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가 ‘盧비자금 300억’으로 성장했다는 노소영
취재 결과, 그 돈의 원래 주인이 SK일 가능성
전두환·노태우 정권의 막대한 정치자금 중 일부
“자녀(노소영)에 범죄자금 대물림” 비판 목소리
‘세기의 재판’으로 불리는 최태원 SK그룹 회장과 노소영 아트센터 나비 관장의 이혼소송이 갈수록 치열해지고 있다. 1심에서는 최 회장이 완승했지만 항소심 재판부는 노 관장의 손을 들어줬다. 이에 최 회장이 대법원에 상고해 조만간 본격적인 심리가 시작될 예정이다. 재판의 핵심 키는 노 관장의 부친 노태우 전 대통령이 SK 측에 제공한 ‘비자금 300억원’의 실체다. 노 관장은 이 돈이 SK 성장의 밑거름이 됐다며 천문학적인 재산분할을 요구하고 있지만, 취재결과 이 돈의 원래 주인이 SK일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CNB뉴스가 당시 비자금의 정체를 추적해봤다. (CNB뉴스=도기천 기자)
대법원이 최근 최태원 회장과 노소영 관장의 이혼소송 상고심 심리를 결정하면서 ‘노태우 비자금’이 다시 주목받고 있다.
앞서 지난 5월 항소심 재판부는 이 비자금과 6공화국의 특혜가 SK그룹 성장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며 “원고(최태원)가 피고(노소영)에게 위자료 20억원, 재산분할로 1조3808억원을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재판부는 노태우 전 대통령의 부인 김옥숙 여사가 남긴 ‘선경(SK의 옛이름) 300억’이라는 메모를 근거로 SK 측에 비자금이 흘러갔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CNB뉴스 취재 결과, 이 돈의 원래 주인이 SK(당시 선경그룹)였을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300억원 전부는 아니더라도 상당 부분이 과거 수차례에 걸쳐 SK측이 전두환·노태우 신군부 정권에 강제 헌납한 정치자금일 가능성이 있다. 이렇게 되면 준 돈을 다시 돌려받은 셈이 되므로 “친정(노태우)에서 사돈댁(SK)에 300억원을 줬다”는 노 관장 주장에 허점이 생기게 된다.
이 돈의 정체를 규명하기 위한 시작점은 전두환 정권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명박 전 대통령의 회고록 <대통령의 시간>을 보면 1979년 12.12쿠데타로 정권을 찬탈한 전두환·노태우 등 신군부 세력의 재계 탄압 실상이 적나라하게 묘사돼 있다.
당시 신군부는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국보위)를 내세워 산업 전 분야에 걸쳐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했다. 그들은 ‘중화학공업 투자 조정’이라는 명목 하에 주요 그룹의 계열사 166개를 4년 내에 통폐합하기로 했다.
재계는 시장 논리에 어긋난다며 반발했지만 오래 버티진 못했다. 대한상의, 무역협회 등 경제단체 수장들이 신군부 입맛에 맞는 사람들로 교체됐고 민간기업들은 빠르게 공사(公社)화 됐다.
이런 가운데 전두환은 1983년 아웅산 폭발사건으로 순직한 희생자들의 유족에 대한 지원과 장학사업을 벌인다는 명목으로 ‘일해재단’을 설립했다. 일해재단은 사실 권력의 자금줄이었다. 당시 대통령 경호실장이던 장세동 씨는 3년간 대기업들로부터 598억원을 걷어 총선과 대선 선거자금으로 사용했다. 이 과정에서 정권에 비협조적인 기업은 하루아침에 사라졌다. 일례로 정치자금을 제대로 내지 않았던 재계 서열 7위 국제그룹은 부실기업 정리라는 명목 하에 해체됐다.
이후 6월항쟁을 거치며 1988년 11월 국회서 ‘5공 비리 청문회’가 열린다. 전두환·장세동 등은 당시 청문회에서 “강제성 없이 경제인들 스스로 낸 것”이라고 주장했지만 정주영 당시 현대그룹 회장은 “내라고 하니까 내는 게 마음 편할 것 같아서 냈다”고 폭로했다.
대기업 갹출로 대선자금 마련…SK도 거액 기부
전두환(5공화국)의 뒤를 이어 1988년부터 집권한 노태우 정권(6공화국) 또한 천문학적인 비자금을 조성했다.
