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네의 재발견’…서울 5곳 특화공간
LG전자와 서울시의 동네상권 살리기
사진관·빨래방·사랑방…오색으로 무장
평범한 동네 활기 띨까? 한 달간 실험
움직임을 줄여야 하는 ‘자제의 시대’가 끝날 듯 끝나지 않습니다. 출타는 여전히 조심스럽습니다. 그래서 CNB뉴스가 대신 갑니다. 재밌고 새롭고 어쨌든 신선한 곳이라면 어디든가서 발과 눈과 손과 귀에 담은 모든 것을 전해드리겠습니다. ‘가보니 알게 된’ 또 다른 오감의 영역이 안방으로 배달 갑니다. 이번에는 동네상권을 띄우고 있는 실험무대에 다녀왔습니다. <편집자주>
“지역에 도움이 되려면 맛집부터 만들어야 해.”
지역 경제 활성화를 위한 첫 걸음은 무엇일까? ‘맛집 우선론’을 펼친 이는 요리 연구가 백종원 씨다. 그는 자신이 기획한 지역 관광자원 개발 관련 유튜브 콘텐츠 <님아 그 시장을 가오>에서 “아무래도 근처에 맛집이 있으면 연계해서 홍보하기 좋지”라며 이러한 주장을 뒷받침 했다. 전라남도 담양군 창평면의 국밥집에서 막창전골을 먹던 참이었다. 꼭 와야만 맛 볼 수 있는 대상이 있으면 외지인을 끌어들이기 유리하다는 것.
그런데 그 역할을 식당만이 할 수 있을까? 현재 서울에서는 새로운 실험이 진행되고 있다. 여러 동네에 다양한 찾을 거리 만들기다. 서울시, LG전자, 서울신용브증재단이 로컬상권 활성화를 목적으로 서울 다섯 개 구(區)에서 운영하는 신개념 가전체험공간 ‘어나더바이브(Another Vibe)’가 시험대다. 장소마다 주제가 다른데 짧게 특징을 나열하면 반려동물, 시음, 사진관, 빨래방, 사랑방 정도 된다. 이를 통해 조용한 동네가 들썩거릴 가능성을 엿보려는 것이다. 실험 기간은 이달 말까지로 한 달 간. 최근 스탬프 투어를 통해 다섯 곳에 발자국을 찍어봤다. 데시벨은 얼마나 올라갈 수 있을까.
길도 잃고 시간도 잃는 ‘장충’
지도 어플리케이션은 분명 이 길로 안내했다. 그런데 저 길이었다. 그곳의 동네라는 건 정말 가봐야 맞닥뜨릴 수 있었다. 스마트폰에만 의지해 길을 찾는 것은 무용했다. 동대문역사문화공원역과 충무로역 사이, 큰 대로에서 단 몇 미터 걸어 들어가니 개미굴처럼 좁은 길들이 뻗어 있었다. 들어갔다 나오기를 몇 차례. 분명 환청일 경로이탈음을 여러 번 듣고 나서야 까만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고졸한 세탁소 앞에 자리한 ‘어나더바이브 장충’에 그렇게 첫 번째 발 도장을 찍었다.
이곳의 주제는 사진관이다. 다이얼을 돌려 조작하는 TV와 전화기, 오래된 세탁기와 냉장고, 파란 날개의 선풍기 등 추억의 소품들로 꾸며 추억을 상기한다. LG전자의 옛 이름인 골드스타 제품들이라 시간이 더욱 역행하는 기분이 든다.
입구에는 '당신의 지금이 과거와 만났을 때'란 문구가 붙었다. 길을 잃다 겨우 들어간 곳에서 마주한 고풍스런 광경에 시간마저 잃었다. 그것은 개인적인 경험이 아니었다. 고색창연한 스튜디오에서는 20대로 보이는 여성 두 명이 마침 사진을 찍고 있었다. 금세 인화된 사진을 받아들고선 “처녀 적 엄마 같다”며 까르르 웃었다. 이곳에서는 무료로 ‘추억의 사진’을 찍어준다.
벽면에는 장충동의 역사를 세세하게 적어 놓았다. 지명의 유래부터 유독 노포 많은 이곳에서 이름난 식당들의 명단이 빼곡하다. 이 동네가 품은 얘기들의 알짬만을 압축한 소개판인 셈이다. ‘어나더바이브 장충’은 사진관이면서 동시에 역사박물관이다.
주민들 빨래터 ‘합정’
명패 붙은 주택들 사이를 걸었다. 지하철 2호선 합정역에서 약 10분. 목적지에 가까워질수록 상업 시설은 점점 보기 어려운 그야말로 주택가에 접어들었다. 그렇게 찾은 ‘어나더바이브 합정’ 테라스에는 막 빨래를 끝낸 여느 가정집처럼 옷가지가 걸려 있었다. 이 모습은 이곳의 정체성을 바깥으로 보여주는 상징적인 장면이기도 하다.
