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88명 구속된 1986년 ‘건대 사건’
진실화해위, 21개월 간 방대한 조사
쇠창살·갈고리 든 백골단이 폭력진압
경찰 1만4천명이 최루탄 3327개 발사
피해자들 ‘폭도’로 몰려 지금도 후유증
국회, 법개정 추진…전면재조사 가능성
CNB뉴스가 지난 2022년 12월 단독 보도한 ‘1986년 10·28건대사건(일명 건국대 항쟁)’에 대해 국가조사기관인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진화위)’가 공식 조사에 착수한 지 2년여 만에 사건의 총체적 실체가 드러났다. 진화위는 지난 5월 20일 이 사건을 전두환 정권에 의한 ‘불법구금 인권침해’로 판단, 진실규명 결정을 내렸다. 이에 CNB뉴스는 A4용지 47쪽 분량의 진화위 결정문 전체를 단독 입수, 여기에 관련자 인터뷰를 더해 2회(상,하편)에 걸쳐 연속 보도하고 있다. 앞서 상(上)편에서는 이 사건을 정부가 조작한 증거와 배경, 고문·폭행 등 관련자들에게 가해진 인권탄압 사례를 다뤘다. 이번 하(下)편에서는 사건 이후 피해자들의 후유증, 교도소 내에서의 인권침해, 건국대학교 측 피해액, 재심(再審) 청구와 국가보상 문제 등을 보도한다. (CNB뉴스=도기천 기자)
<상(上)편(“한두 명은 사형하라”…40년전 ‘건국대 항쟁’, 진화위 결정문 단독입수)에서 계속>
10·28건대항쟁계승사업회에 따르면, 건대항쟁 참가자 중 상당수는 고문, 폭행, 가혹행위 등으로 지금까지도 육체적·정신적 고통을 겪고 있다. 유형별로 보면 ▲경찰 폭력에 의한 부상 후유증(화상을 입거나 최류탄 파편이 몸에 박혀 정상적인 생활 불가능) ▲‘빨갱이’ 낙인이 찍혀 취업 제한 ▲공안당국의 감시·사찰 ▲우울증 등 정신적 트라우마 ▲강제징집 및 군대에서 불이익을 당한 사례 ▲학교에서 제적, 강제휴학 등 여러 피해사례가 발생했다.
계승사업회 고용규 공동위원장(당시 건대 3학년)은 CNB뉴스에 “건대항쟁때 연행된 사람들 중 상당수가 지금까지도 극심한 트라우마를 겪고 있다”며 “무엇보다 공산혁명분자, 폭도라는 주홍글씨 때문에 경제적·사회적 고통을 겪었다”고 토로했다.
후배 12명과 함께 건대항쟁에 참가했던 이은영씨(당시 경기대 3학년)는 CNB뉴스에 “폭력범이 되어 구속된 상태에서 강제휴학을 당했으며, 이후 제때 복학하지 못해 제적됐다. 신원조회에 걸려 인턴실습까지 마친 회사에서 취직이 불허됐으며, 1993년까지 요시찰(要視察) 인물로 분류돼 공안당국의 감시와 사찰을 받고 살았다”며 “그 사건으로 인해 인생이 바뀐 사람들이 많다”고 말했다.
당시 건국대 2학년이었던 김모씨는 진화위 조사에서 “문교부(현 교육부) 지침에 의해 건국대 사건 관련자들에 대해 일괄적인 징계조치가 이뤄졌다. 1986년 2학기 수업 전체를 '미이수' 처리하여 전부 F학점을 받았다. 그래서 상당한 학생들이 학사경고를 받게 되어 장학금을 받지 못하거나, 제적처리를 당하는 일도 있었다”고 진술했다.
심지어 일부는 스스로 목숨을 끊거나 의문사했다.
건대항쟁 당시 부산산업대(현 경성대) 복학생이던 진성일씨는 진압 직후인 11월 5일 건국대 사건 진상규명과 군부독재 타도를 외치며 문과대학 옥상에서 몸에 불을 붙인 뒤 투신해 사망했다. 한신대 2학년생이었던 곽현정씨는 연행 후 고문 휴유증에 시달리다 스물 둘의 꽃다운 나이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으며, 구속됐다 풀려나 노동 현장에 투신했던 강민호씨(한신대 85학번) 또한 자신의 몸에 불을 붙여 삶을 마감했다. 건대항쟁 때 애학투련 의장이었던 김신(고려대 83학번)씨는 심한 후유증을 앓다 직장에서의 과로가 겹치면서 끝내 숨을 거뒀으며, 건대항쟁 이후 국군기무사령부의 미행과 감시를 받던 박태순씨(한신대 85학번)는 퇴근 후 귀가길에 의문사했다.
