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부·아들·조카…3촌(村)체제 재정비 가능성
전통사업·신사업 나눠 3세경영 빅픽처 구상
‘창의·도전’ 녹십자정신으로 디지털헬스 속도
허일섭 GC녹십자그룹 회장의 내달 임기 만료를 앞두고 GC녹십자 내에 조용한 변화가 감지되고 있다. 54년생인 허 회장이 올해 일흔을 맞은데다, ‘인류의 건강한 삶에 이바지 한다’는 창업정신에 뿌리를 둔 ESG 경영혁신이 본궤도에 올랐기 때문. 허 회장의 연임 여부와 상관없이 조만간 아들·조카들이 전면에 나서는 3세 경영체제의 윤곽이 나올 것이라는 얘기도 나온다. (CNB뉴스=도기천 기자)
반세기 넘게 ‘희귀질환과의 싸움’을 벌여온 GC녹십자그룹(이하 녹십자) 일가가 추구하는 기업이념은 ‘인간존중’이다. 이는 환자중심의 신약개발, 전 임직원이 참여하는 사회공헌활동, 투명한 지배구조 등 오늘날 ESG경영의 근간이 되고 있다. ESG는 환경(Environment)·사회(Social)·지배구조(Governance)의 머리글자를 딴 단어로, 기업활동에 친환경, 사회적 책임 경영, 지배구조 개선을 도입해 지속가능한 투명경영을 하자는 글로벌 캠페인이다.
녹십자는 한국사회에 ‘기업의 사회적 책임(CSR·Corporate Social Responsibility)’이라는 개념이 낯설던 시절부터 ‘가치 경영’을 실천해왔다.
허일섭 회장의 부친인 고 허채경 회장은 1967년 수도미생물약품판매(주)를 설립해 제약업에 첫발을 디뎠다. ‘인간의 고귀한 생명을 다루는 제약산업이 가장 중요한 사회적 존재’라는 신념 하에, 당시만해도 가난과 질병이 창궐하던 사회현실을 극복하고자 신약개발에 사활을 걸었다.
이러한 창업정신은 허채경 회장의 아들인 허영섭(허일섭 회장의 형·2009년 작고)에게 고스란히 계승됐다. 허영섭 회장은 선대의 정신을 이어받아 국내 최초의 순수 민간 연구재단인 녹십자연구소(현 목암생명과학연구소)를 설립, 한국제약사에 빛날 여러 기념비적 성과를 거둔다. 1987년 국내 최초 에이즈 진단시약 생산을 비롯, 1988년 세계 최초의 유행성출혈열백신, 1993년 수두백신, 2008년 유전자재조합 혈우병치료제 등을 잇달아 내놨다. 2009년 전 세계에서 신종인플루엔자 바이러스(신종플루)가 유행할 당시에는 세계 여덟 번째로 백신 개발에 성공했다.
허영섭 회장이 세상을 등지자, 동생인 허일섭 회장이 경영을 물려받아 오늘에 이르고 있다. 또 허영섭 회장의 차남인 허은철(허일섭 회장의 조카) 사장이 GC녹십자 대표를 맡아 가훈을 잇고 있다.
특히 허일섭 회장은 작년부터 ESG의 5대 핵심영역을 ▲헬스케어 고객가치 창출 ▲사회적 책임 및 인적자원 관리 ▲환경경영 ▲지속가능 생태계 구축 ▲윤리경영으로 구체화해 ‘창의도전·인간존중’이라는 창업이념 실현에 온 힘을 쏟고 있다.
3세경영 시대 눈앞에…‘소리 없는 변화’ 예고
그런데 최근 녹십자 오너가(家)에 조용한 변화가 감지되고 있다. 2020년 12월 그룹 회장직에 오른 허일섭 회장의 임기가 오늘 3월에 종료되는 것과 맞물려, 허 회장이 다소 복잡해 보이는 경영승계 구도에 대해 어떤 식으로든 교통정리에 나설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고 있는 것.
물론 허 회장이 연임할 가능성이 높지만, 연임을 계기로 제2도약을 선언하면서 본인 직계와 조카들이 전통사업과 성장사업으로 나눠 본격적인 3세 경영시대에 나설 가능성이 점쳐진다.
일단 경영승계에 필요한 지분의 열쇠는 허 회장이 쥐고 있다.
금융감독원 전자공시시스템에 따르면, 작년 9월말 기준 녹십자그룹의 지주사인 GC녹십자홀딩스 최대주주는 12.16%을 보유한 허 회장이다. 2대, 3대주주는 고 허영섭 선대회장의 삼남인 허용준 녹십자홀딩스 대표이사(2.91%)와 차남인 허은철 대표(2.60%)다. 허 회장의 지분이 두 형제의 지분율을 합친 것보다 두 배 이상 많다.
