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상과 현실 넘나드는 ‘메타버스’
내 아바타가 새차 타고 거리 활보
누구와도 금세 친해져 ‘인싸’ 인증
‘안 가고도 가는’ 복제된 신세계
직접 가는 것이 안 되면 방법은 하나다. 비대면이다. 얼굴 마주 않곤 아무 일도 못할 줄 알았다. 코로나 이전까지는 그랬다. 하지만 비대면의 지평은 생각보다 깊고 넓었다. 영화 인터스텔라 대사처럼 “늘 그랬듯이, 답을 찾아”가며 얻어낸 성과는 이제 시작에 불과하다. 이에 CNB가 달라진 산업 패러다임을 분야별로 소개하고 있다. 이번 편은 제3지대에 3차원 가상세계를 구축하는 기업들 이야기다. (CNB=선명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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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KT·LG헬로비전·CJ올리브네트웍스…‘언택트 나눔’ 나선 기업들
③ “이게 돼?” SKT·KT·LGU+ ‘가상여행’ 떠나보니
⑤ 총알배송보다 빠르다? ‘온-오프라인 사이’ 비집는 픽업
⑥ 엔씨소프트의 ‘방구석 콘서트’…문화 콘텐츠 브랜드 ‘피버’
⑨LG유플러스·엔씨소프트, ‘프로야구 앱’을 켰다…그곳은 경기장
⑩ 손가락으로 미술관 거닐다…LG전자·KT&G ‘온라인 전시회’ 감상법
⑪ “오세요”에서 “갑니다”로…‘백화점 식품관’도 배달 시대
찢어진 진(jean)에 항공점퍼, 옆을 바짝 올린 모히칸 헤어스타일, 여기에 링 귀걸이로 마침표를 찍었다. 신차를 시승하러 가는 길. 유행을 선도하는 패셔니스타 차림으로 거리에 나서 대기하던 새빨간 승용차에 올라탔다. 그러나 내처 달리기엔 어쩐지 답답한 도심. 드라이빙존으로 순간이동해 서킷을 활보하는 스포츠카처럼 누볐다.
현실에선 언감생심인 스타일 감행도, 약속없이 새로 나온 차를 잘 닦인 도로에서 타보는 것도 여기에선 가능하다. 이곳은 다른 차원의 공간, 메타버스(가상과 현실세계를 뜻하는 Meta와 Universe의 합성어)다.
지난달 25일 현대자동차가 네이버제트 메타버스 플랫폼 ‘제페토’에서 시작한 쏘나타 N라인 시승 체험에 앞서 캐릭터를 설정했다. 상상만 하던 스타일로 또 다른 나의 자아인 아바타를 창조했다. 자유분방한 옷을 입고 자유롭게 차를 몰았다. 핸들 모양 아이콘을 조절해 전진과 후진을 오가며 차를 빼고, 곡선 도로를 부드럽게 내달렸다. 아무 때나 접속해 즐기는 모바일 레이싱 게임처럼 시간과 공간의 제약없이 실제와 똑같은 승용차를 운전해 본 것이다. 모든 과정은 따로 예약을 하거나 자동차 판매장 방문 없이 접속만으로 가능했다. 엄격한 규칙이 적용되지 않는 ‘제3 지대’이기에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현대차 관계자는 “MZ세대가 주된 사용자인 가상세계 플랫폼까지 고객경험을 확장해 신기술을 선도하는 브랜드 이미지를 구축하겠다”며 “향후에도 차종을 확대해 다양한 글로벌 플랫폼에 지속적으로 구현해 나갈 계획”이라고 말했다.
비대면 힘입어 다른 세계로 ‘씽씽’
비대면 기조가 메타버스의 가속 페달을 밟고 있다. 코로나 이후 이동에 제동이 걸리고, ‘함께’가 어려워지자, 가상세계로 달려가는 메타버스에 다중접속자가 대거 올라타고 있다.
그 끝엔 만남의 장이 있다. 예컨대 응원하는 스포츠 구단의 선수와 동질감을 가진 팬들이 한자리서 집결할 수 있다.
지난달 22일 프로야구 ‘kt wiz’ 소속 황재균 선수의 라이브 팬 미팅이 진행된 장소는 KT가 제페토에 마련한 ‘수원 케이티 위즈 파크’였다. 팬과 선수는 가상세계서 묻고 답하며 소통했다.
가상 야구장에선 금단(禁斷)도 뛰어넘는다. 평소 관중의 출입이 금지된 곳인 라커룸과 불펜에 들어갈 수 있다. 나의 분신인 아바타가 대신 간다. 실제 선수들이 어떤 공간서 경기를 준비하고 어디서 공을 던지며 몸을 푸는지 가서 볼 수 있다.