헬기서 최류탄 쏘고 선무방송…전쟁터 방불
이처럼 건대항쟁 참가자들이 심각한 후유증에 시달려온 이유는 당시 경찰의 시위진압 과정이 잔혹했고, 연행 이후 가해진 고문·폭행, ‘빨갱이’ 오명을 쓰고 살아야 했던 이후의 삶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했기 때문이다.
이번 진화위 조사에 따르면, 경찰은 1986년 10월28일~10월31일 4일 간의 진압 과정에서 단전, 단수, 폭력행위 등 무자비한 인권유린을 자행했다.
조사 과정에서 드러난 ▲내무부의 공산혁명분자 건국대 점거난동 사건보고서 ▲서울지방검찰청 동부지청의 건대사건개요 ▲내무부 치안본부의 건대 점거학생 조치계획 등에 따르면, 경찰은 10월30일 농성 학생들이 점거한 건국대 내 5개 건물에 대한 단수 조치를 단행한 뒤, 경찰 헬기를 동원해 ‘전단을 갖고 나오면 선처한다’는 내용의 전단 5000매를 살포하는 등 공포감을 조장했다. 이날 밤 10시30분 경에는 본관 건물을 향해 서치라이트를 비추는 한편, 매트리스와 방석망을 건물 주변에 설치하는 등 진압작전을 준비했다.
10월31일 자정부터는 자수를 권유하는 선무방송을 시작한다. 경찰은 건국대 교내에 35개 중대, 외곽에 18개 중대 등 약 8000명의 기동대와 수사요원 등을 배치하고, 오전 8시경부터 학생들이 농성 중인 5개 건물을 향해 최후통첩 방송을 내보냈다. 소방당국은 농성장 주변에 매트리스를 깔아 학생들의 투신에 대비했으며 소방차 37대, 구급차 10대 등을 배치했다.
10월31일 오전 8시 50분, 마침내 진압이 시작됐다. 경찰 헬기 2대가 건국대 5개 건물 상공을 선회 비행하며 상공에서 농성 학생들을 향해 최루탄을 투척했다. 헬기를 동원한 시위 진압은 이때가 경찰 역사상 최초였다.
이어 지상에서도 최루탄 발사기를 동원해 학생들을 향해 직격으로 최루탄을 발사하고, 쇠창살·갈고리·전기봉 등으로 무장한 경찰 사복체포조(일명 백골단)가 각 건물에 투입됐다. 사복체포조는 고가사다리차를 통해 각 건물로 진입했으며, 소방 살수차는 체포조 진입과 동시에 학생들을 향해 물대포를 발사했다.
진화위에 따르면, 진압 과정에서 최루탄 3327개가 사용되었으며, 연인원 126개 중대 1만3800여 명의 경력이 동원됐다.
계승사업회에 따르면, 경찰 진압으로 53명의 학생이 중상을 입어 입원했고, 입원하지 않은 학생들도 대부분 심한 구타를 당했다. 그날 현장에서 체포된 한 농성자는 2022년 12월 CNB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증언한 바 있다.
“당시 경찰의 폭력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다. 10월31일 오전, 건물에 진입한 경찰은 나를 포함해 40여명을 옥상 바닥에 무릎 꿇려 놓고 마구 때렸다. 그러다 갑자기 쇠파이프로 내 머리를 가격했다. 정신을 잃은 채 업혀서 계단을 내려왔다. 경찰서로 끌려가 학우들을 만나보니 안맞은 사람이 없더라. 그때 당한 부상으로 한동안 병원을 오갔고 지금도 가끔씩 자다가 머리를 찌르는듯한 통증을 느낄 때가 있다”
이런 상황은 피해 학생들 스스로 만든 기록에도 남아있다. 사건 직후 발간된 ‘건대항쟁 참가자 수기모음집’에 서술된 서울대생 박희승씨(당시 3학년) 증언이다.
