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시절 어떤 모임에 나간 적이 있다. 국어국문학 전공자들이 모여 우리말을 연구하는 모임이었다. 말이 좋아 연구지, 여물지 않은 학생들이 모여 모국어에 대해 가타부타 떠들어대는 수준이었다. 그 모습이 딱했는지 지도교수님은 매주 과제를 내주었다. 한 주 동안 TV에서든 신문에서든 하물며 길 가다 보이는 간판에서든 잘못된 우리말 표기가 ‘적발’되면 사진으로 찍어오라는 것이었다. 그걸 한 데 모아 왜 틀렸는지를 따져보고 정확한 용례를 알아보면 한결 생산적인 모임이 되지 않겠냐는 뜻이었다.
과연 탁월한 교수님의 지시대로 모임은 체계가 잡혀갔다. 뜨겁기만 한 학생들은 별 희한한 말들을 많이도 수집해왔었다. 가장 실소가 나는 건 어떤 아파트 브랜드 이름이었다. 모음 하나 잘 못 써서 긍정적인 의미가 ‘삭제된다’는 뜻으로 바뀌어 있었다. 그 이름을 발견한 열혈 학생은 잠자코 있지 않았다. 그 회사에 전화를 걸어 고쳐야 한다고 알려주었다. 바쁜 담당자는 학생 말을 고분고분 들어주지 않았다. 요청은 가볍게 무시당했고 그 이름은 아직도 쓰이고 있다.
하지만 그 정도는 실수라며 용인할만한 수준이었다. 우리말과 외래어의 기묘한 혼용으로 탄생한 괴상한 단어들에 참가자들을 분개했다. 특히 영단어에 시도 때도 없이 접미사 '적(的)'을 붙이는 사례가 많았다. 메타포적이라느니 미스터리적이라느니. 은유하다, 기묘하다로 얼마든 바꿀 수 있는데 애써 힘을 낭비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있어 보이려는 심리가 발동해 그런 말들을 창조했을 것이란 추측만 있을 뿐이다.
졸업과 함께 모임은 와해됐지만 이상한 단어들을 살피는 버릇은 오래도록 남았다. 여기저기 더듬이를 들이대고 킁킁 거리는 와중에 유독 난해함과 몰이해로 점철된 단어들이 난립하는 분야가 눈에 들어왔다. 소비자와 밀접해 있으면서도 이상한 용어 남발로 듣는 이를 난감하게 만드는 이동통신업계다.
그 장면을 직설적으로 엿본 것은 어머니를 통해서였다. 어느 날 늘 차분하고 온화한 어머니가 붉어진 얼굴로 “다음에 다시 걸겠다”는 말을 남기고 전화를 끊는 모습을 본 적이 있다. 통신사에 물어볼 게 있었는데 도통 알아들을 길이 없어서 얼른 끊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뭐라고 했냐 여쭸더니 “어머님이 모회선이 되시면 결합 할인이 많이 들어가고 리워드도 충분히 넣어드린다” 정도만 당장 기억난다 하셨다. 더 많은데 다른 말들은 한국말 같지도 않아서 기억도 나지 않는다고.
이때부터 이쪽 업계에 더듬이를 집중적으로 들이댔다. 언제까지 이러나 보자. 이미 구축된 특수한 용어의 세계를 소비자가 바꿀 수 있는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모임에서 만난 열혈 학생처럼 나서봤자 묵살당할 게 뻔했다. 그런데 이게 웬걸? 얼마 전부터 통신사들이 자발적으로 통신용어를 알기 쉽게 고치는 자정 노력을 하기 시작했다. SK텔레콤은 통신·마케팅 용어를 순화해 정리한 '통신정음'을 전국 유통 매장에 배포하는 캠페인을 벌였고 LG유플러스는 홈페이지에 고객이 직접 어려운 단어를 쉬운 단어로 바꿔 제안할 수 있는 창구를 마련했다. 이렇게 해서 바꾼 용어들을 보면 훨씬 자연스럽게 와 닿는다. 매핑→연결, 무선 AP→와이파이 공유기, 리워드→경품 등이다. 전자가 익숙한 사람도 많겠지만 후자로 바꾼다고 해서 혼란을 겪을 일은 아니다. 한결 보편성을 띤 단어들로 순화된 것이다.
초대 문화부장관을 지내며 빛나는 업적을 숱하게 남긴 고 이어령 선생은 이런 말을 남겼다. “문화부 장관으로서 가장 잘한 일은 ‘노견(路肩)’을 ‘갓길’로 바꾼 것이다.” 행정 용어 하나 바꾼 것을 최고의 업적으로 자평한 것이 지나친 겸양으로 들리기도 하지만 그만큼 언어를 보편적으로 바꾸는 일이 중요하다는 뜻일 것이다. 입에 잘 붙지도 않은 노견은 이제 아무도 쓰지 않는다. 쉬운 말로 바꿀 수 있으면 아무렴 바꾸는 것이 낫다.
(CNB뉴스=선명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