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인터뷰] 36년전 구속자들 “지금도 후유증 시달려”
건대 동문회 등 7개 단체 ‘범건국인 청원운동본부’ 결성
진화위에 진실규명 요청…피해자 수천명이라 파장 클듯
80년대 6월 민주항쟁의 도화선이 된 ‘건국대 항쟁’의 진실이 조금씩 드러나고 있다. 건국대 교정에서 대학생 수천명이 연행돼 이 중 1288명이 구속된 ‘단국 이래 최대 구속사건’으로 불리는 이 사건의 실체는 그동안 ‘민주화운동보상심의위원회’ 조사 등을 통해 일부 드러났지만, 어디까지나 개개인에 대한 보상 차원에서였다. 하지만 당시 관련자들이 최근 국가기관인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진화위)’에 진실규명 신청서를 접수하면서 총체적 진상규명의 막이 올랐다. 특히 이번 진실규명 작업에는 건대항쟁계승사업회 뿐 아니라 건국대 총학생회와 총동문회, 교수협의회, 노동조합, 교수노조, 민주동문회 등 건대 전 구성원이 참여했다. 이에 CNB뉴스는 당시 항쟁에 참여한 당사자들을 만나 그날 상황과 피해 사례, 역사적 배경 등에 대해 단독 인터뷰했다. 또 이들이 진화위에 접수한 내용을 입수해 당시 사건을 재구성했다. (기사 속 인물 중 일부는 현재까지도 트라우마를 겪고 있어 익명으로 기사화했다) (CNB뉴스=도기천 기자)
10·28건대사건, 건국대사태, 건대민주항쟁, 건대농성사건 등으로 불리는 10·28건대항쟁(이미 사건 당사자 중 일부가 정부로부터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인정받은 만큼, 용어를 ‘건대항쟁’으로 부르기로 한다)은 1986년 10월28일~10월31일 3박4일간 발생한 사건이다.
당시 전국 26개 대학의 학생 2000여명이 건국대 캠퍼스에 모여 전두환 군사독재에 맞서 전국반외세반독재애국학생투쟁연합(애학투련) 발족식을 가졌다.
이에 전두환 정권은 내무부치안본부, 안기부, 보안사 합동진압작전인 ‘황소30’을 시행했다. 10월 28일 애학투련 발족식 도중 경찰이 최루탄을 쏘며 학내에 진입했고, 학생들은 경찰을 피해 본관 등 5개 건물로 피신했다.
학생들은 4일 간 경찰과 대치하다 헬리콥터와 최류탄, 물대포(소방호스)를 동원한 대대적인 진압에 의해 1487명(이후 체포된 이들까지 포함하면 1525명)이 연행돼 1288명이 구속됐다. 단일 사건 구속자 수로는 세계 최대 규모였다.
이 과정에서 단전, 단수, 폭력행위 등 무자비한 인권유린이 자행된 것으로 알려졌다. 53개 중대 8000여명의 경찰 병력이 동원돼 학생들을 마구잡이로 연행했으며, 이 와중에 53명의 학생들이 중상을 입고 입원했다. 입원하지 않은 학생들도 대부분 심한 구타를 당했다. 건국대학교측 역시 당시 집계로 24억원 가량의 재산 손실을 입었다.
당시 사전검열을 받던 언론들은 학생들을 ‘좌경용공분자’, ‘공산혁명분자’, ‘폭도’ 등으로 보도했다.
10·28건대항쟁계승사업회에 따르면, 당시 항쟁 참가자 중 상당수는 공안당국에 의한 고문, 폭행, 가혹행위로 지금까지도 육체적·정신적 고통을 겪고 있다고 한다. 심지어 일부는 스스로 목숨을 끊거나 후유증으로 세상을 등졌다.
건대항쟁 당시 부산산업대(현 경성대) 복학생이던 진성일씨는 진압 직후인 11월 5일 건국대 사건 진상규명과 군부독재 타도를 외치며 문과대학 옥상에서 몸에 불을 붙인 뒤 투신해 사망했다.
한신대 2학년생이었던 곽현정(여)씨는 연행후 고문 휴유증에 시달리다 스물 둘의 꽃다운 나이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으며, 구속됐다 풀려나 노동 현장에 투신했던 강민호씨(한신대 85학번) 또한 자신의 몸에 불을 붙여 삶을 마감했다.
건대항쟁 때 애학투련 의장이었던 김신(고려대 83학번)씨는 심한 후유증을 앓다 직장에서의 과로가 겹치면서 끝내 숨을 거뒀으며, 건대항쟁 이후 국군기무사령부의 미행과 감시를 받던 박태순씨(한신대 85학번)는 퇴근후 귀가길에 의문사했다.
