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지구’ ‘젊은 롯데’ 향한 꿈
전 계열사 친환경 경영 ‘총력전’
핵심전략은 ESG와 기업문화혁신
#1. 서울 한남동 구찌 가옥 매장.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이 회색 운동화에 화려한 구찌 모피코트를 걸치고 있다. 언밸런스한 이 모습이 우스꽝스러워 보이기도 하지만 왠지 분위기는 예사롭지 않다. 신 회장 곁에선 디자이너의 묘한 웃음이 뭔가를 말하고 있는 듯하다.
#2. ‘루시’라는 이름의 매력적인 20대 여성이 갖은 자태를 드러내고 있다. 화려한 블라우스에서 수수한 청바지까지 다양한 패션을 뽐낸다. 어쩌면 옷들이 이렇게 하나같이 몸에 쏙 맞을까? 그녀의 수줍은듯한 옅은 미소는 뭇 사내들을 두근거리게 한다. (CNB=도기천 기자)
모피코트에 운동화가 어울려?
첫 장면은 신동빈 회장이 지난달 2일 구찌 가옥 매장을 찾았을 때 모습이다. 이날 신 회장은 이 매장에 전시된 모피 코드를 걸쳐 입고 ‘특별한’ 운동화를 신었다. 그리고는 곁에 국내 최고의 디자인 전문가로 알려진 배상민 롯데 디자인경영센터장을 세웠다. 배 센터장은 이 모습을 고스란히 카메라에 담아 자신의 SNS에 올렸다.
이 장면에는 여러 의미가 담겨있다. 평소 단정한 정장 차림을 선호하던 신 회장이 파격적인 모습을 공개한 데는 ‘기업문화 혁신’이라는 코드가 숨어있다. 롯데 구성원들은 “사진에는 형식을 깨고 자유롭게 사고하라는 신 회장의 메시지가 담겨있는 듯하다”고 말한다.
특히 운동화의 정체는 더 놀랍다. 고가 브랜드가 아닌 국내 한 패션 스타트업이 만든 제품이다. 친환경 브랜드 LAR가 제작했으며 가격은 9만7000원선. LAR는 롯데케미칼이 주관한 ‘프로젝트 루프’를 통해 운동화 제작에 참여했다. 루프(LOOP)는 플라스틱 자원선순환 프로젝트다. LAR는 롯데 측이 수거한 폐 폐트병을 원사와 원단으로 재탄생시켜 친환경 운동화를 만들었다.
신 회장이 이 운동화를 신은 뒤부터, 하루 평균 200만원에 불과했던 매출은 5000만원으로 25배나 뛰었다. 편의점 세븐일레븐에서 한정판으로 출시하는 등 ‘신동빈 운동화’로 불리며 인기몰이 중이다.
신 회장이 이 운동화를 통해 말하려 했던 것은 ‘ESG 경영’이다. ESG는 환경(Environment)·사회(Social)·지배구조(Governance)의 머리글자를 딴 단어로, 기업활동에 친환경, 사회적 책임 경영, 지배구조 개선을 도입해 지속가능한 투명경영을 하자는 의미다.
이 중에서도 E(환경)는 롯데그룹의 경쟁력과 직결된 과제다. 수많은 백화점·마트·쇼핑몰을 거느린 국내 1위 유통기업인 롯데로서는 각종 포장지와 제품에 포함된 플라스틱을 처리하는 게 급선무다.
신 회장은 이를 모두 ‘친환경’으로 바꿔야 생존할 수 있다고 믿는다. 소비자들이 탄소 배출로 무너진 자연을 목도(目睹)하고 있는 마당에, 롯데몰이 탄소 덩어리인 포장재로 덮여있다면 지속가능 성장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가상인간 루시, 파워 인플루언서 등극
두 번째 장면에 등장한 매력적인 ‘루시’는 사실 인간이 아니다. 롯데홈쇼핑이 자체 개발한 가상 모델이다. 실제 촬영한 이미지에 가상의 얼굴을 합성하는 방식으로 지난해 9월 세상에 처음 모습을 드러냈다. 피부의 솜털까지 표현한 하이퍼리얼리즘 모델링 기법이 적용돼, 실제 인간과 차이를 느끼기 어렵다.
루시는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서 인플루언서로도 활약 중이다. 현재 2만5000명의 팔로워를 보유하고 있다. 최근에는 쇼핑·패션 문화복합공간 ‘무신사 테라스’에서 파워 인플루언서를 대상으로 진행한 체험 마케팅에 참여하기도 했다.
루시는 롯데그룹 혁신경영의 대표적인 예로 여겨진다. 시공간을 초월해 실시간으로 고객과 소통하고, 가상현실(VR)장비를 통해 오프라인 쇼핑을 체험하는 미래 쇼핑 트렌드의 중심에 루시가 있기 때문이다. 롯데 관계자는 CNB에 “루시의 움직임, 음성 표현 등을 인간과 비슷한 수준까지 높여 쇼핑 서비스는 물론 가상 쇼호스트 임무까지 부여하겠다”고 말했다.
