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비자단체 소송제’는 집단소송제 前단계
손해배상 의무 없고 소송허가에 1년 걸려
제도 보완·집단소송제 도입 등 대안 절실
내년 대선을 앞두고 각종 경제공약이 쏟아지면 여야 간 입법 경쟁이 한층 치열해지고 있다. 이런 흐름을 타고 그동안 국회에서 잠자고 있던 각종 민생․경제법안들이 다시 기지개를 켜고 있다. 이에 CNB는 정치권의 주요 기업정책을 분야별, 이슈별로 나눠 연재하고 있다. 이번 주제는 ‘소비자단체소송’ 활성화를 둘러싼 논란이다. <편집자주>
공정거래위원회가 사실상 유명무실한 ‘소비자단체소송’의 실효성을 확보하기 위한 관련법 개정을 추진하고 있다.
지난달 입법예고를 마친 ‘소비자기본법 일부개정안’은 소비자단체소송을 수행할 수 있는 단체에 소비자 단체의 협의체를 추가하고, 소송 지연을 초래했던 사전 허가 절차를 없애는 내용을 담았다.
이 같은 개정안이 나온 배경은 뭘까. 일단 소비자단체소송은 소비자기본법에서 정한 일정한 자격을 갖춘 단체가 소비자를 대신해 사업자의 위법 행위에 대해 소비자 권익침해의 금지 혹은 중지를 청구할 수 있도록 하는 제도다. 사후 금전 배상을 목적으로 하는 집단소송과는 달리 사전 예방을 목적으로 한다.
실제로 지난 2015년 12월에 한국소비자연맹은 SK텔레콤, KT, LG유플러스 등 이동통신 3사를 대상으로 소비자단체소송을 제기했다. 정해진 기간 내 신분증 미제출시 계약해지권 행사를 하지 않는 것으로 보는 것이 약관규제법 위반이며, 전화권유판매·인터넷판매·홈쇼핑 등을 통한 핸드폰 구매 및 개통 시 철회권을 배제하는 것은 전자상거래법과 방문판매법 위반으로 소비자 권리를 침해하고 있다는 것이 청구취지다.
15년간 8건 소 제기…소송허가에만 1년
그러나 이 같은 소비자단체소송은 손으로 꼽을 정도다.
지난 2006년 이 제도가 도입됐지만 이통 3사 건을 포함해 ▲하나로텔레콤 개인정보 무단사용 사건 ▲티머니카드 환불 거부 사건 ▲한국전력 누진요금 부과사건 ▲호텔스닷컴 청약철회 제한 사건 등 현재까지 8건의 소 제기에 그치는 상황이다.
즉, 제도의 활용이 극히 저조하며 활성화가 안 되고 있다는 얘기다.
공정위·국회 정무위원회 등에 따르면 법원의 허가(공익상 필요성 등)가 발목을 잡고 있다. 현행 소비자단체소송은 별개의 절차를 통해 법원으로부터 소송허가를 받아야만 본안 소송 및 가처분을 할 수 있다. 사정이 이러다 보니 소송 전 허가를 받는 데에만 약 1년의 시간이 소요되기도 한다.
소를 제기할 수 있는 단체가 제한되고 있다는 점도 활성화의 저해 요인이다. 현행법에 따라 단체소송을 제기할 수 있는 제소적격 단체는 공정위에 등록한 소비자단체, 한국소비자원, 대한상공회의소, 중소기업협동조합중앙회, 전국경제인연합회, 무역협회 및 비영리민간단체로 규정된다.
하지만 공정위 등록 소비자단체 가운데 정회원수가 1000명 이상 등 소송수행 역량 조건을 걸어놔 이를 갖춘 단체는 한국소비자연맹 등 소수에 불과하다.
이에 공정위는 개정안에서 법원 행정처와 협의해 소송 지연과 단체소송 활성화 저해요소로 지적돼 온 소송허가 절차를 폐지함은 물론 소비자 권익의 직접적인 침해 발생의 경우뿐만 아니라 ‘소비자 권익의 현저한 침해가 예상되는 경우’에도 단체소송을 청구할 수 있도록 하는 예방적인 금지청구권도 도입했다.
아울러 ‘소비자 단체의 협의체’도 공정위가 소송 수행 단체로 지정해 고시하는 절차를 거쳐 단체소송 관련 활동을 할 수 있도록 문을 넓혔다.
현재 소비자 단체 협의체로 여러 단체가 연대한 ‘한국소비자단체협의회’ 등이 있지만 단체의 정회원수가 1000명 이상이라는 요건에 충족하지 않아, 소비자기본법 상 소비자단체소송을 제기할 수 없었는데 법률상 자격을 부여토록 한 것이다.