“육해공 합동작전이다. 하늘에서 쏟아지는 융단폭격(헬기에서 쏜 최류탄)을 보면서 순간적으로 2차대전 영화를 보는듯 했다. 세찬 물줄기를 맞고 쓰러지는 학우들, 빈틈 한곳 없이 최류탄이 쏟아졌다. 백골단(경찰기동대) 놈들은 헬맷에 방독면을 착용하고 왼손엔 방패, 오른손엔 손도끼와 쇠갈쿠리를 들고 있었다. ‘개새끼들 빨갱이새끼들’ 욕설이 들려오고 구타 소리와 비명이 터져 나왔다”
경찰은 학생들을 A급(주동자), B급(적극가담자), C급(단순가담자), D급(가담기도자) 등으로 분류했고 이 과정에서 또다시 가혹행위 등 인권유린이 자행됐다. <관련기사: [단독] “한두 명은 사형하라”…40년전 ‘건국대 항쟁’, 진화위 결정문 단독입수(上) , [단독] “구속자 1288명”…‘건국대 항쟁’ 그날의 진실 드러난다>
기물 파손 등 재산피해도 막대했다. 건국대학교 측은 사건 직후 교육당국과 함께 피해액 조사에 나섰는데, 본관, 사회과학관, 도서관, 학생회관, 이과대 건물이 직접적인 피해를 입었고 벤치, 보도블록 등 시설물 파손을 합쳐 총 23억5797만원 상당의 재물피해를 입었다고 추산했다. 또한 정부의 휴교 조치로 인해 한동안 학습권을 침해당했다. 재물피해액을 현재가치로 추산하면 100억원 이상에 이른다.
박상희 건국대 총동문회장(한국농어촌희망재단 이사장)은 CNB뉴스에 “경찰의 강경진압으로 건국대 시설물 피해는 물론 학습권을 뺏기는 등 막대한 피해가 발생한 만큼, 지금이라도 국가가 이에 대해 보상해야 한다”며 “총동문회가 학교(건국대)로부터 권한을 위임받아 변호사를 선임해서 손해배상소송을 진행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구치소에서도 가혹행위…‘정신적 불구’ 만들어
학생들은 교도소·구치소로 넘어간 뒤에도 가혹행위에 시달렸다.
진화위 조사에 따르면, 사건 연루자들은 여러 교도소로 분산돼 집체교육을 받았다. 의정부 교도소의 경우, 1986년 11월 21일~12월 1일까지 두 차례에 걸쳐 각각 5일간(총10일) 여학생 195명과 남학생 282명을 대상으로 집체교육이 실시됐다. 교육은 오전 9시부터 5시까지 이뤄졌으며 이후에는 교육 결과에 대한 소감문을 작성해 제출했다.
성동구치소에 수감된 남모씨(당시 서울시립대 2학년)는 반성문을 제대로 쓰지 않았다는 이유로 고문을 당했다. 남씨는 진화위 조사에서 이렇게 증언했다.
“교도관 몇 명이 저를 징벌방으로 끌고 갔습니다. 가로 1.2미터, 세로 2.2미터 정도의 0.8평 징벌방에 들어간 이후 저는 단식투쟁을 했습니다. 교도관들은 저를 수갑을 채운 상태에서 가슴과 팔을 포승줄로 묶은 뒤 구금했으며, 지속적으로 반성문 작성을 요구했습니다. 그 상태에서 단식투쟁 이틀 정도 지나자 4명의 교도관이 수갑 채운 손을 머리 뒤로 올리게 하고 목과 팔 사이로 봉을 끼워 번쩍 들어서 책상 위로 을렸습니다. 팔과 목 등에 끼위둔 봉을 잡아 돌리며 주리를 틀 듯이 고문을 가했습니다. 다리도 묶인 상태였는데 다리 사이에도 봉을 끼워 주리를 틀었습니다. 이러한 고문과 동시에 구둣발로 구타가 계속되었습니다. 한 시간 반 정도 무차별 구타와 고문이 계속되었던 것 같습니다. 제가 완전히 제압되자, 다른 수감자들을 제가 있는 징벌방으로 데려와서 살려달라고 외치는 저를 보여주며 그들에게 반성문을 요구했습니다.”