“우리는 전두환 정권의 각본에 의한 피해자”
CNB뉴스는 지난달 30일 건대항쟁에 참여해 연행·투옥된 세 사람을 만나 3시간 가량 인터뷰를 진행했다. 당시 건국대 3학년생이었던 조남득씨(58·건대항쟁계승사업회 사무처장)는 그때 상황을 이렇게 전했다.
“경찰 진압은 시위해산이 목적이 아니었다. 대대적인 병력을 동원해 집회 현장을 급습해 학생들을 건물 안으로 몰았다. 학생들은 아무런 준비 없이 맨몸으로 건물 속에 갇혀 3박4일을 버텼다. 많은 학생들이 식량부족과 추위로 탈진해 갔지만 경찰은 포위망을 풀지 않았다. 우리는 안전한 귀가를 보장하면 자진 해산하겠다는 뜻을 전했지만, 경찰은 이를 거부하고 단수·단전까지 하면서 우리를 압박했다. 그러는 동안 언론은 ‘공산혁명분자들의 점거농성’이라고 보도하며 판을 키웠다. 지금 생각해보니 전두환 정권이 미리 짜둔 시나리오에 의해 철저히 이용당한 것이다”
당시 건국대 2학년생이던 A씨(여·57)도 조씨와 같은 생각이었다.
“학교건물에서 체포돼 경찰서로 끌려왔는데 내가 어린 여학생이라 그런지 처음엔 적당히 조사하고 기소를 안했다. 그런데 경찰 간부가 나를 조사했던 경찰관에게 왜 기소 안했냐고 윽박질렀고, 그래서 다시 심문이 시작됐다. 겁이 나서 그들이 불러주는 대로 진술서를 썼다. 한 사학과 여학생은 집에서 프랑스혁명사 책이 나왔는데 이걸 갖고 용공세력인 증거라며 다그쳤다. 그건 사학과 교재였는데…(웃음). 이미 모든 시나리오가 짜여있고 거기에 맞춰 조사가 진행되고 있었다”
그렇다면 단순히 민주화 시위를 벌였던 대학생들을 공산주의자로 몰고 간 이유는 뭘까?
건대항쟁계승사업회 고용규 공동위원장(당시 건대 3학년생)은 “대대적인 진압에는 적어도 두 가지가 고려된 것으로 보인다. 하나는 학생운동 진영을 급진적이고 폭력적인 것처럼 보이게 하여 국민들로부터 격리시키고, 정치적으로는 (당시 야당이던) 신민당과 학생 세력 간의 균열을 조장한 것이다. 또 하나는 우리를 모조리 체포함으로써 학생운동의 씨를 말려 전두환 정권에 저항하는 민중세력이 형성되는 것을 사전에 저지하려 한 것”이라고 분석했다.
주홍글씨 낙인 찍혀 지금까지 고통
이들은 특히 진압과정에서 수많은 피해자가 발생했다고 증언했다.
A씨는 “경찰의 폭력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다. 항쟁 4일째인 10월31일 오전, 건물에 진입한 경찰은 나를 포함해 40여명을 옥상 바닥에 무릎 꿇려 놓고 마구 때렸다. 그러다 갑자기 쇠파이프로 내 머리를 가격했다. 정신을 잃은 채 업혀서 계단을 내려왔다. 경찰서로 끌려가 학우들을 만나보니 안맞은 사람이 없더라. 그때 당한 부상으로 한동안 병원을 오갔고 지금도 가끔씩 자다가 머리를 찌르는듯한 통증을 느낄 때가 있다”고 말했다.
조씨는 “머리를 숙인 채 끌려가다가 신발이 벗겨져 (신발을 찾느라) 머리를 들자 어디선가 군홧발이 날라와 내 허리를 가격했다. 당시에는 너무 많은 사람이 다쳐서 아프다는 생각도 못했다. 그때의 부상으로 지금도 걷다가 (허리 통증으로) 주저앉을 때가 있다”고 말했다.
당시의 경찰 폭행 상황은 일부 기록으로도 남겨져 있다. 항쟁 직후 발간된 ‘건대항쟁 참가자 수기모음집’에서 당시 서울대생 박희승씨(당시 3학년)는 이렇게 묘사했다.
“육해공 합동작전이다. 하늘에서 쏟아지는 융단폭격(헬기에서 쏜 최류탄)을 보면서 순간적으로 2차대전 영화를 보는듯 했다. 세찬 물줄기를 맞고 쓰러지는 학우들, 빈틈 한곳 없이 최류탄이 쏟아졌다. 백골단(경찰기동대) 놈들은 헬맷에 방독면을 착용하고 왼손엔 방패, 오른손엔 손도끼와 쇠갈쿠리를 들고 있었다. ‘개새끼들 빨갱이새끼들’ 욕설이 들려오고 구타 소리와 비명이 터져 나왔다”
이 사건 이후 꿈많던 대학생들의 삶은 완전히 바뀌었다. 고 위원장은 “항쟁 때 체포·구금·투옥된 학생들은 국가폭력의 피해자다. 당시의 후유증으로 자살과 우울증, 부상에 따른 육체적 고통이 이어져 왔고, 특히 전두환은 우리에게 공산혁명난동분자라는 주홍글씨를 씌워 취업 제한 등 경제적, 사회적 고통을 안겼다”고 토로했다.