공정위는 이러한 제도개선을 통해 소비자 피해 확산을 차단하는 단체소송의 본연의 기능을 제대로 작동시킬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며, 국무회의 등을 거쳐 ‘소비자기본법 개정안’을 국회에 제출할 계획이다.
재계 “소송남발 우려” vs 시민단체 “집단소송제 도입해야”
이 같은 움직임과 관련해 ‘찬·반’은 극렬하게 엇갈리고 있다. 경제계는 손사래를 치고 있는데 무엇보다 남소(濫訴)의 우려다.
한국경영자총협회(이하 경총)는 예방적 금지청구권 도입 등으로 소송이 남발되고, 이는 소송 대응능력이 약한 중소기업에 더 큰 부담으로 작용할 것이라며 고개를 젓고 있다.
소비자단체를 통한 기획소송과 같은 제도 악용 및 소 제기와 함께 신청된 가처분(보전처분) 인용 시 소송 종료까지 상품 생산 및 판매가 중단될 수 있으며, 대외적으로 기업에 대한 신뢰훼손 등 사업자의 피해가 예상된다는 입장이다.
또, 유사한 제도를 운영하고 있는 일본과 달리 소비자기본법 상 단체소송 제기를 통한 이익추구 금지 등 제도 악용 방지규정이 없다고 지적했다.
일본 소비자계약법은 소비자단체의 단체소송과 관련해 금지청구권의 남용금지의무, 금지청구 상대방으로부터 기부금·찬조금 등 재산상 이익의 수령금지의무 등을 규정하고 있다는 설명이다.
경총은 현행 제도의 문제점으로 제시된 소송지연은 신속한 재판 절차가 진행될 수 있도록 일부 규정 보완 시 개선이 가능하다고 보고 있다. 더불어 소송허가로 인한 사업자의 소송 ‘패소 오인’보다 제도 남발과 악용으로 인한 사업자의 피해와 시장의 혼란이 더 큰 부담이라며 현행 제도를 보완하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는 의견을 모아 공정위에 전달했다.
한국상장회사협의회도 최근 영미법계의 일반적 집단소송제 도입도 논의 중인 상황에서 대륙법계의 소비자단체소송제까지 확대 시 기업 체력 고갈로 인한 글로벌 경쟁력이 약화될 것이라는 의견을 냈다.
반면, 소비자단체에서는 경제계가 근거 없는 우려를 확산시켜 개선을 저해하고 있다며 날을 세우고 있다.
한국소비자단체연합(이하 한소연)은 경총의 주장과 관련해 소비자보다는 기업의 이익을 우선시하는 구시대적인 발상으로, 소비자주권확립을 위한 소비자기본법의 개정을 방해하고 시간을 끌기 위한 전략이자 기우이며 엄살에 불과하다고 일갈했다.
한소연은 금융소비자연맹·소비자와함께·해피맘·건강소비자연대·한국소비자교육지원센터·금융정의연대·소비자권리찾기시민연대·의료소비자연대·한국납세자연맹 등 9개 단체가 연대한 협의체다.
오히려 추진중인 소비자법 개정안이 기대에 못 미친다는 시각도 있다.
한소연 부회장직을 맡고 있는 조연행 금융소비자연맹 회장은 CNB에 “소비자단체소송은 소비자가 피해를 입거나 또는 예상되면 해당 상품을 팔지 말라는 등 행위중지만 요구할 수 있다”고 전제한 뒤 “피해구제의 실효성을 가지려면 손해배상이 이뤄져야 하는데 이런 점이 아쉬워 궁극적으로 집단소송제 도입이 이뤄져야 한다”고 말했다.
즉, 행위금지만 있지 손해배상이 없기 때문에 소비자들은 실질적인 소송의 실익이 없고, 기업은 소비자피해를 주는 행위를 중지만 하면 되기 때문에 손해도 발생하지 않는다는 것.
집단소송제는 일부 피해자가 가해자(기업)를 상대로 소를 제기해 그 손해를 인정받으면, 나머지 동일한 피해자들도 별도의 소송 없이 그 판결로 인해 피해를 구제받을 수 있는 제도다. 법무부는 국정과제의 일환으로 도입을 추진하고 있고, 국회에도 관련 법안이 제출돼 있지만 논의에 진전이 없는 상황이다.
조 회장은 “형해화된 소비자단체소송제도에 대해 보강 수단을 꾀하고 있지만 손해배상 없이는 의미가 없어서 활성화 여부는 부정적”이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제계가 갖가지 이유를 들며 반대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라고 꼬집었다.
(CNB=이성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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