내부에는 LG전자 세탁기 여러 대가 나열돼 있었고, 그중 몇 대는 작동되고 있었다. 안에는 실제 빨래가 담겨 돌아가고 있었다. 매장 관계자는 “인근 주민들이 빨래를 맡기고 가면 건조까지 해서 돌려드린다”고 말했다.
빨래방 같지만 이곳의 본질적 역할은 따로 있다. 주제가 ‘재생(recycle)’이다. 낡거나 입지 않는 옷을 가져오면 예쁜 문양을 붙이는 등으로 탈바꿈해준다. 준비물이 없어도 된다. 티셔츠나 손가방을 제공받아 나만의 취향대로 꾸며볼 수 있다. 직원의 도움을 받으면 재봉틀 같은 전문적인 도구들을 사용할 수 있다. ‘합정’은 옷의 수명을 늘리고 이웃들과 친밀도를 높이는 시도로 요약 가능하다. 이곳에서 두 번째 스탬프를 찍었다.
사람과 반려동물의 사랑방 ‘버들’·‘선유’
어나더바이브 ‘버들’과 ‘선유’는 사랑방이다. 몰려들어 수다 떨고, 마구 활개를 치며 뛰노는 광경이 흔하다. 이 장면의 주인공은 사람과 반려동물이다.
구로구에 위치한 ‘버들’의 본래 주제는 ‘공유주방’이다. LG전자의 자세한 소개 문구를 그대로 옮기면 이렇다. “광파오븐, 인덕션 전기레인지, 식기세척기, 정수기 등 LG전자 주방가전으로 조리한 ‘밀키트’를 체험할 수 있다. LG 씽큐 앱으로 밀키트의 바코드를 찍으면 최적의 온도와 시간을 설정해주는 디오스 광파오븐의 ‘인공지능쿡’ 기능도 경험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장치들은 거들 뿐이다. 버들에서 먼저 눈에 띈 것은 중앙을 차지한 깔끔하게 정돈된 우드톤의 식탁들이었다. 간단한 음식과 함께 사담이 오가는 안락한 편의시설이다. 이곳 관계자는 “동네 어르신들이 커피 들고 와서 이야기 나누고 가기도 한다”고 설명했다.
주방은 안쪽에 마련됐다. 오븐, 인덕션 등으로 간편식을 조리해서 먹을 수 있다. 이용방법은 간단하다. 음식물 쓰레기를 남기지 말아야 하며 설거지와 분리수거는 스스로 해야 한다. 외부음식도 반입 가능하기 때문에 문턱 낮은 사랑방으로 부를만하다.
‘선유’는 반려동물의 사랑방이다. 다른 곳과 달리 야외공간도 적극 활용했다. 볕이 잘 드는 앞마당에 반려동물을 위한 놀이터를 조성했다. 내부는 ‘펫케어’ 기능을 탑재한 LG전자의 제품 홍보 공간이다.
매장 관계자는 “인근에 반려동물 인구가 많아서 이들을 위한 주제를 잡았다”고 설명했다.
나의 술 취향 찾아주는 ‘양재’
“이 와인은 샤인머스캣 향이 특징이고요, 이 와인은 양갈비와 특히 어울립니다.”
‘어나더바이브 양재’는 나도 몰랐던 나의 술 취향을 찾아주는 곳이다. 우선 설문부터. 나의 와인 취향을 이(二)지선다 형식으로 골라볼 수 있다. 가령 ‘와인 마실 때 함께 먹고 싶은 음식은?’에 대한 보기는 고기와 해산물이고 ‘와인을 즐기고 싶을 때 나의 선택은’에는 여러 사람과 함께와 가족과 함께가 선택지로 놓인다. 이렇게 사다리를 타고 내려가다 보면 나에게 어울리는 와인이 등장한다.
취향을 찾았다면 이제 맛 볼 차례. 여기서는 레드·로제·스파클링 등 다양한 와인을 시음할 수 있으며, 덤으로 전문가가 자세한 설명을 곁들여 준다. 깊은 술회에 술이 술술 들어가는 체험을 어느덧 하게 된다.
낮에는 와인으로 음용 기회가 제한되지만 저녁 무렵이 되면 맥주로 지평을 넓힌다. 프리미엄 수제맥주제조기 LG 홈브루로 내린 밀맥주, 흑맥주 등을 시음할 수 있다. 단, 음용은 한잔씩으로 제한된다. 이렇게 쌉쌀한 맥주를 마시는 것으로 마지막 스탬프를 찍었다.
총 이동거리 48.6km. 중구·마포구·구로구·영등포구·서초구를 거치는 여정은 마라톤 풀코스를 뛰어넘는 숫자를 남겼다.
그리고 또 남긴 것이 있으니 동네의 재발견이다. ‘어나더바이브’가 마련된 장소는 특별하지 않다. 오래된 골목길(장충), 주택가(합정과 선유), 지하철역 앞(버들), 소규모 상권(양재)이다. ‘000길’로 불리거나 SNS에서 요즘 뜨는 동네로 회자되는 곳은 없다. 그러기에 그곳에 살지 않으면 모를 신선한 정취를 발견하는 재미가 있다. 새로운 갈 거리를 매개로.
(CNB뉴스=선명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