소소한 재미도 있다. 아바타로 활보하는 동안 다른 팬들과 종종 마주치는데, 문자로 구단 소식 등을 메시지로 주고받는다. 여기에선 일면식이 없어도 서로 알은체를 하니 모두가 ‘인싸’다.
메타버스의 유용한 점은 공간 복제다. 안 가본 곳을 가게 해준다.
최근 임신 계획을 세우며 병원을 알아보던 김은주(가명)씨는 메타버스를 참고수단으로 삼았다. 의료진만큼이나 시설 역시 꼼꼼히 따지는 김 씨는 “사진만으론 답답함이 있더라. 근데 내부를 구석구석 걸어가며 눈으로 확인하니 궁금증이 많이 해소됐다”고 말했다.
그가 미리 찾은 곳은 제페토 내 차의과대학교 일산 차병원. 지난달 17일 이 병원은 개원 1주년을 기념해 가상공간에 ‘분점’을 냈다. 6층 분만실, 산과, 초음파실, 7층 이벤트홀, 지하 1층 행정 사무실을 똑같이 구현했다.
차병원 측은 “코로나로 인해 방문이 어려운 직원 가족들과 고객 등을 대상으로 병원 내 가상공간 체험 기회를 제공하기 위해 마련했다”고 설명했다.
‘디지털 전환’ 이통사의 새 먹거리
기업들은 메타버스를 미래 먹거리 중 하나로 점찍고 투자는 물론, 합종연횡도 활발히 추진하고 있다. 특히 통신업 너머로 사업분야를 확장하며 디지털 혁신을 추진 중인 이동통신사들이 활발하다.
SK텔레콤은 지난달 비추얼 프로덕션 전문 스튜디오 ‘비브스튜디오’와 사업 협력 및 지분 투자 계약을 체결했다. 이를 통해 이 회사가 보유한 증강현실 앱 점프AR, 버추얼밋업(Virtual-Meetup), 점프스튜디오 등과 비브스튜디오스의 3D 영상 제작 기술을 결합해 본격적으로 메타버스 서비스 경쟁력 강화에 나선다는 계획이다.
KT는 대한민국 메타버스 생태계 조성을 위해 관련 정보통신기술(ICT) 기업들과 ‘메타버스 원팀’을 결성했다.
‘메타버스 원팀’에는 KT, VR과 AR, MR 관련 사업을 하는 딜루션, 버넥트, 코아소프트, 위지윅스튜디오, 스마일게이트스토브를 비롯한 9개 기업과 국내 VR 및 AR 기업들의 연합체인 한국가상증강현실산업협회가 참여한다.
이들 기업과 기관은 지속적이고 정기적인 교류를 통해 대한민국의 메타버스 기술을 발전시키고 서비스를 확대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하기로 했다. 또 ‘메타버스 원팀’ 참여 기업도 계속 늘려나갈 예정이다.
LG유플러스는 지난달 의장사를 맡고 있는 세계 5G 콘텐츠 연합체 ‘Global XR Content Telco Alliance’에 미국 AR 기업 ‘트리거(Trigger Global)’가 합류했다고 밝혔다. VR 영역에서 두각을 드러낸 회원사가 중심인 상황에서, 새로운 분야의 전문사를 들이며 콘텐츠 제작 가능 범위를 넓힌 것이다.
LG유플러스 측은 “메타버스로 대표되는 VR과 AR 콘텐츠를 균형 있게 선보이며 XR 산업의 고른 성장을 추진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고 밝혔다.
“비즈니스 가치, 메타버스서 높여야”
전문가들은 기업들이 메타버스에 적응하고 적극 도입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최근 대한상공회의소가 '메타버스 시대―상상, 현실이 되다'를 주제로 진행한 온라인 강연에서 해당 분야 권위자인 김상균 강원대 교수는 "과거에는 기업들이 자본력을 바탕으로 오프라인 쇼핑몰, 생산라인 강화에 집중했다“면서 “이제는 현실 공간의 비즈니스 가치를 가상공간인 메타버스를 통해 더 높일 방법을 고민해야 할 때”라고 밝혔다.
김 교수는 증강현실로 조립이 끝난 가구를 집 내부에 대입해볼 수 있는 ‘이케아 플레이스’ 앱을 예로 들며 “이런 방식이 보편화되면 사람들이 밀집하는 공간에 전시장이나 쇼룸을 만들 필요가 없어진다”고 했다. 가상공간에서 새로운 판매의 장을 열 수 있다는 얘기다.
경계해야 할 것은 근시안적 접근. 그는 “메타버스를 기술적, 비즈니스 모델의 한 형태로 단기간만 바라보고 수익성을 높이는 전략보다는, 최근 화두인 ESG(Environmental, Social and Governance) 측면에서 고객과 공동체의 가치를 높이는 방향으로 함께 만들어가는 게 현명한 접근”이라고 조언했다.
(CNB=선명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