“플라스틱 변신은 무죄?” 페트병의 부활
모피코트에 운동화, 루시의 미소… 이 2개의 장면은 신동빈이 꿈꾸는 ‘젊은 롯데’를 상징한다. 구체적인 방법론은 ESG와 기업문화혁신이다.
롯데그룹은 신 회장의 특명에 따라 계열사별로 ESG 경영에 속도를 내고 있다. 신 회장은 지난 7월 ‘2021 하반기 사장단 회의’에서 ‘ESG 경영 선포식’을 열고 전사적 ESG 경영 강화 의지를 대내외에 천명한 바 있다. 친환경 경영을 10년 단위로 설정해 2040년 탄소중립을 달성하겠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롯데그룹은 롯데지주를 포함한 상장사 10곳에 ESG위원회를 신설했다. 동시에 ESG 경영 성과를 담은 지속가능경영보고서 발간을 모든 상장사에 의무화했다. 모든 상장사(롯데리츠 제외)가 이사회 내에 ESG위원회를 설치하고 지속가능경영보고서로 ESG 정보를 공시하는 그룹은 롯데가 처음이다.
또한 롯데그룹은 지난 9월부터 유통·화학 계열사를 중심으로 ‘플라스틱 선순환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다. 이는 롯데지주, 롯데케미칼, 롯데마트, 세븐일레븐 등이 폐페트병의 분리수거, 가공·재생산 등을 협업하는 과정이다. 롯데마트와 세븐일레븐이 페트 회수 로봇을 각 점포에 배치해 플라스틱을 수거하고, 이렇게 모인 페트를 롯데케미칼이 친환경 제품으로 다시 탄생시키는 식이다.
이와 별개로 계열사별 친환경 활동도 활발하다.
롯데칠성음료는 거래처에서 소비된 아이시스 생수 페트병을 직접 회수한 후 에코백, 유니폼 등 업사이클링 제품으로 재탄생시키는 자원순환 캠페인을 펼치고 있다.
세븐일레븐은 지난달 12일부터 롯데알미늄, 플랜드비뉴와 함께 세븐일레븐 산천점(서울 용산구 소재)에서 자판기 형태의 친환경 리필 스테이션 ‘그린필박스’ 운영을 시작했다. 그린필박스는 개인 리필 용기에 세제 등을 충전해 구매하는 방식이다. 산천점에서 시범운영 뒤 서비스 점포를 순차적으로 확대할 계획이다.
롯데면세점은 국내 면세업계 최초로 지난 9월부터 종이영수증 대신 모바일 등 스마트기기를 통해 받을 수 있는 전자영수증을 발급하고 있다. 앞으로 해외점으로도 확대할 계획이다.
이밖에 롯데케미칼은 친환경 에너지인 수소를 미래먹거리 성장전략으로 설정했다. 2030년까지 약4조4000억원을 단계적으로 투자해 국내 수소 수요의 30%를 공급하겠다는 친환경 수소 성장 로드맵 ‘Every Step for H2’에 속도를 내고 있다.
“젊은 롯데는 도전하는 것”
여기까지가 ‘젊은 지구’를 꿈꾸는 ESG 전략이라면, 신 회장이 걸친 모피코트는 ‘젊은 롯데’를 상징한다.
신 회장은 수직적이고 보수적인 롯데의 기업문화를 혁신하고 있다. 롯데지주 내 디자인경영센터를 신설하고, 초대 센터장에 국내 최고의 디자인 전문가로 꼽히는 배상민 전 카이스트 교수를 선임한 것이 대표적인 예다. 배 센터장을 통해 창의적 DNA를 그룹 전반에 전파하겠다는 게 신 회장의 복안이다. ‘운동화에 모피코트’ 사진 속에 배 센터장이 등장한 것도 이 때문이다.
‘젊은 롯데’를 향한 신 회장의 의지는 조직문화 개선에서도 분명하게 읽힌다. 신 회장은 최근 롯데지주 내에 신사업 추진을 위한 조직을 강화하고 관련 전문가들을 영입했다. ESG경영혁신실 산하에 헬스케어팀, 바이오팀을 신설하며 40대 상무급 임원들을 팀장으로 임명했다. ‘젊은 피’를 전면에 세워 과감히 신사업을 개척하겠다는 의도다.
또 가상인간 ‘루시’로 상징되는 메타버스 플랫폼 개발, IT 기반의 솔루션 제공 등 비대면 소비 트렌드를 주도할 디지털 혁신에도 공을 들이고 있다. 최근 MZ세대에게 각광받는 힙합 아티스트 크루인 DPR과 협업해 CM송을 도입한 것도 이런 맥락에서다. 이 영상은 유튜브에 공개된 지 10일 만에 조회수 300만회를 기록했다.
“새로운 미래는 과거의 연장선상에 있지 않다.” (신 회장의 최근 사장단 회의 발언 중)
신 회장은 롯데 60년사(史)의 중심에서 다시한번 변혁을 꿈꾸고 있다. 그의 도전의 끝은 어디일까?
(CNB=도기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