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전범기업을 상대로 한 손해배상 소송 2심에서 강제동원 피해자 유족이 승리했다. 1심에서는 소멸시효가 지났다는 이유로 유족이 패소했지만, 항소심 재판부는 1심 이후 나온 대법원 판례를 들어 결과를 뒤집었다.
20일 한겨레 단독보도에 따르면, 서울중앙지법 민사항소12-2부(재판장 김현미)는 지난 18일 일본의 건설사 쿠마가이구미에 강제 동원되어 일하다 숨진 피해자의 유족 박아무개씨에게 회사가 1억원을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일부 지연손해금을 제외하고는 소송 제기 당시 유족이 요구한 위자료를 모두 인정한 사실상 승소 판결이다.
유족이 패소했던 1심 결과가 나온 2022년 당시는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손해배상 청구권 소멸시효의 기산점을 두고 하급심마다 의견이 엇갈렸다. 일부 재판부는 대법원이 처음 강제동원 피해자의 손해배상 청구권을 인정한 2012년 5월24일을 출발점으로 삼았고, 또 일부는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 선고로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사법적 구제가 가능해진 2018년 10월30일을 기준으로 봤다.
손해배상청구권은 ‘권리행사의 장애사유가 제거된 날’로부터 3년간 행사하지 않으면 소멸하는 만큼, 언제를 시작점으로 보느냐가 중요하다. 박씨의 유족은 2019년 4월 소송을 제기했기 때문에 소송 제기 시점이 항소심의 쟁점이 됐다.
이번 항소심에서 승패가 뒤집힌 것은 지난해 대법원이 2018년을 소멸시효 출발점이라고 확정한 데 따른 결과다. 지난해 12월 대법원은 강제노역 피해자와 유족들이 일본제철과 미쓰비시중공업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청구 소송에서 원고 승소 판결을 하며 소멸시효 계산 기준이 2018년 10월30일이라고 명시했다.
이에 따라 항소심 재판부는 강제동원 피해자의 손해배상 청구권을 인정한 2012년의 대법원 판결은 파기환송으로 하급심의 판단을 새로 구한 것이기 때문에 소멸시효의 기준으로 작용할 수 없고, 2018년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을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고 판단했다.
이런 이유로 항소심 재판부는 “(2018년 전원합의체 판결이) 대법원의 법적 견해를 최종적으로 명확하게 밝힌 것”이라고 보고 2019년 소를 제기한 유족들은 3년 이내의 기한이었기에 시효가 소멸하지 않았다고 봤다.
피해자의 유족을 대리한 김성주 변호사(법무법인 덕수)는 한겨레에 “하급심 판례들이 그전까지는 계속 엇갈리다가, 작년에 미쓰비시중공업을 상대로 한 판결을 통해서 시점을 명확히 하는 대법원 판례가 있었던 게 이제 하급심들에서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며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례의 취지에 따라 1심 판결을 바로잡은 첫 사례라고 본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