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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황태자 보모에서 첫 육영사업가로

<경북 여성로드를 만들다> 5. 최솔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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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홍석천기자 |  2014.11.17 11:36:50

경북은 역사와 문화의 고장이다. 신라 천년의 향기를 담은 경주나 선비문화의 수도 안동, 가야 문화의 본고장 고령 등 그야말로 발길 닿는 그곳이 역사박물관이다. 그러나 이런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경북이지만 지나온 시간의 절반을 차지했을 선조들의 어머니, 혹은 딸들의 이야기는 단편적인 것에 그치는 것이 사실이다. 이런 시점에서 경상북도가 진행하는 역사 속 경북여성의 삶과 자취를 찾아 떠나는 ‘이야기로 만나는 경북 여행(女行)길’ 탐방은 매우 시의적절한 시도라는 평가다.‘여행(女行)을 찾아가는 여행(旅行)’이라는 주제로 경북 여성들의 삶의 자취를 다시 조명해 본다. <편집자 주> 

글싣는 순서 
1부. 혹한을 견딘 매화의 향기 
1)나라는 품은 독립운동가 남자현 
2)하와이 독립운동가 이희경 

2부. 여성의 유리천장을 깨다 
1)경북 여기자 1호이자 종군 작가 장덕조 
2)대구여자경찰서 초대 서장 정복향 

3부. 시대를 앞서간 선각자 
1) 조선의 마지막 보모에서 육영사업의 시초 최솔성당 
2) 최초의 민간 여성 비행사 박경원 

조선의 마지막 황태자의 보모였던 최송설당은 우리나라 육영사업의 어머니이기도 하다. 경북 김천에서 김천고등보통학교를 설립한 경북 여성 육영 사업가 1호인 최송설당은 어떤 사람이었을까. 
1855년 김천시 문당동에서 3년 중 장녀로 태어난 최송설당(崔松雪堂)의 생애는 크게 세 시기로 나뉜다. 첫 시기는 고향인 김천에서 주로 머문 시기로 1894년 상경하기 전까지 약 40년 간이다. 

두 번째 시기는 상경 이후 1930년까지 36년간이다. 영친왕으 보모로 지내던 이 시기에 송설당은 서울에 정착해서 김천을 오가며 살았다. 세 번째 시기는 경성에서 고향 김천으로 낙향해 여생을 마무리한 약 10년이다. 

이 시기가 한국 육영사업의 한 획을 그은 시기이기도 하다. 송설당은 1907년 헤이그 밀사사건이 터지고, 그해 9월 17일 고종 퇴위와 순종 등극 그리고 영친왕의 일본 볼모행 등으로 11년에 걸친 영친왕 보모 일도 끝났다. 

◆환갑 넘어 육영사업 본격화 
이즈음 최송설당은 사회사업에 본격적인 관심을 갖는다. 송설당이 실천한 첫 나눔기사는 1908년 54세때 대한매일신보에 등장한다. 의연금 기탁에 이어 벼 50섬을 희사, 경성부인회에 거액 기부, 김천공립보통학교․금릉유치원․금릉학원 유지비를 기탁 등이다. 

최송설당의 육영사업이 시작된 시기는 1930년 6월 29일 김천으로 내려와서 부터이다. 깨끗한 돈으로 육영사업에 투자하라고 당부한 어머니의 유언도 크게 작용한 것으로 짐작된다. 

나라를 되찾으려면 무엇보다 인재를 키워야한다고 판단을 한 송설당은 김천에 인문계 고보를 짓기로 결정했다. 고향에 인문계고를 짓기 위해 1930년 신년벽두에 김천으로 내려오는 송설당 앞에는 취주악대를 앞세운 환영인파가 인산인해를 이루었다고 한다. 송설당이 김천고보를 지을 땅 산록에 자리잡은 정걸재로 향하는 길에도 환영객으로 넘쳐났다. 

▲최송설당 만년에 기거했던 정걸재 전경.(경상북도 제공)

◆백미 1만섬 쾌척 
김천고를 설립하기 위해 최송설당이 기부한 재산은 다음과 같다. 김천, 김해, 대전의 20만2100원 상당의 토지와 은행예금 10만원 등 모두 30만2천원이었다. 당시 쌀 한가마가 29.77원이었으니 쌀 만가마 이상을 살 수 있는 엄청난 금액이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일제가 설립을 허가하지 않았다. 상고나 농고를 만들라는 것이다.송설당은 ‘인문계 고보 설립허가를 내주지 않으면 기부를 취소하겠다’고 나서는 한편 해결책을 찾기 시작했다. 결국 총독부는 1930년 10월말, 김천고보 설립을 허가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그런데 개교가 예정보다 일년 늦어지는 바람에 설립자금 충당에 차질이 빚어졌다. 원래 송설당이 기부하기로 했던 재산이 30만2000원에 1930년도 수익예상금이 2만6000원이었다. 그런데 세계 대공황의 여파로 쌀값이 폭락하면서 1만6000원의 부족분이 발생한 것이다. 

총독부 학무국은 기다렸다는 듯이 제동을 걸었지만 최송설당은 마지막 남은 처소인 무교동 55간리 ‘송설당’집을 내놓는다. 1931년 2월 5일, 재단법인 송설당교육재단이 인가를 받았고, 3월17일에 김천고보 설립이 총독부 학무국에 의해 정식 승인(총독부 고시 제145호)됐다. 

▲김천고등학교에 세워져 있는 최송설당 동상.(경상북도 제공)

◆최고 선생에 최고 인재 모아 
1931년 3월27일과 28일 첫 입학시험을 치뤘다. 교사도 전국 최고를 모셨다. 서울 월급의 배를 주면서 최우수 교사로 진용을 갖췄다. 2대 정열모 교장은 1942년 10월 20일 조선어학회사건으로 투옥돼 옥고를 치룰 정도로 치열한 민족정신을 지닌 인물이었다. 민족을 구할 인재 양성에 무게중심을 둔 김천고보의 개교는 송설당의 성공작이자 나라를 위한 든든한 투자였다. 

최송설당은 마지막 남은 한 점 재산까지 다 모아 특별교실(과학관) 건립비용으로 냈다. 무일푼 송설당이 생활비를 아껴 마련한 돈이었다. 그렇게 모든 것을 기부한 송설당은 1939년 6월 16일 오전 10시 40분 재단이사를 비롯한 간부직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85세를 일기로 조용히 눈을 감았다. 

김천고 학생과 동창생 3백여 명이 조가를 울리는 악대 뒤를 따랐고, 운구행렬이 끝없이 이어졌다. 운구행렬은 발인 현장인 김천고보에서 장례식장인 공설운동장(현 모암초교)까지 약 5km나 이어졌다. 한 점 남김없이 모든 것을 2세 교육에 희사한 육영사업가 최송설당의 영생을 기원했다. 송설당의 묘소는 학교 뒷산에 있다./홍석천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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