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 2기’ 출범했지만 대한민국은 ‘시계제로’
계엄·탄핵 등 정치 불안에 내수·무역 모두 휘청
기업들 새해 전략 우왕좌왕…비상경영체제 돌입
우는 놈 뺨 때린 격? 오직 희망은 ‘민주주의 시민’
미국 대선, 계엄과 탄핵, 환율 급등, 내수 악화, 교역 빨간불, 주가 폭락, 비상경영… 2024년 대한민국 재계를 강타한 단어들이다. 언제는 쉬운 해가 있었냐마는 특히 올 한해 경제계는 힘든 시간을 보냈다. 고금리·고환율에 따른 내수 침체에다 미국 트럼프 2기 출범을 앞두고 불확실성이 증대된 상태에서 맞닥뜨린 ‘비상계엄’ 사태와 이에 따른 윤석열 대통령 탄핵은 가뜩이나 취약한 우리 경제에 치명상을 안겼다. 주요국과의 외교·통상 협상이 사실상 중단됐고 환율이 치솟으며 기업들은 시계제로 상태에 직면했다. 다만 국민들이 보여준 높은 민주주의 의식과 질서 정연한 모습은 외신들의 극찬을 받았고, 이는 곧 정치·경제 회복의 동력이 될 것이라는 희망을 안겼다. 2025년 새해가 비관적이지만은 않은 이유다. CNB뉴스가 주요 사건을 통해 올해 재계가 걸어온 길을 되짚어 봤다. (CNB뉴스=도기천 기자)
1. 비상계엄·탄핵정국…기업들 ‘새판짜기’
지난 12월 3일 밤 윤석열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는 재계에 큰 충격을 안겼다. 비록 6시간 만에 계엄이 해제되긴 했지만 후폭풍은 엄청났다.
2주 뒤 국회에서 대통령 탄핵안이 가결돼 윤 대통령의 직무가 정지됐다. 주요국과의 외교·통상 협상이 올스톱 됐으며, 환율은 1470원 언저리까지 치솟았다. 연말특수는 사라졌고 내수는 꽁꽁 얼어붙었다.
이에 국내 주요기업들은 새판짜기에 돌입했다. 삼성전자는 지난 17일부터 사흘간 글로벌 전략회의를 개최해 내년 전략을 원점에서 재검토했다. 글로벌 전략회의는 국내외 임원이 모여 사업 부문, 지역별 현안을 공유하고 새로운 목표를 제시하는 자리다.
LG전자도 지난 20일 임원 300여명이 모여 확대 경영 회의를 열었다. 급변하는 국내 정세와 트럼프 2기 행정부 출범에 따른 관세와 환율, 글로벌 수요 침체 등에 대한 대응방안이 논의됐다.
SK그룹은 계엄 사태 직후 최창원 수펙스추구협의회 의장 주관으로 주요 계열사 경영진이 참석한 대책회의를 열고, 이에 따른 영향과 돌파구를 마련에 분주했다.
주요 대기업들은 계엄·탄핵 여파에 따른 글로벌 브랜드 신뢰도 하락, 수출 차질, 내수 위축 등을 우려하고 있다. 특히 HBM(고대역폭 메모리) 기술 개발, 온디바이스 인공지능(AI) 분야 등 그간 정부· 국회 차원의 산업 정책 추진에 공백이 생길 경우를 대비해 ‘플랜B’ 마련에 고심하고 있다.
일본과 중국 등 동아시아 경쟁국들은 발 빠르게 트럼프 당선인과의 회동을 통해 자국에게 조금이라도 유리한 흐름을 만들려 애쓰고 있다. 그러나 국내 기업들은 정치·안보 불안을 겪으며 이른바 ‘코리아 디스카운트’(한국증시 저평가)가 심화되는 등 그 피해를 오롯이 받고 있는 형국이다.
2. 최태원-노소영 ‘세기의 재판’…재산분할 1조4천억원
지난 5월 최태원 SK그룹 회장과 노소영 아트센터나비 관장의 이혼 소송 2심에서 재판부는 “노 관장의 부친 노태우 전 대통령이 SK그룹 성장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며 “원고(최태원)가 피고(노소영)에게 위자료 20억원, 재산분할로 1조3808억원을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2022년 12월 1심이 인정한 위자료 1억원과 재산분할 665억원에서 20배 넘게 늘어난 금액이다. 특히 재산분할 액수는 단군 이래 최대 규모다. 천문학적 규모의 이혼 소송은 전 국민의 관심이 집중되는 ‘세기의 재판’'이 됐다.
재판부가 노태우 전 대통령의 비자금 300억원이 SK그룹 성장의 종잣돈이 됐다고 판단하면서 ‘6공 비자금’의 실체를 둘러싼 사회적 논란도 커지고 있다. 노 관장은 이 돈이 SK 성장의 밑거름이 됐다며 천문학적인 재산분할을 요구하고 있지만, 최 회장 측은 “6공화국 시기 특혜는 없었다. 6공의 유무형 지원으로 성장한 기업이라는 오명을 상고심에서 반드시 바로 잡겠다”며 벼르고 있다.
3. 한미약품, 전문경영인체제로 가는 험한 길
대주주 오너 일가로부터 자유로운 전문경영인체제에 대한 국민적 관심이 커지고 있는 가운데, 국내 제약업계 ‘빅5’ 중 하나인 한미약품의 독자경영 선언은 제약업계를 넘어 재계 전반에 신선한 충격을 안겼다.
