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은 역사와 문화의 고장이다. 신라 천년의 향기를 담은 경주나 선비문화의 수도 안동, 가야 문화의 본고장 고령 등 그야말로 발길 닿는 그곳이 역사박물관이다. 그러나 이런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경북이지만 지나온 시간의 절반을 차지했을 선조들의 어머니, 혹은 딸들의 이야기는 단편적인 것에 그치는 것이 사실이다. 이런 시점에서 경상북도가 진행하는 역사 속 경북여성의 삶과 자취를 찾아 떠나는 ‘이야기로 만나는 경북 여행(女行)길’ 탐방은 매우 시의적절한 시도라는 평가다.‘여행(女行)을 찾아가는 여행(旅行)’이라는 주제로 경북 여성들의 삶의 자취를 다시 조명해 본다. <편집자 주>
글싣는 순서
1부. 혹한을 견딘 매화의 향기
1)나라는 품은 독립운동가 남자현
2)하와이 독립운동가 이희경
2부. 여성의 유리천장을 깨다
1)경북 여기자 1호이자 종군 작가 장덕조
2)대구여자경찰서 초대 서장 정복향
3부. 시대를 앞서간 선각자
1) 조선의 마지막 보모에서 육영사업의 시초 최송설당
2) 최초의 민간 여성 비행사 박경원 우리나라 초창기의 여류비행사로 알려진 인물은 권기옥과 박경원이다. 1925년 중국 운남항공학교 1기생으로 졸업한 권기옥이 여성 비행사 1호라면 박경원은 민간 여류비행사 1호라는 수식이 붙는다. 당시 대부분의 여성들에게 요구되던 순종적인 삶을 거부하고 남성의 영역인 비행사를 꿈꾸던 박경원의 삶을 들여다 본다.
◆다섯째 딸 ‘원통’이로 태어나다
박경원은 1897년 대구부 덕산정 63번지에서 5녀 1남 중 5녀로 태어났다. 위로 네 명의 언니를 두고 다섯째 딸로 태어난 박경원은, 섭섭이라는 이름을 가진 넷째 언니에 이어 원통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당시 여성의 사회적 지위는 낮은 시대였지만 애국심에서만큼은 남녀 구분이 없던 시기이기도 했다. 특히 박경원은 당시 대구를 중심으로 벌어지던 국채보상운동을 목격하면서 여성도 남성과 같은 이 땅의 백성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 무렵 대구에 첫 여학교가 세워지자 그녀는 결혼 대신 학교에 가서 공부를 하기로 마음먹는다. 한일합방 이후 대한애국부인회 대구지부가 조선인 여자아이들을 교육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명신여학교(초등교육기관)를 세우고, 박경원은 아버지의 허락을 얻어 드디어 공부를 시작하게 된다.
그 후 박경원은 기독교 평등사상에 매료돼 1915년부터 교회에 다니기 시작한다. 1916년 신명여자고등보통학교(이하 신명여고보)에 입학한 박경원은 신명여고보에 입학하면서 원통이라는 이름을 ‘경원(敬元)’으로 고친다. 하지만 아버지의 죽음으로 학교를 자퇴하게 되고, 박경원은 돈을 벌기 위해 일본으로 갈 결심을 한다.
그때 그녀의 나이 스물한 살이었다. 일본으로 가기 위해 부산에 도착했을 때 비행 쇼를 펼치고 있었다. 난생 처음 비행 쇼를 본 박경원은 자유자재로 비행하는 모습을 보면서 깊은 인상을 받게 된다.
◆여류 비행사를 꿈꾸다
돈을 벌기 위해 간 일본에서의 생활은 비참했다. 바람도 제대로 통하지 않는 공장에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기계로 옷감을 짜는 것이 일과였다. 기숙사 방과 형편없는 식사도 그녀를 괴롭히기는 마찬가지였다. 결국 일본으로 건너간 지 두 해 반 만인 1920년 귀국한다.
그는 일본이 조선인들의 기를 죽이기 위해 날리는 비행기를 보며, 반발심과 함께 자유의 상징으로서의 비행기 조종사에 대한 꿈을 키운다. 궁리 끝에 주경야독의 길을 택한 박경원은 낮에는 간호부과에서 일을 하고 밤에는 일본 비행학교가 간행한 ‘비행기 강의록’을 보며 공부한다.
그러던 1922년 12월, 조선 최초의 비행사인 안창남이 전 조선인들의 대대적인 환영을 받으면서 고국방문 비행에 성공한다. 스물여덟이던 1924년, 그녀는 그동안 모은 돈을 가지고 비행학교에 입학하기 위해 다시 일본행을 선택한다.
