롯데 vs 신세계, 휴전없는 무한전쟁
이베이 차지한 신세계...맘 편치않아
그룹 탄생 뿌리부터 달라 접점 없어
업계 “제살깎아먹기 경쟁 안타까워”
“경쟁사 신작이 대박 내는 게 우리에게 나쁘지 않아요. 일단 글로벌 시장이 커져야 하기 때문이죠. 그래야 후발업체에도 기회가 옵니다. 경쟁 자체가 윈윈인 셈이죠.”(한 게임사 홍보실 관계자)
“타사 직원들과 호형호제할 정도로 친하게 지냅니다. 매머드급 공사는 여러 건설사가 함께 참여하기 때문에 정보 공유가 필수죠. 같이 살자는 게 이 바닥 정서입니다.”(한 건설사 임원)
게임업계나 건설업계 등 함께 생존을 모색하는 산업분야에 비해 유독 유통가는 한치 양보없는 영토전쟁이 계속되고 있다. 한쪽이 성장하면 한쪽은 몰락하는 전형적인 ‘제로썸(zero-sum) 게임’ 양상이다. 특히 유통 ‘빅2’인 롯데와 신세계 간의 경쟁은 ‘전쟁’이라 할 만큼 치열하다. 서로 생긴 앙금의 골 또한 양사의 역사만큼 깊다. (CNB=도기천 기자)
“동빈이형” 도발한 정용진
최근에는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과 정용진 신세계 부회장이 이베이 인수를 놓고 맞붙었다.
이베이코리아는 국내 이(e)커머스 3위 업체이자 오픈마켓 1위 기업이다. 롯데와 신세계 모두 이커머스 분야가 약하다는 점에서 양사는 각각 롯데쇼핑과 이마트를 앞세워 마치 치킨게임((2대의 자동차가 마주보며 돌진하는 상황)을 방불케하는 인수전을 펼쳤다.
롯데쇼핑이 21일 인수를 포기함으로써 신세계가 이베이를 차지하긴 했지만, 업계에서는 ‘상처뿐인 승리’라는 말이 나온다. 한 유통채널 관계자는 CNB에 “비록 롯데가 막판에 이베이를 포기하긴 했지만 양사의 경쟁 때문에 이베이의 몸값이 4조원대로 치솟았다는 점에서 ‘승자의 저주’를 우려하는 시각도 있다”고 말했다.
업계에서는 롯데가 조만간 버티컬 커머스(특정 분야에 전문성을 가진 쇼핑몰) 여러 개를 인수해 반격에 나설 것으로 보고 있다.
이베이 인수전이 과열될 것이라는 점은 이미 올해 초 예견됐다. 지난 1월 정 부회장이 프로야구단 ‘SK와이번스(현 SSG랜더스)’를 깜짝 인수, 롯데자이언츠의 아성에 도전장을 내민 것.
이후 정 부회장은 자신의 SNS(쇼셜미디어)를 통해 대놓고 롯데의 자존심을 건드렸다. “롯데가 유통과 야구를 결합한 사업을 잘하지 못하고 있다”거나, 롯데자이언츠 경기를 보러 온 신 회장을 향해 “야구 안 좋아하는 동빈 형이 내가 도발하니까 야구장에 왔다”고 비꼬는 식이다.
이런 가운데 양사는 프로야구(KBO) 시즌 개막을 앞두고 같은날 나란히 대규모 할인행사에 나서기도 했다.
결과적으로 이런 흐름이 이베이의 몸값을 천정부지로 올린 셈이다.
자존심 대결 시발점은 ‘인천대전’
이같은 롯데와 신세계의 자존심 경쟁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오래전부터 백화점, 면세점, 호텔, 편의점 등 여러 전선에서 전면전을 펼치고 있다.
재계에서는 양사 유통 전쟁의 시작점을 2012년 인천터미널 부지 소송전으로 보고 있다.
신세계는 1997년부터 인천시와 20년 장기임대계약을 맺고 인천터미널에서 백화점을 운영해왔다 하지만 2012년 9월 롯데가 인천시로부터 터미널 부지와 건물 일체를 9천억원에 매입하면서 갈등이 촉발됐다.
롯데가 건물주가 됨에 따라 신세계는 알짜배기 점포를 롯데에 고스란히 내줘야 할 판이 됐다. 이에 신세계는 “인천시가 롯데에 특혜를 줬다”며 인천시와 롯데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 대법원까지 재판이 이어졌지만 결국 신세계가 패소해 점포를 비워주게 된다. 이곳은 롯데 손에 넘어가 2019년 1월 ‘롯데백화점 인천터미널점’으로 재개장 했다.
롯데의 인천터미널 '도발' 이후 신세계는 곳곳에서 반격에 나선다. 2016년 초대형복합쇼핑몰 ‘스타필드’를 지어 롯데아울렛을 위협했다. 2018년에는 롯데가 독점해온 강남 면세점시장에 신세계면세점이 진출해 이른바 ‘강남 대전’이 펼쳐졌고, 기존 롯데·신라 양강 체제였던 인천국제공항 면세점도 신세계가 합류하면서 3강 구도로 재편됐다.
