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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덕·진성, 신라의 두 여왕을 만나다

[경북의 여성인물]③ 외교의 달인, 책임정치의 실현 돋보인 여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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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김희정기자 |  2014.06.24 16:45:22

경상북도는 다른 지역에 비해 비교적 여성인물과 관련된 기록이 풍부한 편이다. 타 지역과 차별화되는 여왕, 여신이 존재할 뿐만 아니라 반가 여성, 평민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계층 여성들의 삶이 전해지고 있다.

특히 신라시대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경북의 여성인물들은 여성에게 녹록치 않았던 시대적 제약 속에서도 역사라는 거대한 수레바퀴의 한 축을 담당하며 당당히 제 몫을 다해왔다.

당시 여성리더로서 뛰어난 리더십을 발휘하고 주어진 책임을 다하고자 했던 경북의 여성인물들이 어떻게 삶을 선택하고 일구어 나갔는지를 되새겨보면서 현재에 적용할 수 있다.

경북도와 경북여성정책개발원에서 발간한 ‘여행(女行)을 여행(旅行)하다’를 통해 경북 여성인물의 발자취와 흔적을 따라가며 역사 속의 그들을 만나본다. <편집자 주>

▲사적 제24호인 진덕여왕릉.(사진/김락현 기자)

◆뛰어난 외교술, 진덕여왕

신라 28대 진덕여왕(眞德女王, 재위 647~654)은 선덕여왕의 뒤를 이은 여왕이다. 선덕여왕의 아버지인 진평왕의 동생 국반 갈문왕의 딸로 선덕여왕과는 사촌지간인 셈이다.

진덕여왕은 즉위하자마자 선덕여왕을 몰아내려 쿠데타를 일으킨 비담의 무리들을 평정해 나라 안살림을 챙겼다. 정월 17일에 비담과 그 일당 30여명을 모두 죽이고, 2월에 이찬 알천을 상대등으로 승진시키면서 권력을 장악했다.

여왕의 즉위 후 국내외 정세는 숨 가쁘게 돌아가고 있었다. 즉위 2년 정월에 당나라에 사신을 파견해 조공을 보냈다. 당시 백제의 공습은 여전했으며, 김유신의 연승도 이어졌다. 그때 여왕은 김춘추 등 유능한 인재들을 사신단으로 조직해 당으로 보냈다.

이후 여왕은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지속적으로 당과 교류했으며, 여왕이 세상을 떠나자 당 고종은 크게 애도하며 그 예를 갖춰 주문했다고 한다.

이러한 여왕의 통치 내용에 대해서는 ‘삼국유사’와 ‘삼국사기’에 잘 나타나있다. 선덕여왕과 진덕여왕의 통치스타일은 부분적으로는 닮았으나 큰 차이를 보이는 부분도 있었다. 선덕여왕이 불교의 힘을 빌려 왕권을 강화시키고 호국에 주력한 반면, 진덕여왕은 불교에 의지하기보다 외교정책과 관부의 개혁을 통해 왕권을 강화했다.

진덕여왕은 외교정책의 달인이었다. 당의 힘을 빌 것이면 확실히 하자며 당을 본떠 복제도 개편했다. 김춘추의 아들인 법민과 인문을 연이어 보내고 불러들이며 당 고종의 분위기를 읽고 친교를 돈독히 하는 외교 전략을 폈다.

◆책임정치의 원조, 진성여왕선덕여왕과 진성여왕 이후 250여년 뒤, 또 한 명의 여성이 왕위에 오르는데, 바로 51대 진성여왕(眞聖女王, 887~897)이다. 아버지는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이야기로 유명한 경문왕이고, 어머니는 헌안왕의 장녀로 뒤에 문의왕후에 봉해진 영화부인 김씨이다. 49대 헌강왕과 50대 정강왕의 여동생이었다.

삼국통일 당대에도 그러했듯이 통일신라 후기까지 신라인들은 여왕에 대한 부정적 시각을 갖지 않았다. 단지 신라 멸망 후 고려인의 입장에서 쓴 역사서인 ‘삼국사기’에는 여왕, 특히 진성여왕에 대한 부정적 평가를 노골적으로 하고 있다. 여성에게 비교적 후했던 ‘삼국유사’도 진성여왕에게는 부정적 평가를 했을 정도다.