실제로 계승사업회에 따르면, 화상을 입거나 최류탄 파편이 몸에 박혀 정상적인 생활이 불가능한 경우, 빨갱이 낙인이 찍혀 교사 임용이 좌절된 경우, 공안당국의 감시·사찰을 받은 경우, 강제징집 되어 군에서 불이익을 당한 경우 등 수많은 피해사례가 발생했다고 한다. (자세한 피해사례는 후속취재를 통해 공개할 예정임)
A씨는 “당시 사건으로 연행된 사람들 대부분이 지금까지도 극심한 트라우마를 겪고 있다. 그나마 정상적인 사회활동을 하는 분들은 입을 열고 있지만, 아직도 많은 분들은 그날을 잊고 싶어한다. 건물에 갇혀 있던 기억 때문에 좁은 실내에만 있어도 호흡이 잘 안된다는 분들도 있다. 여전히 많은 분들이 그날 그곳에 갇혀 있다”고 말했다.
고 위원장은 “건대항쟁은 한마디로 민주주주를 열망했던 어린 청년들의 삶이 군부정권에 의해 무참히 짓밟힌 사건이다. 그분들은 육체의 고통과 정신적 트라우마를 36년간 견디며 살아왔다. 이제라도 국가가 이들의 명예회복에 나서야 한다”고 강조했다.
명예회복이 치유의 길…이제는 국가가 나서야
이제 이 사건의 열쇠는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진화위)’로 넘어갔다. 진화위는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 기본법’에 따라 국가로부터 입은 피해의 진상을 밝히기 위해 설립된 국가조사기관이다.
건대항쟁계승사업회는 지난 10월 27일 진화위에 당시 사건 피해자 등 48명 명의의 진실규명 신청서를 접수한데 이어, 11월 30일 추가로 110명을 더 접수했다. 서울대·연세대·한양대·국민대·한신대·외국어대 등 14개 대학 민주동문회에서도 당시 항쟁 참가자들의 진화위 접수신청을 받고 있다. 계승사업회는 각 대학 피해자들을 취합해 오는 12월 9일 진화위에 최종 접수할 예정이다.
이와 별도로 건국대를 대표하는 모든 단체가 망라된 ‘범건국인 청원운동본부’도 최근 결성돼 진상규명 캠페인을 펼치고 있다. 청원운동본부는 건국대학교 총동문회(회장 정건수), 총학생회(회장 조남철), 교수협의회(회장 송치만), 교수노동조합(위원장 한상희), 건국대학교 노동조합(위원장 조병철), 건국대학교 민주동문회(회장 김희준), 10·28건대항쟁계승사업회(공동위원장 고용규 외 7인)가 한데 모여 결성한 단체다.
이들 단체는 지난 10월28일(건대항쟁 기념일) 교내에서 다함께 ‘건대항쟁 36주년 기념식’을 열고 “87년 6월 민주항쟁의 디딤돌 역할을 한 10·28건대항쟁을 이념과 정치색을 초월한 건국공동체 운동으로 승화시키겠다”고 선언했다. 이에 따라 건국대 총학생회는 최근 축제 기간에 교내에서 건대항쟁 자료 전시와 문화공연을 진행했으며, 동문회는 계승사업회와 연계해 진화위에 접수할 신청자(당시 피해자)를 모으고 있다.
건국대학교측 또한 항쟁 당시 경찰의 폭력진압에 의해 24억원(현재 시가 약250억원)의 물적 피해를 입은 만큼, 진화위 조사를 통해 사건 실체가 드러나면 이후 대응 방안을 다각도로 검토할 것으로 알려졌다.
건국대 정건수 총동문회장은 CNB뉴스에 “36년전 우리들의 모교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왜 그런 일이 발생했는지, 명명백백하게 진실이 밝혀져야 한다. 그에 따른 피해보상과 명예회복이 이뤄져 정정당당한 건대 역사로 기록되기를 바란다”고 밝혔다.
36년 전에 발생한 건대항쟁은 전두환 정권의 군홧발에 짓밟혀 끝났지만, 항쟁 참가자들의 육체적·정신적 고통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여전히 그들에게는 당시 군사정권의 재판정이 씌운 ‘폭도’라는 낙인이 찍혀있다. 지금이라도 진실규명과 명예회복이 절실한 이유다.
(CNB뉴스=도기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