2015년 금호산업 인수전 때는 롯데의 참여 가능성을 의식해 신세계가 인수의향서(LOI)를 써냈다가 뒤늦게 롯데가 불참한 사실을 알고 하루 만에 의향서를 철회하는 해프닝이 벌어지기도 했다.
롯데아울렛이 이케아와 손잡고 ‘스타필드 고양’과 불과 3㎞ 떨어진 곳에 문을 열자, 정 부회장이 “이케아도 쉬어야 한다”며 돌직구를 날린 적도 있다. 정부의 복합쇼핑몰 의무휴업 규제 방침에 가구전문점(이케아)은 포함되지 않은 것에 대한 불만을 드러낸 것이지만, 실제로는 이케아와 한배를 타고 있는 롯데를 겨냥한 발언이라는 해석이 나왔다.
양사는 편의점 시장에서도 격돌했다. 신세계는 2014년 이마트24를 설립해 롯데 세븐일레븐(코리아세븐)에 도전장을 냈다. 2018년에는 국내 편의점시장 5위인 미니스톱 인수를 놓고 맞붙었다. 신 회장이 직접 일본으로 날아가 미니스탑 최대주주인 일본 이온그룹 임원들을 접촉했고, 비슷한 시기 정 부회장은 이마트24를 편의점업계 자율규약에 참여시키며 인수 토대를 마련했다. 당시 롯데는 신세계를 누르고 우선협상대상자가 되긴 했지만, 이온그룹과의 미니스탑 몸값 조율에 실패해 인수가 무산됐다.
지나친 경쟁, 유통생태계 교란 우려
이런 과정을 살펴보면 ‘인천터미널’이 오랜 전쟁의 불씨가 된 것은 분명해 보인다. 하지만 “왜 잠시도 휴전이 없었나”를 따지면 얘기가 좀 길어진다.
한국재벌사연구소 이한구 소장(수원대 명예교수)은 이런 상황의 배경을 국내 재벌가(家)의 역사에서 찾는다. 이 소장과 재계에 따르면, 우리나라 유통재벌은 크게 삼성가와 롯데가에서 비롯됐다.
삼성그룹의 뿌리는 창업주 고 이병철 회장이 1938년 대구에 세운 삼성상회다. 삼성은 1963년 동화백화점을 인수해 신세계백화점으로 상호를 바꿨다. 이후 신세계는 1991년 삼성그룹에서 분리됐고, 현재는 고 이건희 삼성 회장의 여동생인 이명희 회장이 정용진 부회장과 함께 그룹을 이끌고 있다.
유통가의 또다른 한축인 CJ그룹도 삼성에 뿌리를 두고 있다. CJ의 모(母)기업인 CJ제일제당은 이병철 회장이 1953년 설립했고, 1993년 삼성그룹에서 분리 독립했다. 이후 지금까지 이병철의 손자이자 이건희의 조카인 이재현 회장이 CJ그룹을 이끌고 있다.
이처럼 삼성과 신세계, CJ는 사실상 한지붕 아래 있기에 서로 도를 넘는 모습은 보기 힘들다. 한때 이건희·이맹희 형제가 상속 분쟁을 벌이기도 했지만 이는 가족 다툼일 뿐 각자 속한 그룹(삼성·CJ)과는 무관했다.
반면 롯데는 삼성·신세계·CJ와는 전혀 다른 태생이다. 롯데는 70여년전 일본에서 껌 장사로 시작한 기업이다. 고 신격호 창업주는 1942년 관부 연락선을 타고 일본으로 건너가 미군을 상대로 껌을 생산·공급하는 사업에 뛰어들었다. 없어서 못 팔던 게 껌인 시절이다 보니 ‘청년 신격호’는 큰 돈을 벌었고, 1948년 자본금 100만엔, 종업원 10명의 법인을 세웠다. 이 회사가 ‘롯데’다.
1970년대에는 롯데칠성음료와 롯데삼강을 세워 국내 식품산업의 토대가 됐으며, 이어 롯데호텔과 롯데쇼핑, 롯데면세점을 잇따라 설립해 유통·관광 분야 1위기업으로 도약했다.
이 소장은 CNB에 “롯데와 신세계의 앙금은 어제오늘 형성된 게 아니다. CJ, 현대백화점, 애경그룹 등 다른 유통사들은 서로 마찰이 없는데 유독 양사만 휴전없는 무한전쟁을 벌이고 있다”며 “이는 탄생 배경부터 확연히 달라 아무런 접점이 없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유통업계 관계자는 “유통시장이 타업종에 비해 경쟁이 치열한 건 사실이지만 그렇더라도 양사가 제살깎아먹기식 다툼을 벌이는 걸 보면 안타깝다”며 “지나친 경쟁은 소비자와 하청업체의 피해를 불러올 수 있다는 점에서 서로 간에 최소한의 상도의라도 지켰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CNB=도기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