여기에다 허 회장의 아들 허진성 녹십자홀딩스 전략기획부문 성장전략실장이 경영수업을 받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허 실장은 2014년 녹십자에 입사해 현장에서부터 실무경험을 쌓아왔다.
허 회장과 두 아들은 꾸준히 장내 매수를 통해 지분을 늘려오고 있다. 허 회장의 녹십자홀딩스 지분은 2017년 9월말 기준 11.77%에서 5년 만에 12.16%으로 0.39%p 늘었고, 같은 기간 허 실장의 지분은 0.52%에서 0.69%로, 허 회장의 삼남인 진훈씨의 지분은 0.47%에서 0.64%로 커졌다.
하지만 허 회장 직계가족이 조카들의 지분에 비해 절대적으로 우세하다고 볼 순 없다.
녹십자그룹이 운영하고 있는 목암생명과학연구소(8.73%), 목암과학장학재단(2.10%), 미래나눔재단(4.38%)의 지분이 허은철·허용준 형제에게 유리한 지분으로 평가되기 때문. 허영섭 선대 회장이 타계하기 전 녹십자홀딩스와 녹십자 주식 각각 30만주와 20만주를 연구소와 재단에 기부했다는 점에서다.
여기에다 허은철 대표가 취임후 연구개발(R&D) 분야에 꾸준히 투자해 국내외에서 큰 성과를 거뒀다는 점도 주주들의 표심을 잡기에 유리한 대목이다. 허 대표는 취임 첫해인 2015년 처음으로 매출 1조원을 돌파한 뒤 매년 기록을 경신해 왔다. 사업보고서에 따르면 녹십자 매출액은 △2015년 1조478억원 △2016년 1조1979억원 △2017년 1조2879억원 △2018년 1조3198억원 △2019년 1조3571억원 △2020년 1조5041억원 △2021년 1조5378억원이다.
따라서 허 회장이 장남인 허 실장에게 지분을 승계할 가능성을 논하긴 이르다는 평가가 나온다. 허 실장이 사촌형들(허은철·허용준) 보다 10살 가량 어리다는 점 또한 이같은 전망에 무게를 싣는다.
허 회장, 공동경영 큰그림…‘녹십자 신화’ 계속된다
이에 허 회장이 경영분쟁 소지를 원천 차단하고 3세대(아들·조카) 모두가 상생하는 새로운 시대를 준비할 것이라는 얘기가 나온다. 아들과 조카들이 각자 사업부문을 나눠 책임경영에 나설 가능성이다.
큰 틀은 차세대 성장동력인 헬스케어와 기존 글로벌 사업부문이 될 것으로 보인다. 허 회장은 2021년 10월 녹십자 창립 54주년 기념식에서 “우리가 잘해왔던 기존 사업에 집중해 글로벌 시장 영역 확장에 힘쓰고, 디지털 헬스케어 사업부문 발전을 위한 투자를 지속적으로 확대하겠다”고 선포한 바 있다.
현재 녹십자그룹은 계열사 GC케어를 중심으로 기업용 검진, 만성질환자 맞춤형 건강관리 등 다양한 헬스케어 분야를 개척하고 있다. SK(주)C&C, KT, LG유플러스, 교원그룹 등 여러 기업과의 협업도 활발한 편이다.
다른 한축인 글로벌 부문은 녹십자의 전통적인 사업영역이다. 현재 유전성 신경퇴행 질환 공동 연구, 숙신알데히드 탈수소효소 결핍증(SSADHD) 치료제 개발 등 희귀질환 분야에서 글로벌 제약사들과 다양한 연구개발을 진행하고 있다.
앞서 녹십자는 1987년 국내 최초 에이즈 진단시약 생산을 비롯, 1988년 세계 최초의 유행성출혈열백신, 1993년 수두백신, 2008년 유전자재조합 혈우병치료제, 2011년 천연물신약 골관절염치료제, 2012년 헌터증후군 치료제 개발 등 여러 신약 개발에 성공해 글로벌 영토를 넓혀왔다.
이 같은 허 회장의 큰 그림은 “위대한 헌신과 도전을 통해 위대한 회사로 도약하자”는 녹십자 정신에 뿌리를 두고 있다. ‘녹십자(Green Cross)’의 영문 이니셜인 GC는 ‘Great Commitment(위대한 헌신), Great Challenge(위대한 도전), Great Company(위대한 회사)’를 의미한다.
제약업계 관계자는 CNB뉴스에 “녹십자는 60여년전 우리 사회 의료시스템이 매우 열악한 시대에 창립돼 희귀질환 분야에서 숱한 기적을 만들어 왔다”며 “이제 전통적인 제약업 범위를 벗어나 디지털헬스 시대로 가고 있는데, 때마침 3세경영 시기가 도래하고 있다. 녹십자가(家)의 기업이념과 새로운 시대 흐름이 어우러지면서 제2도약 가능성이 어느 때보다 높아진 상태로 보인다”고 평가했다.
(CNB뉴스=도기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