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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수첩] 사람이 싫어서가 아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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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선명규기자 |  2021.07.08 09:48:11

롯데백화점은 지난해 '혼자쇼핑' 서비스를 선보였다. 고객이 비치된 가방걸이나 스티커를 부착하고 돌아다니면 혼자 쇼핑 하겠다는 신호다. 직원들은 이러한 표식을 한 고객들을 따로 응대하지 않았다. 이 서비스는 '혼쇼'를 원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특히 인기가 많았다. (사진=롯데쇼핑)

<귀여운 여인>은 멜로 영화의 고전이다. 리차드 기어가 줄리아 로버츠에게 고백하는 순간이 명장면으로 꼽힌다. 하얀색 고급 리무진의 선루프를 열고 올라온 남자가 꽃을 든 채 여인을 응시하는 그때다. 남자가 봐도 반할 만큼 멋진 연출이다.

고등학교 다닐 때 친구 ‘꼴뚜기’는 나중에 프로포즈할 때 꼭 그 장면을 써먹겠다고 했다. 이제 막 수염이 거뭇거뭇 나기 시작한 천둥벌거숭이 아이들은 ‘꼴꾸기’의 포부를 그냥 넘기지 않았다. “차에 넌 반건조 꼴뚜기가 되고 싶냐”며 키득댔다. 마흔 살 넘은 꼴뚜기는 아직 미혼이다. 평생의 짝을 아직 못 만나서인지, 리무진 살 돈을 모으지 못해서인지는 모르겠다.

나는 꼴뚜기와 달랐다. 백마 탄 왕자라거나 멋지게 사랑을 표현하는 로맨틱한 상황 말고 다른 장면에 꽂혔었다. 값비싼 명품 브랜드 매장에서 줄리아 로버츠가 극진한 대접을 받으면서 쇼핑을 하는 대목이다. 직원들은 이 품격있어 보이는 손님이 어떤 상품을 마음에 들어 할까, 전부 달려들어 이것저것 갖다 바친다. 구두도 신겨주고 어울릴만한 액세서리들을 들이밀어 보며 선택을 기다린다. 쉬엄쉬엄 먹어가며 고르라고 피자를 권하기도 하니 상전이 따로 없다. 부러웠냐고? 그럴 리가.

여인이 앞서 찾았을 때는 그러지 않았다. 천양지차 대우다. 이 ‘거리의 여인’이 야시시한 차림으로 갔을 때 돌아온 건 푸대접이었다. 아니, 외려 무관심에 가까웠다. 얼마냐고 묻자 “정말 비싸다”고 할 뿐이었다. 그러다 짠하고 나타난 리처드 기어 덕분에 큰돈 쓰러 온 큰손 손님으로 돌변해 돌아오자 태도가 바뀐 것이다. 직원들은 그에 걸맞은 대우를 하려 몸부림치는데, 그걸 보는 내내 불편했다.

남친 덕에 팔자를 고쳤다거나 가진 재력으로 여친을 공주님으로 둔갑시킨다는 신데렐라 스토리도 그랬지만 결국은 직원들의 태도였다. 옷가게에서 투명인간이 되고픈 이라면 알 것이다. 대접은 황송하지만, 소심쟁이들은 호의로부터 숨고 싶을 때가 많다.

몇 해 전 일이다. 어느 화장품 가게가 내놓은 신박한 아이디어를 보고 전국 확대 운동이라도 벌이고 싶었다. 한쪽엔 ‘도움이 필요해요’, 다른 쪽엔 ‘혼자 볼게요’라고 적힌 바구니를 입구에 비치했다. 구분하는 요소는 색이다. 특정색 바구니를 들고 매장을 돌아다니면 알아서 쇼핑하겠다는 신호다. 직원이 먼저 나서서 안내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다. 얼마나 혼자 쇼핑을 하고 싶어하는 소비자가 많았으면 그런 제도가 나왔나 싶었다. 가게에서 무관심을 갈구하는 이가 이렇게나 많았던 것이다. 말을 두서없이 하다가 아무 제품이나 사서 나오는 게 일쑤였던 나는 그 브랜드의 충성고객이 됐다. ‘혼자 볼게요’ 바구니를 애착인형처럼 들고 다니면서.

이제는 한 차원 높아졌다. 바구니도 필요없다. 직원이 아예 상주하지 않는 매장들도 나타났다. 말할 대상도 없고 들을 일도 없다. LG전자는 9개 LG베스트샵을 오후 8시 30분부터 자정까지, 현대자동차는 서울 송파대로 전시장을 평일은 저녁 8시부터, 주말 저녁 6시 30분부터 저녁 10시까지 '무인 전시장'으로 운영한다고 한다. 문을 열어둔 채 직원들이 퇴근하기 때문에 간단한 인증 절차를 밟고 들어온 방문객들은 자유롭게 제품을 써볼 수 있다. 대구 동성로에 위치한 ‘KT셀프라운지 매장의 공간 절반은 직원이 상주하지만, 반은 손님이 알아서 휴대전화를 개통하고 요금을 납부하는 셀프 매장이다.

이들은 시간대나 공간에 따라 직원이 있고 없는 ‘하이브리드’ 형태다. 혼자 쇼핑이 가능하지만 사람의 도움이 필요하면 받을 수도 있다. 소비자들의 성향을 세심하게 따지는 그 배려가 심금을 웃게 만든다.

소심쟁이들은 그래도 걱정한다. 불필요한 오해를 살까 전전긍긍이다. 직원에게 불편을 주려는 것이 아닌데. <인사이드 아웃>의 ‘소심이’가 항변을 한다면 아마 이런 말을 할 것 같다. “사람이 싫어서가 아니라 대하는 게 서툴러서 라고요”

(CNB=선명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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