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북도는 다른 지역에 비해 비교적 여성인물과 관련된 기록이 풍부한 편이다. 타 지역과 차별화되는 여왕, 여신이 존재할 뿐만 아니라 반가 여성, 평민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계층 여성들의 삶이 전해지고 있다.
특히 신라시대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경북의 여성인물들은 여성에게 녹록치 않았던 시대적 제약 속에서도 역사라는 거대한 수레바퀴의 한 축을 담당하며 당당히 제 몫을 다해왔다.
당시 여성리더로서 뛰어난 리더십을 발휘하고 주어진 책임을 다하고자 했던 경북의 여성인물들이 어떻게 삶을 선택하고 일구어 나갔는지를 되새겨보면서 현재에 적용할 수 있다.
경북도와 경북여성정책개발원에서 발간한 ‘여행(女行)을 여행(旅行)하다’를 통해 경북 여성인물의 발자취와 흔적을 따라가며 역사 속의 그들을 만나본다. <편집자 주>
◆문희의 예사롭지 않은 판단력과 야망
신라통일의 명장 김유신에게는 아름답고 다소곳하지만 소극적인 성격의 보희(아명은 아해)와 당차고 적극적인 성격의 문희(아명은 아지)라는 여동생이 둘 있었다.
이 두 사람의 상반된 성격은 그들의 운명을 바꿔놓았다. 삼국유사(三國遺事)에는 문명왕후와 태종무열왕과의 결혼에 관한 다음과 같은 설화가 전해진다.
어느 날 문희의 언니 보희가 서악(경주시내 서쪽에 있는 선도산)에 올라 오줌을 누었더니 서라벌이 다 잠기는 꿈을 꿨다. 아침에 일어나 생각하니 보희는 망측스럽기 이를 데 없었다.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동생에게만 살짝 꿈 이야기를 했다.
꿈 이야기를 듣자 대뜸 문희는 그 꿈을 사겠다고 했다. 더구나 꿈 값으로 비단치마까지 주겠다고 했다. 그저 가져가기만 해도 고마울 판이었던 보희는 얼른 꿈을 팔았다.
문희에게는 보희와 다른 몇 가지 왕비로서의 자질이 있었다. 그 꿈이 예사로운 것이 아니라는 판단력, 그 때문에 반드시 가져야겠다는 야망, 대신 반드시 값을 쳐서 받아야만 제 것이 될 것이라는 철저한 계산의 능력이 있었다.
꿈의 효능은 빨리도 나타났다. 열흘 뒤, 김유신은 김춘추를 불러 자기 집 앞에서 공차기를 하다가 일부러 김춘추의 옷고름을 찢었다. 김유신은 보희에게 김춘추의 옷고름을 달아드리라고 했으나 보희는 한사코 사양했다. 그러자 김유신은 둘째누이인 문희에게 부탁했다.
문희는 신라에서 가장 잘생긴 남자인 김춘추 앞에서 떨리는 손으로 옷고름을 달게 됐다. 이때 김춘추는 문희의 고운 자태에 반하게 됐고, 그 뒤부터 김춘추는 김유신의 집에 자주 드나들게 됐다. 얼마 지나지 않아 문희는 김춘추의 아기를 갖게 됐다.
이 사실을 안 김유신은 짐짓 문희를 크게 꾸짖고 누이동생의 잉태 사실과 불에 태워죽일 것이라는 사실을 서라벌에 퍼뜨렸다. 그런 다음 선덕여왕이 남산으로 행차하는 날을 택해 뜰 안에 나무단을 높이 쌓아놓고 불을 지펴 연기를 많이 나게 했다.
선덕여왕이 그 까닭을 알게 되자 문희를 구하라고 명한다. 김춘추는 왕명을 받들어 득달같이 달려가 문희를 구했고, 그들은 정식으로 혼례를 치렀다.
그 뒤 20여년이 흘러 김춘추가 왕이 되자 문희는 문명왕후(文明王后)가 됐다. 삼국유사의 집필자 일연은 이것이 꿈의 효력이라고 말했다.
문희와 김춘추와의 사이에는 태자 법민(문무왕), 각간 인문, 각간 문왕, 각간 노차, 각간 지경, 각간 개원 등의 형제가 있었다.
문희의 언니인 보희는 오래 동안 홀로 살다가 김춘추의 후비로 들어가 서자인 개지문 급간 등을 낳았다고 한다.
◆문명왕후의 유적 및 탐방지
재매정(사적 제246호)은 신라의 병장 김유신과 그의 누이들(문희, 보희)이 살았던 집터라고 전해지는 곳에 남아있는 우물이다. 월성에서 서쪽으로 약 400m 거리에 남천을 바로 옆에 두고 위치해있다.
김유신이 오랜 기간을 전쟁터에서 보내고 돌아오다가 쉴 사이도 없이 출전하는 길에 자신의 집 앞을 지나게 되자 병사를 시켜 물을 떠오게 해 마신 다음 “우리집 물맛은 옛날 그대로구나!”하며 떠났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무열왕릉(사적 제20호)은 문명왕후의 남편이자, 신라 제29대 태종무열왕 김춘추의 무덤이다. 경주 북서쪽에 있는 선도산에서 남쪽으로 뻗은 구릉의 가장 아래쪽에 위치해있다.
무열왕은 진덕여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최초의 진골 출신 왕으로, 당과 연합해 백제를 정복하고 삼국통일의 기초를 마련했다.
세상을 떠나자 태종무열이라는 시호를 내리고 영경사 북쪽에 장사지냈다고 한다. 무덤 앞 동북쪽에는 국보 제25호인 무열왕릉비가 있다. (경북=김희정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