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생본능 살리는 거대한 박스모형
사자가 공격해 순식간에 쓰러트려
LG전자, 전자제품 박스 대거 기부
환경·생태·문명의 독특한 순화구조
모이지 말고 움직임도 줄이고 마스크 없이는 대화도 금해야 하는 ‘자제의 시대’. 출타는 왠지 눈치 보입니다. 그래서 CNB가 대신 갑니다. 재밌고 새롭고 어쨌든 신선한 곳이라면 어디든가서 발과 눈과 손과 귀에 담은 모든 것을 전해드립니다. 이번 편은 버려지는 가전제품 박스가 동물들의 장난감으로 변신한 이야기입니다. <편집자주>
비가 오락가락하던 지난달 20일 경기 과천시 서울대공원. 사자 무리 주변에 누런 덩어리들이 나뒹굴고 있었다.
“사체인가?” 관람객 사이에서 오싹한 말이 새어나왔지만, 자세히 보니 갈기갈기 찢긴 종이상자였다. 이따금 적힌 ‘디오스’ ‘트롬’ ‘LG’ 따위의 문구가 생전에 어떤 용도로 쓰였는지를 나타냈다. 포식자에게 농락당한 피식자의 모습은 생명체가 아닌데도 처참했다. 젖어서 더욱 안쓰러운 폐상자는 왜 그런 몰골을 하고 누워있었을까? 시간을 돌려봤다.
야수성 깨어난 초원의 제왕
외모도 멀쩡하고 종(種)도 분명하던 때가 있었다. 서울대공원이 지난달 13일 홈페이지에 공개한 영상에 번듯한 시절이 기록됐다. 고릴라, 기린, 코끼리 등이다. 무분별한 합사는 아니고 사육사들이 쓰임 끝난 가전제품 포장재로 모형을 만들어 설치한 것이다. 애들 장난감 같아 보이지만 불러일으킨 효과는 컸다. 야수성이 깨어났다.
영역에 들어온 낯선 손님을 예의주시하던 사자들은 이내 거침없이 달려들었다. 상자 안에 닭고기 같은 먹이가 숨어있어서 파헤치고 획득하기 위해 거칠게 공격했다. 본능이 꿈틀거렸는지, 상대의 가장 약한 부분인 발목 등 부위를 집중 공략해 쓰러트렸다. 먹잇감에 어찌나 몰두했으면, 박스가 목에 끼어 제2의 갈기가 생성되는 우스꽝스런 장면을 연출하기도 했다.
사냥을 모두 마치고선 세리모니도 잊지 않았다. 사육사들이 상자 안에 발라놓은 코끼리똥에 몸을 비비며 여유를 부렸다. 사자가 본래 습성에 따라 마음껏 움직인 흔적은 널브러진 종이상자의 조각들로 남았다.
사자에게 박스는 ‘거거익선’
동물의 습성 찾기 놀이와 같은 이 과정의 이름은 ‘행동풍부화’이다. 각 동물의 호기심을 자극해 야생에서 보이는 다양한 행동을 이끌어내는 게 목적이다. 내재된 야생성을 잃지 않도록 실시하는 프로그램인데, 좁은 공간을 좋아하는 고양잇과의 경우 좋아하는 박스를 활용해 주로 실시한다.
그러나 사자에게 큰 문제가 있으니, 웬만한 크기로는 성에 안 찬다는 점이다. 택배 박스 같은 작은 상자는 초원의 제왕에게 싱겁다
서울대공원 관계자는 CNB에 “사자는 자신의 몸집보다 큰 초식동물을 주로 사냥하기 때문에 이와 비슷한 대형 박스가 도움된다”며 “하지만 구하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라고 설명했다.
대형가전 포장 박스가 “딱이야”
이런 상황에서 크디큰 동물을 제작할 소재가 날아들었다. LG전자가 이 프로그램에 도움 주기 위해 세탁기, 냉장고, 에어컨 등 대형가전을 포장하는 데 사용했던 종이 박스를 기부한 것이다. 이번에 거대한 ‘박스 기린’ ‘박스 코끼리’ 등이 탄생한 배경이다.
서로의 성질이 맞아떨어졌다. 대형가전 포장 박스는 제품을 안전하게 보호해야 하는 특성 때문에 두껍고 넓으며 폭신하다. 고양잇과 동물들은 나무 등에 발톱 긁는 행위를 즐겨 해서 이 박스가 최적이다. 긁기 좋고 긁히기에도 좋다는 얘기다.
서울대공원 관계자는 “사자의 습성을 고려해 골판지를 겹친 도구를 쓰기도 하는데 영리하게 박스를 먹지 않고 뱉는다”며 “앞으로 이 가전제품 박스를 사자뿐 아니라 호랑이 같은 다른 동물들에게도 적용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동물들의 본성을 깨울 도구는 계속해서 보급된다. 제품을 설치한 이후에 포장재를 모두 수거하고 있는 LG전자가 올해부터 매년 대형가전 포장 박스 400개씩을 기부하기로 했기 때문.
LG전자 H&A연구센터장 오세기 부사장은 “앞으로도 필요한 곳에 제품 포장재를 제공하는 방안을 지속 마련할 것”이라고 말했다.
(CNB=선명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