진성여왕이 성적으로 문란해 국정을 돌보지 않았으며, 그 때문에 신라의 멸망을 초래했다는 역사적 시각이 있다. 각간 위홍과의 사랑을 삼촌과 질녀와의 근친상간적 패륜으로 매도하면서 진성여왕의 비행을 강조했다. 그러나 이것은 신라의 왕실과 지배층 사회의 혼인풍습을 제대로 모르는 이들의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신라의 왕실을 성골과 진골이라는 골품을 유지하기 위한 근친혼이 일반적이었다. 어머니와 아들, 같은 어머니 밑에서 자란 형제자매가 아니면 친인척 누구와도 혼인이 가능했다. 예컨대 23대 법흥왕의 동생 입종갈문왕은 법흥왕의 딸, 즉 자신의 조카인 지소부인과 결혼해서 진흥왕을 낳았다.

▲경상북도 기념물 제46호인 상서장.(사진/김락현 기자)

또 김유신은 여동생인 문희와 김춘추 사이에서 난 딸과 혼인하기도 했다. 김춘추는 김유신의 처남이면서 장인이기도 했다. 신라는 이처럼 근친혼이 흔했다. 따라서 진성여왕과 각간 위홍과의 사랑도 당대 골품제의 결혼풍속에서 봤을 때 비난받을 일이 아니라는 의견이다.

진성여왕의 진면목을 알려면 그가 왕으로 즉위한 연유를 알 필요가 있다. 헌강왕이 매우 어린 아들 요(후의 효공왕)을 두고 죽자 그의 동생이 즉위해 정강왕이 됐다. 그러나 정강왕도 즉위 1년 만에 갑자기 죽게 된다. 조카는 여전히 어렸다. 여왕은 어린 조카가 왕위를 받을 수 있을 만큼 자랄 때까지만 왕의 자리에 있기로 했다.

여왕 재위 연간에는 국내외 정세는 불안하기 짝이 없었고 민중들은 동요했으며 도둑도 들끓었다. 스스로 왕이라 일컬으며 국호를 후백제라 한 견훤이 호시탐탐 서라벌을 넘보고 있었다. 여왕 즉위 8년 2월에 최치원이 건의한 시무십여조(時務十餘條) 정책을 받아들이는 등 나라의 위급을 바로잡으려 애를 쓰고 있었다.

하지만 견훤의 도발과 나라 안팎 도적들로 민심이 심상치 않음을 느끼자 여왕은 헌강왕의 서자 요를 태자로 삼는 결단을 한다. 그리고 2년 뒤 여왕은 즉위 11년 ‘최근 들어 백성들은 곤궁하고 도적인 봉기하니 이는 나의 부덕한 탓이다. 나는 어진 사람에게 양위하고 왕의 자리를 피하려고 결심하였다’며 군신들에게 왕의 자리를 넘기려는 뜻을 밝힌다.

곧이어 당나라에 사신을 파견, 조카 요의 인물됨을 칭송하면서 왕의 재질이 충분함을 알린다. 10여 년 동안 왕좌를 차지하고 있으면 권력에 연연해 초심을 잃기 쉬운 것이 인지상정이지만 진성여왕은 그렇지 않았다.

진성여왕은 즉위 당시 백성과의 약속을 지키고 스스럼없이 권좌를 물러서며 책임을 다한 흔치 않은 왕이었다. 당대 최고의 지식인인 최치원이 ‘왕의 은혜가 바다같이 넘쳤다’고 진성여왕을 성군으로 묘사했던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두 여왕의 유적 및 탐방지

진덕여왕릉(현곡면 오류리 산48)은 경주 시내에서 동북쪽으로 멀리 떨어진 현곡 구릉의 중간에 자리하고 있다. 무덤은 흙으로 덮은 둥근 모양이고, 봉분의 아래에는 둘레돌을 둘렀다.

둘레돌 사이에는 봉분을 보호하는 기둥역할을 하는 넓은 돌을 놓고 12지신상(十二支神像)을 돋을새김 했다. 신라왕릉의 12지신상 조각 중 가장 늦은 시기에 속하는 것이며 무덤의 형식도 이후에 나타난 것이어서 이 무덤이 진덕여왕 능이 아니라는 주장도 있다.

첨성대 뒤편에 있는 상서장(인왕동 274)은 신라 말의 학자 최치원이 나랏일을 걱정해 시무십여조를 진성여왕에게 올렸던 곳이다. 상서장에는 최치원의 영정각이 있고, 매년 4월에 제사를 지내고 있다. 경주 톨게이트에서 포항, 보문단지로 향하는 국도를 따라 가다보면 경주박물관 직전 건녀편 오른쪽 언덕에 있다. (경북=김희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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