피해자들의 증언으로 볼 때, 당시 전두환 정권은 건대 사건을 조작해 관련자들에게 중죄를 씌운 것에 그치지 않고 극도의 수치심과 공포감을 유발한 것으로 보인다. 다시 사회로 돌아가서도 민주화 운동을 못하게 하려는 의도다. 이로 인해 피해자들은 오랜 세월 좌절감과 우울증에 시달려야 했다.
이 같은 정신적·육체적 피해는 이번 진화위 조사에서 어느 정도 윤곽이 드러났지만, 실질적인 명예회복과 국가보상 등은 아직 갈길이 멀어 보인다.
진화위는 경찰이 학생들을 연행한 시점과 구속영장 청구 시점을 밝혀내 이 사건 관련자들이 ‘구속영장 없이 불법구금’ 당했음을 입증했지만, 고문·폭행 등에 대해서는 당사자들의 진술 외에는 입증이 어렵다며 한계를 시인했다.
진화위는 결정문 말미에 “신청인들의 일관된 진술은 신빙성 있는 진술로 보이지만, 당시 수사 공판기록이 보존연한 경과로 폐기된 점, 구체적인 사실관계를 확인할 수 없는 점, 당사자 외의 참고인 등에 대한 조사가 이뤄지지 못한 점 등으로 인해 이를 객관적인 사실로 판단하기에는 어려워 진실규명을 할 수 없었다”고 밝혔다.
또한 1500여명의 피해자 중 진화위에 접수된 사례가 아직 86명에 불과하다는 점도 진상규명의 갈 길이 멀었음을 보여준다.
계승사업회 측은 “당시 건대 시위는 전국의 여러 대학이 참가해 학생들끼리 안면식도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라 수십년이 지나 당시 피해자를 찾기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수소문해서 피해자들을 모았고, 더 시일이 지체되기 전에 우선 소수라도 진상조사 신청을 하게 된 것”이라고 밝혔다.
계승사업회에서 피해사례를 수집해온 A씨는 “피해자 대부분이 오늘날까지도 트라우마를 겪고 있어, 본인이 피해자임에도 나서기를 꺼리는 분들도 많다”고 말했다.
국회 법안 발의…“국가범죄, 중단없이 진상규명”
건대항쟁 계승사업회와 피해자들은 진화위의 2차 조사에 기대를 걸고 있다. 더 깊이 있는 조사가 이뤄진 뒤 그 결과를 근거로 국가를 상대로 재심 청구, 보상 요구에 나설 계획이다. 시민단체들과 연대해 곳곳에 흩어져 있는 피해자들을 모으는 방안도 고민하고 있다.
계승사업회 외에도 민족민주열사추모연대, 피학살자유족회, 삼청교육대피해자모임 등 다른 국가피해단체들도 새로운 진화위 출범을 촉구하는 지역공청회를 열고 있다. 국회 행안위에도 진화위법 전면 개정안이 상정돼 있다. 용혜인, 김성회 의원 등이 각자 법안을 발의한 상태다. 진화위 조사 기간을 늘려 국가범죄에 대해 중단없이 진상을 규명하자는 것이 개정안의 요지다.
이번 건대항쟁 사건을 담당한 진화위 조사관은 CNB뉴스에 “건대 사건에 대해 방대한 조사가 이뤄졌고 사건의 과정과 배경, 인권침해 사실, 가혹행위 등에 일정 부분 밝혀냈음에도 최종단계에서 뚜렷한 결론을 내지 못한 아쉬움이 있다”며 “다음 진화위에서 더 깊이 있는 조사가 진행될 수 있도록 종결이 아닌 ‘조사중지(시일이 촉박해 조사가 중지됐다는 의미)’ 결정을 내리게 됐다”고 말했다. 진화위의 조사기한 종료는 지난 5월 26일이고, 활동 종료일은 11월 26일이다.
계승사업회 조남득 사무처장은 “이번 진화위 조사보고서는 국가가 사건 발생 40여년 만에 처음으로 진상규명에 나선 결과물이라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면서도 “새정부가 들어선 만큼 새로운 진화위(제3기 진화위)에서 더 깊이 있는 조사가 이뤄져 보상과 명예회복을 통해 그분들이 목숨을 걸고 독재에 맞섰던 민주화운동 정신을 기려야 한다”고 강조했다.
(CNB뉴스=도기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