하지만 한미약품의 전문경영인체제로 가는 길은 멀고도 험하다. 지난 7월 8일 송영숙 한미그룹 회장이 “경영 일선에서 물러나고 전문경영인체제를 도입하겠다”고 선언하면서 본격화된 한미약품그룹의 경영권 분쟁이 6개월 가까이 계속되고 있다.
송 회장이 ‘전문경영인’으로 지목한 박재현 한미약품 대표는 송 회장의 뜻에 따라 지주사로부터의 독립경영을 추진하고 있다. 경영관리본부에 인사·법무 조직을 별도로 신설하는 등 그룹의 간섭으로부터 벗어나고자 안간힘을 쓰고 있다.
하지만 송 회장의 두 아들인 임종윤·임종훈 한미사이언스 사내이사는 박 대표의 시도를 지주회사에 대한 ‘항명’으로 판단해 박 대표의 사장 직위를 전무로 강등하고, 한미약품의 결재 전산망을 마비시키는 등 횡포를 저질렀다. 또한 지난 19일 개최된 한미약품의 임시주주총회에 박 대표 해임안을 상정했다.
하지만 한미약품 주주들은 박 대표를 재신임했고, 형제 측의 경영권 장악 시도는 일단 무위로 돌아갔다. 그러나 양측의 ‘불안한 평화’가 언제까지 계속될지는 모를 일이다.
4. ‘고려아연 vs 영풍’ 분쟁…비철금속 세계 1위의 위기
비철금속 제련 분야 세계 1위 기업 고려아연의 경영권 분쟁이 올해 재계를 뜨겁게 달궜다.
1949년 장병희·최기호 창업주가 설립한 영풍그룹은 고려아연 계열사는 최씨 일가가, 전자 계열사는 장씨 일가가 맡는 분리 경영을 해왔다. 현재도 고려아연은 최씨 일가(최윤범 최장), 영풍은 장씨 일가(장형진 회장)가 경영하고 있다. 분리 경영 체제를 택하긴 했으나 상대 일가의 계열사 주식을 상호 보유하고 있다. 지분을 통한 상호 견제를 위해서다.
그러다가 영풍과 고려아연은 지난 2월부터 본격적인 경영권 다툼에 돌입했다. 영풍은 현 최윤범 고려아연 회장의 경영 방침을 문제 삼는다. 최 회장이 양사가 오래 지켜온 ‘무차입 경영’의 원칙을 깼다는 것. 반대로 고려아연 측은 영풍이 고려아연에 무리한 배당 요구와 경영간섭을 하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런 가운데, 국내 최대 사모펀드(PEF) MBK파트너스가 장형진 회장과 손잡고 고려아연 최대주주에 오른다. MBK는 지난 9월 13일부터 고려아연 공개매수를 진행해 지분율을 과반으로 끌어 올렸다. 이 때문에 주가가 몇배 폭등하는 등 시장이 요동쳤다. 영품 편으로 참전한 MBK는 노골적으로 고려아연에 대한 적대적 인수합병(M&A) 의지를 드러내고 있다. 사모펀드의 국가기간산업(고려아연) 인수에 대한 우려도 높아지고 있다.
양측은 내년 1월 23일 고려아연의 운명을 가를 주주총회를 앞두고 있다. 이사회 구성원 교체 등 회사 경영권을 좌우할 핵심 안건을 두고 표 대결을 벌인다. 누가 이사회를 장악하느냐에 따라 경영권의 향배가 갈릴 전망이다.
5. 대어(大魚) 인수합병…한화·하림 성공, 두산 실패
올해 인수합병(M&A) 시장의 대어로 대우조선해양과 HMM이 꼽힌다. 대우조선해양은 한화그룹이 인수해 한화오션으로 사명이 바뀌었다. 2000년대 초 대우그룹 해체에 따라 산업은행 손에 넘어간 대우조선해양은 2008년부터 매각이 본격적으로 추진됐지만 번번히 실패했다. 그러다가 올해 한화그룹에 편입되어 첫 분기 흑자 전환에 성공하며 성공적인 시작을 알렸다.
현대그룹의 남북경협 중단으로 인한 경영위기로 2016년 채권단(산업은행) 손에 넘어간 HMM(옛 현대상선)은 최근 하림의 품에 안겼다. 국내 1위 해운회사인 HMM의 경영권 매각을 위한 우선협상대상자로 하림이 선정된 것. 내년 상반기 본계약 마무리 시 하림의 재계 순위는 27위에서 13위로 상승할 전망이다.
두산그룹은 두산에너빌리티 계열사 두산밥캣을 떼어내 두산로보틱스 자회사로 편입하는 사업 재편 계획을 결국 철회했다. 애초 두산그룹은 두산밥캣의 차입금 7000억원을 두산로보틱스에 넘기는 등 두산에너빌리티의 짐을 덜어낸 뒤, 본격적으로 원전 관련 설비 증설 등에 나설 계획이었다. 향후 5년간 대형 원전 10기, 소형모듈원전(SMR) 60기를 수주하겠다는 목표도 세웠다.
하지만 윤석열 대통령 탄핵 가능성이 높아지면서 현 정부가 힘을 실었던 원자력 관련 주가가 폭락하자 분할·합병안이 주주총회를 통과하기 어렵다고 판단해 지난 10일 계획을 백지화했다. 계엄의 유탄을 제대로 맞은 셈이다.
대한항공과 아시아나항공의 합병은 새해로 넘어가게 됐다. 유럽연합(EU) 집행위원회는 아시아나항공 화물사업부 매각을 요구하며 기업결합 심사를 중단, 내년 2월 14일까지 잠정적으로 결론을 내리겠다고 공지했다. 현재 양사는 EU·미국·일본의 심사를 남겨두고 있다.
(CNB뉴스=도기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