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북도는 다른 지역에 비해 비교적 여성인물과 관련된 기록이 풍부한 편이다. 타 지역과 차별화되는 여왕, 여신이 존재할 뿐만 아니라 반가 여성, 평민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계층 여성들의 삶이 전해지고 있다.
특히 신라시대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경북의 여성인물들은 여성에게 녹록치 않았던 시대적 제약 속에서도 역사라는 거대한 수레바퀴의 한 축을 담당하며 당당히 제 몫을 다해왔다.
당시 여성리더로서 뛰어난 리더십을 발휘하고 주어진 책임을 다하고자 했던 경북의 여성인물들이 어떻게 삶을 선택하고 일구어 나갔는지를 되새겨보면서 현재에 적용할 수 있다.
경북도와 경북여성정책개발원에서 발간한 ‘여행(女行)을 여행(旅行)하다’를 통해 경북 여성인물의 발자취와 흔적을 따라가며 역사 속의 그들을 만나본다. <편집자 주>
◆요리 백과사전 ‘음식디미방’을 쓰다
장계향(張桂香, 1598~1680)은 성인(聖人)의 삶을 지향하며 실천한 조선시대의 깨달은 여인이었다. 10세 전후에 지은 ‘성인음(聖人吟)’이 이를 잘 보여준다.
‘내가 성인이 살았던 때에 나지 않았으니 / 성인의 얼굴을 볼 수가 없겠네 / 그러나 성인의 말씀을 들을 수가 있으니 / 성인의 마음도 볼 수가 있겠네’
자신이 살았던 당대에 ‘여중군자(女中君子)’ 또는 ‘여중학자(女中學者)’로 불린 장계향은 1598년 안동시 서후면 금계리(검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퇴계의 학손(學孫)인 경당 장흥효이고, 어머니는 안동 권씨이다.
둘 사이에서 무남독녀로 세상에 나온 장계향은 흔히 ‘정부인(貞夫人) 안동 장씨’로 불린다. 셋째 아들 갈암 이현일이 이조참판과 이조판서 등을 역임해 조선조 외명부 봉작법에 따라 추증(追贈)된 호칭이다.
장계향은 정부인이기도 하지만 83년에 걸친 전 생애를 통해 비할 바 없는 덕성을 보여 조선 중기 당대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거룩한 여성으로 존경을 받아왔다.
19세에 석계 이시명의 계실로 출가해서는 현모양처로서 시부모와 남편을 지극정성으로 공경하고, 전처소생 1남 1녀와 자신이 낳은 6남 2녀를 현자로 양육해 위대한 어머니이자 교육자로 칭해졌다.
타고난 자질이 풍부해 시·서·화에 능했고, 재령 이씨 영해파 문중의 큰살림을 맡아 살면서 왜란과 호란으로 피폐해진 민초들을 위해 집안의 곡식을 풀고 도토리죽을 쑤면서까지 널리 구휼한 사회적실천가의 모습을 보였다.
또 홀로된 친정아버지를 시집간 이후에도 보살피고 재혼을 시켜드린 후 자신보다 젊은 새어머니와 동생들을 다양한 방식으로 지지하며 바로 서게 했다.
아울러 일흔이 넘은 나이에 ‘음식디미방’이라는 세계최초의 한글 조리서를 썼으며, 이 땅에서 가장 아름다운 마을이라 불리고 있는 영양군 두들마을을 개척한 문화창조자이기도 했다.
이 같은 장계향의 전인적(全人的) 삶이 여중군자의 이름으로 총괄되고 있는 것이다. 군자는 한두 가지 덕성이 아닌 전인적 덕성을 갖춘 사람이기 때문이다.
성리학적 전통을 존중하면서도 인간의 도리를 외면하지 않았던 장계향은 이처럼 이치에 따라 일을 처리했기에 ‘깨달은 조선 여인’으로 불리며 오늘날 새롭게 주목받고 있다.
◆장계향의 유적 및 탐방지
경당고택(안동시 서후면 성곡리 264)은 경당 장흥효의 종택으로 장계향이 태어난 곳이다. 원래 광풍정(안동시 서후면 금계리 774) 옆에 있었는데 1946년 지금의 자리로 옮겼다고 한다. 고택과 종택을 두루 체험할 수 있는 곳이며, 서후면사무소에서 봉정사 쪽으로 조금 더 들어가면 된다.
중요민속자료 제168호인 충효당(영덕군 창수면 인량리 465)은 재령이씨 입향조인 이애가 지은 곳으로, 장계향이 분가하기 전까지 살던 곳이다. 충효당 대문 앞에는 아름드리 은행나무가 오롯이 서있는데, 장계향은 시아버지가 심은 이 은행나무 아래에 솥을 걸어 놓고 몰려드는 기민들에게 도토리죽을 쑤어 구휼했다고 한다.
자운정(영덕군 창수면 인량리)은 장계향 내외가 처음 분가해 살림을 낸 집터이다, 영남학파의 거두이며 이조판서를 역임한 갈암 이현일이 태어난 곳이기도 하다. 후세에 이곳을 기념하기 위해 ‘자운정’이라 명명하고 태실을 지어 보존하고 있다.
경상북도 민속자료 제91호인 석계고택은 영양군 두들마을에 있다. 장계향이 남편인 석계 이시명과 함께 1640년 이후부터 거처한 곳이자 임종을 맞이한 곳이다. 이시명은 대명절의를 지킨다는 뜻에서 병자호란 이후 세상과의 인연을 끊고 영양으로 와서 집을 짓고 이곳엣 학문에 전념했다.
두들마을 내에는 장계향의 학문과 예술, 자녀교육에 대한 전범(典範)을 기리기 위해 1989년 건립한 유적비가 있다. 유적비의 배면에는 장계향의 대표적인 한시 ‘소소음’이 각인돼 있다.
또 장계향이 남긴 유적과 자취를 기리고 음식체험 및 예절교육장으로 이용하기 위해 건립된 정부인안동장씨기념관과 예절관도 있다. 2006년부터 ‘음식디미방’에 쓰인 조리법대로 전통음식을 오늘에 재현하는 작업이 진행 중이다. (경북=김희정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