하지만 일본 비행학교 입학비가 턱없이 모자랐고, 차선택으로 자동차부에 들어가 엔진과 기체의 구조 등 비행기에 도움이 될 만한 공부를 할 수밖에 없었다. 박경원이 비용 마련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을 때 구원의 손길을 내밀어준 것은 ‘동아일보’였다.
세 차례나 박경원을 지면에 소개해 비용을 마련할 수 있도록 도왔다. 기사가 나온 직후 대한제국 마지막 황태자인 영친왕 이은이 사람을 보내 박경원에게 2천 엔이라는 큰돈을 전달해 비로소 일본 비행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다.
1926년 12월 교관과의 동승비행 172회로 11시간 9분의 비행시간을 축적한 박경원은 처음으로 단독비행을 허락받았다. 그리고 단독비행을 한 지 한달 반이 지난 1927년 1월 마침내 박경원은 3등 비행사시험에 합격했다. 단독비행 194회로 비행시간 14시간 35분, 전체 비행시간 25시간44분의 기록으로 오랜 시간 타국에서 고생하며 간절하게 원했던 비행사가 될 수 있었다.
박경원은 일본에서 81번째, 여성계에서는 일본 여성에 이어 3번째로 2등 비행사가 됐다. 당시만해도 비행기 조종사가 되면 1922년의 안창남이 그랬던 것처럼 고향방문 비행을 하는 것이 관례였다. 마침내 비행사가 된 박경원은 꿈에 그리던 고향방문 비행을 계획하며 조국을 방문한다.
그러나 조선의 자랑스러운 여류 비행사가 되기는 커녕 일본에 영혼을 팔아버린 친일파이자 노처녀 취급을 받은 박경원은 실망만 한 채 다시 일본으로 돌아간다.
1931년 만주를 손에 넣은 일본은 ‘일만친선(日滿親善)’과 ‘황군위문(皇軍慰問)’을 목적으로 만주로의 비행을 결정하고, 적임자로 박경원을 선정한다.
일본의 대륙침략 전쟁을 앞두고 조선반도의 병참기지로서의 중요성이 높아지는 가운데 조선여성인 박경원이 ‘일만친선’에 나서게 되면 일본과 조선, 만주의 내선일체에 크게 기여하게 될 것이라는 선전효과 때문이었다. 식민지 조선의 딸 박경원이 일본제국주의 침략의 교두보가 돼 만주로의 비행을 맡게 된 것이다.
▲박경원의 사고 비행기(경상북도 제공)
◆마지막 비행을 하다
1933년 8월 7일, 박경원이 일본의 하네다 공항을 출발해서 고국을 경유한 다음 만주의 신경까지 날아가게 될 운명의 날이 밝았다. 그 시간 조선에서는 폭풍우가 몰아쳐 수십 명의 사망자와 수백 채의 가옥피해가 발생하고 있었다. 궂은 날씨에 비행은 연기돼야 했다.
그러나 ‘일만친선 황국위문’ 비행의 선전효과와 이를 격려하기 위해 비행장에 모여든 수많은 인파들, 고국방문 비행에 대한 박경원의 열망이 어우러지면서 그녀는 돌아올 수 없는 마지막 비행을 떠나고 만다. 박경원이 자신의 비행기인 ‘푸른 제비’에 올라탔다.
‘푸른 제비’는 자신을 태운 비행기가 조국에 길한 소식을 전해주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그녀가 지어준 이름이었다. 약속한 시간을 35분이나 넘긴 뒤 ‘푸른 제비’는 서서히 하늘로 비상하지만 잠시 뒤 남쪽에서 폭음을 내면서 행방불명됐다.
‘푸른 제비’는 다음날 아침 이즈반도의 쿠로다케 산꼭대기 근처에서 기체가 두 동강난 채 발견되었다. 박경원은 조종석에 핸들을 쥔 채 죽어있었고, 피로 물든 손목시계는 11시 25분 30초를 가리킨 채 멈추어 있었다. 여류 비행사가 되기까지 겪어야 했던 그녀의 지난 삶을 생각할 때 고작 서른일곱, 죽기에는 너무 젊고 아까운 나이였다.
‘최초’라는 타이틀을 달고도 사후 70년이 넘도록 주목받지 못했던 박경원이 ‘우리나라 최초의 민간 여류 비행사’라는 수식어를 단채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불과 몇 년 전이다. 그녀의 짧은 생애를 담은 '청연'이라는 영화가 제작되던 과정에서였다. 그러나 ‘최초의 민간 여류 비행사’라는 찬사를 제대로 받기도 전에 일본에 부역했다는 주장들이 제기되면서 또다시 관심에서 멀어지고 있다./홍석천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