쇄술은 활자 제작뿐만 아니라 조판기술, 제지기술, 금속활자에 적합한 먹의 제작 등 인쇄에 필요한 기술이 집약되어야 실현 가능한 것이었다.

국가의 통치 이념을 전파하고, 임진왜한 이후 문화를 부흥시키는데 금속활자본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던 조선시대에 초점을 맞추어 조선의 뛰어난 인쇄술과 금속활자본에 깃든 국가 통치 이념에 대해 새롭게 조명하는 전시가 관객들을 눈길을 모은다.

성보문화재단 호림박물관 신사분관에서 마련한 '움직이는 글자, 조선을 움직이다'전은 호림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금속활자로 인쇄한 전적(典籍)과 문방사우(文房四友)를 중심으로 준비한 기획특별전이다.

▲'동국역대사략'., 재주정리자.(이미지=호림박물관)

조선 전기는 왕조 교체 후 사회적 혼란을 서적의 보급을 통해 해결하고자 했다. 조선왕조 개창의 주역이었던 정도전(鄭道傳, 1342∼1398)은 서적포(書籍鋪)를 설치하여 금속활자 인쇄를 제안하였으며, 1403년 태종대 때 실현됐다.

태종은 금속활자를 제작하는 주자소(鑄字所)를 설치하여 조선 최초의 금속활자인 ‘계미자(癸未字)’를 만들었다.

이렇게 시작된 금속활자 인쇄술은 세종대 때 정착되었으며 세종은 인출량과 품질을 대폭 개선한 ‘경자자(庚子字)’를 제작했다.

서체의 아름다움 덕분에 조선시대 전반에 걸쳐 6번이나 다시 만들어진 ‘갑인자(甲寅字)’ 역시 세종대에 처음 제작되었고 이는 금속활자 인쇄술의 완성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진양대군(훗날 세조)의 서체를 바탕으로 제작한 ‘병진자(丙辰字)’는 세계 최초의 납활자로서 역사적 가치가 높다.

세종대 때 정착된 금속활자 기술은 세조대에 이르러 본격적으로 꽃을 피우게 됐다. 세조는 당대 명필가였던 강희안(姜希顔, 1417∼1464)과 정난종(鄭蘭宗, 1433∼1489)의 서체를 바탕으로 각각 ‘을해자(乙亥字)’와 ‘을유자(乙酉字)’를 제작하게 하는 한편 자신이 직접 글자를 쓴 ‘정축자(丁丑字)’도 제작했다.

▲호림박물관 금속활자본 특별전 '움직이는 글자, 조선을 움직이다'전 전시 전경.(이미지=호림박물관)

1592년 임진왜란으로 금속활자와 활판 등의 인쇄도구들로 일본으로 약탈됐다. 이들 금속활자를 복구한 광해군은 주자도감(鑄字都監)을 설치해 금속활자 전성기를 다시 재현했다.

광해군 이후 숙종대에는 인조의 아버지인 원종(元宗, 1580∼1693)이 쓴 글자를 바탕으로 ‘원종자(元宗字)’를 제작했다.

정조대에는 주자소(鑄字所)를 복원하여 ‘정유자(丁酉字)’ · ‘임인자(壬寅字)’ · ‘정리자(整理字)’ 등을 각각 수십만 개의 활자로 제작하였고 규장각을 중심으로 대대적인 출판 사업을 시행했다.

이번 전시는 조선시대 금속활자로 인쇄한 전적(典籍)들을 크게 ‘조선 전기의 금속활자 책으로 기틀을 세우다’와 ‘조선 후기의 금속활자_책으로 문화를 부흥시키다’로 구분했다.

더불어 성리학을 통치 이념으로 삼은 국가의 주축인 사대부들이 책과 함께 애호하였던 문방사우와 학문을 할 때의 자세나 유교적인 이상을 추구하기 위해 사랑방에 펼쳐놓았던 책가도 등의 회화 작품도 함께 선보인다. 전시는 2015년 2월 28일까지.

CNB=왕진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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