야권의 거센 반발이 계속되자 결국 노 전 대통령은 1995년 10월 27일 연희동 사저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자신의 통치 시절 거액의 비자금이 조성된 사실을 털어 놓는다. 당시 검찰 수사를 통해 노 전 대통령이 밝힌 비자금 규모는 4500~4600억원에 이른다. 검찰은 이 돈의 내역을 △1988년 제13대 총선, 1992년 제14대 총선에 각각 700억원씩 1400억원 △부동산 위장매입에 383억원 △민주정의당·민주자유당 지원금 790억원 △예금 등 잔액 1940억원이라고 발표했다.
하지만 이는 상당 부분 축소된 규모다. 1992년 제14대 대선 자금과 관련한 내역이 전혀 없기 때문. 훗날 노 전 대통령은 2011년 출간한 회고록에서 “김영삼(14대 대선 후보)에게 3천억원을 모아서 줬다”고 밝혔다.
이 비자금은 대기업들로부터 거둬들인 돈이다. 검찰이 1995년 11월 작성한 진술조서를 보면, 정치자금을 낸 규모에 따라 기업들이 4개 그룹으로 분류돼 있다.
A그룹에는 삼성, 현대, 대우, LG, 롯데 등 5개사, B그룹에는 쌍용, 선경, 한진, 대림 등 4개사, C그룹에는 동부, 진로, 두산, 동아, 한화, 풍산, 삼부토건, 태평양, 한보, 동양화학, 한양 등 11개사, D그룹에는 기아, 금호, 효성, 고합, 한일합섬, 코오롱, 해태, 극동, 미원, 대농, 효성, 동국제강, 대한전선, 삼양사 등 14개 기업이 이름을 올렸다.
노 전 대통령 경호실장이었던 이현우의 당시 검찰 진술에 따르면, 기업들이 낸 돈은 많게는 300억원 적게는 5~10억원 등 천차만별이었다.
이 과정에서 ‘선경 30억원’이라는 이현우의 진술이 등장한다. 당시 수사가 비자금 장부 등 결정적 증거 없이 이씨와 기업인들의 진술에 의해서만 수사가 진행됐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 금액은 상당부분 축소됐을 것으로 추정된다.
일례로 삼성그룹 이건희 회장은 처음에 80억밖에 바치지 않았다고 버티다가 10시간 이상 조사를 받은 뒤에야 현대와 동일한 250억을 줬다고 시인했으며, 일부 기업인은 거친 행동을 보이며 한푼도 낸 게 없다고 버텼다고 한다. 당시 수사 관계자는 언론 인터뷰에서 “재벌들이 노태우 씨에게 줬다는 금액은 사실 적게는 절반, 많게는 5분의 1까지 줄여서 진술한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이런 정황으로 볼 때 ‘선경 30억’ 또한 실제로는 이보다 훨씬 컸을 것으로 짐작된다.
손길승 전 SK 회장 “노태우에게 300억 상납 약속”
SK가 노태우 정권에 헌납한 돈은 이뿐이 아니다. 과거 SK그룹의 2인자였던 손길승 전 SK 회장(83)은 지난 6월 언론 인터뷰에서 “노 대통령 비자금 심부름을 하던 이원조 경제비서관이 노 대통령 퇴임 이후 지낼 거처와 생활비 등을 요구해 일단 생활비 명목으로 월 얼마씩 전달했다. 그러다 정권 말이 되니 이원조가 그 돈을 퇴임 후에도 지속 제공하겠다는 증표를 달라고 요구했다. 그래서 최종현 선대 회장과 논의한 끝에 약속어음 300억원을 노 대통령 측에 줬다”고 털어놨다.
SK가 약속어음을 발행한 시기는 1992년 12월 16일로 대선 이틀 전이다. 약속어음은 발행인이 일정금액을 일정한 시기에 지불할 것을 약속한 유가증권이다. 어음 금액만큼 노 전 대통령에게 실제 돈이 지급됐는지는 확인되지 않고 있지만, SK가 꾸준히 노 대통령에게 비자금을 제공해 왔음은 분명해 보인다.
여기에다 SK가 전두환 정권 시절 헌납한 금액까지 더하면 비자금 규모는 더 커진다. 전두환·노태우는 12.12쿠데타의 주역이었고, 전두환이 노태우에게 정권을 물려주는 과정(1987년 대선)에서 막대한 정치자금이 쓰였다는 점에서 전두환 비자금은 노태우 비자금과 상당 부분 엮여있다.
이런 사실과 정황을 종합해 볼 때, “부친(노태우)의 비자금 300억원을 기반으로 SK가 성장했으므로 그만큼의 재산을 분할해 달라”는 노 관장의 주장은 설득력이 약해 보인다.
<한국재벌사> 저자 이한구 한국재벌연구소장은 CNB뉴스에 “SK가 전두환 시절부터 노태우 정권에 이르기까지 막대한 정치자금을 상납해왔다는 점을 고려하면, 노태우가 SK에 줬다는 300억원 중 상당 부분의 원래 주인이 SK 일 수도 있다. SK 입장에서는 준 돈을 돌려받은 셈이므로, 그 돈으로 SK가 큰 덕을 봤다는 논리는 무리가 있어 보인다”고 지적했다.
법조계 일각에서는 부친(노태우)의 범죄 수익을 기반으로 한 재산을 자녀(노소영)가 가져가는 게 법리적으로 맞냐는 얘기도 나온다. 1997년 대법원은 노 전 대통령이 기업인 30여명으로부터 2629억원을 수수한데 대해 뇌물죄 유죄 판결을 확정한 바 있다. 진보당 윤종오 의원, 조국혁신당 조국 대표 등 국회의원 22명은 지난 6월 노태우 불법자금 추가 환수에 관한 법안을 발의한 상태다.
검찰 출신 한 변호사는 CNB뉴스에 “만약 법원이 노 관장의 주장을 수용한다면, ‘범죄자금 대물림’을 인정하는 셈이 된다”며 “비자금의 SK 유입 여부를 떠나, 사회 정의에 부합하는지 법리적으로 맞는지의 문제로 이어질 수 있다”고 지적했다.
SK측 “특혜가 아니라 오히려 마이너스”
한편 ‘노태우 비자금’과는 별개로 당시 정권이 노 관장을 통해 SK에게 특혜를 줬느냐의 문제는 이번 재판의 또다른 쟁점이다.
SK는 80년대 초 대한석유공사를 인수한데 이어 1994년 한국이동통신을 인수하는 데 성공한다. 최종현 선대회장은 선경정보시스템(1990년 5월), 대한텔레콤(1991년 4월) 등을 잇달아 설립했다. 1992년 8월 SK는 정부(체신부)로부터 제2이동통신사업자로 선정됐다가 야당의 강한 반발로 일주일 만에 사업권을 자진 반납했다.
하지만 김영삼 정부 출범 직후인 1993년 말 다시 사업자 선정 절차가 다시 시작됐고, 최종현 회장은 입찰을 포기하는 대신 대한텔레콤을 앞세워 한국이동통신 민영화에 참여해 지분 23%를 확보하며 경영권을 인수했다. 한국이동통신은 오늘날 이동통신업계 1위인 SK텔레콤으로 성장했다. SK는 이를 발판으로 재계 3위 그룹에 올랐다.
최 회장과 노 관장은 미국 시카고대 유학시절에 만나 애정을 키우던 중 노 전 대통령이 취임한 직후인 1988년 9월 결혼식을 올렸다.
앞서 항소심 재판부는 이런 과정을 고려해 ‘노 전 대통령이 사돈 기업인 SK의 뒤를 봐줬기 때문에 회사가 급성장한 것’이라고 판단했다.
반면 SK 측은 터무니없는 주장이라며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 이형희 SK수펙스추구협의회 커뮤니케이션위원장은 지난 6월 기자 설명회에서 “6공 시기 특혜는 없었고, 오히려 마이너스가 있었다”며 “항소심 판결로 SK그룹 성장 역사와 가치가 크게 훼손된 만큼 이혼 재판은 이제 회장 개인의 문제를 넘어 그룹 차원 문제가 됐다. 6공의 유무형 지원으로 성장한 기업이라는 법원 판단만은 상고심에서 반드시 바로잡고 싶다”고 강조했다.
(CNB뉴스=도기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