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족들 기증한 수만점 예술품 놓고
전국 수십곳 지자체 불나방 유치전
삼성가와 옷깃만 스쳐도 명분 삼아
미술관 장소보다 보존책부터 세워야
“염불에는 맘이 없고 잿밥에만 맘이 있다”
문화비평가 민창기 시각언어문화연구소 소장은 최근 지방자치단체들 간의 소위 ‘이건희 미술관’ 유치경쟁을 이렇게 표현했다. 작품의 가치와 보존, 문화컨텐츠 구축 보다 당장의 치적쌓기에 혈안이 돼 있다는 것이다. CNB가 이들의 백태를 취재했다. (CNB=도기천 기자)
민 소장의 지적처럼 지자체들 간의 경쟁은 점입가경이다. 고(故)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 일가와 작은 인연이라도 있으면 이를 내세워 중앙정부를 압박하고 있다. 주무부처인 문화체육관광부(문체부)는 당혹스런 모습이다.
새로운 미술관이 추진되는 이유는 삼성가(家)가 기증한 작품의 규모가 상상을 초월하기 때문이다.
김환기, 박수근, 이중섭, 클로드 모네, 파블로 피카소, 마르크 샤갈 등 국내외 거장들의 근현대미술 작품 1600여점을 비롯, 국가지정문화재 60건(국보 14건, 보물 46건) 등 총 2만3천여점(1만1천여건)에 이른다.
이는 국립중앙박물관이 1946년 개관 이래 지금까지 기증받은 문화재 5만여점의 절반에 육박하는 규모다. 국립현대미술관은 이번에 삼성가로부터 1400여점의 그림을 기증받았는데 1969년 개관 이래 최대규모다. 국현이 지난 52년간 수집한 작품은 1만여점에 불과하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정부는 수장(收藏) 공간 마련에 비상이 걸렸다. 황희 문체부 장관은 지난달 28일 삼성가의 기증 사실을 알리면서 “수장고가 부족해 별도의 미술관 건립을 검토하고 있다”고 말했다. 황 장관은 “‘근현대 미술관’ 형태로 할지, 기증자 컬렉션으로 할지는 즉답하기 어렵고 앞으로 검토하고 방향을 정해야 할 것”이라며 “고인의 훌륭한 뜻이 한국을 찾는 관광객과 많은 사람에게 공감되고 향유되도록 만드는 것이 정부의 역할”이라고 밝혔다.
‘북항 르네상스’ 꿈꾸는 부산시
이에 지자체들은 불나방식으로 유치전에 뛰어들고 있다.
가장 먼저 포문을 연 곳은 부산시다. 박형준 부산시장은 지난 2일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문화의 서울 집중도가 극심한 현실에서 또 서울은 안된다”며 지역균형발전론을 내세웠다.
지난 13일에는 기자간담회까지 열었다. 간담회에서 박 시장은 전국 문화시설 2800여곳 가운데 36%가 수도권에 편중돼 있음을 강조했다. 박 시장은 “부산 북항은 세계적 미항으로 재탄생시키겠다는 목표로 개발하고 있는 곳”이라며 “부산의 랜드마크로 건립 중인 오페라하우스와 함께 (북항에) 이건희 미술관이 들어선다면 시너지 효과가 엄청날 것”이라고 주장했다.
부산시는 이건희 미술관 입지 선정을 공모 절차로 진행해 줄 것을 문체부에 건의할 계획이다. 전문가들이 직접 미술관 선정 기준, 운영 방식 등 가이드라인을 세워 유치 과정을 투명하게 하자는 것.
대구시 “TK는 삼성의 모태…우리 차지”
대구시도 유치경쟁에 적극 나서고 있다. 시는 대구가 이건희 회장의 출생지이고 삼성그룹의 모태가 된 삼성상회(三星商會)의 출발지라는 점에서 ‘이건희 컬렉션’의 최적지라는 논리를 펴고 있다.
삼성그룹의 창업주인 고 이병철 회장은 1938년 대구에 삼성상회를 설립해 사업을 시작했다. 당시 대구 지역의 청과류와 포항 지역 건어물을 중국·일본 등지로 수출하던 삼성상회는 1951년 삼성물산(삼성의 모(母)기업이자 현재 지주회사)으로 상호를 바꿨다.
이런 배경에서 대구시는 지난 7일 ‘이건희 미술관 대구유치추진위원회’ 결성 추진을 선언했다. 권영진 대구시장은 “이건희 컬렉션이 한곳에 모여 국민에게 선보인다면 그 장소는 당연히 대구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경북도도 대구시에 힘을 보태기로 했다. 이철우 경북도지사는 지난 11일 간부회의에서 “삼성상회가 대구에서 시작했고 삼성전자가 구미에서 성장한 만큼 대구와 경북은 삼성그룹과 인연이 남다르다”며 “이건희 미술관 유치전이 치열한데 대구와 경북이 경쟁하지 말고 힘을 합쳐야 한다”고 강조했다.
경주시 “삼성家 경주이씨 집안…박물관 세워야”
하지만 경북도에 소속된 경주시는 별도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이병철 창업주가 경주이씨 판정공파 후손으로 중앙종친회장을 맡은 인연과 함께 기증품 중 신라 관련 유물이 상당수 있다는 점 등을 내세워 전시공간 유치를 주장하고 있다.
경주시 측은 언론에 “경주가 신라 천년고도인데다 삼성가의 뿌리가 경주인 만큼 서양화나 근대미술품은 몰라도 고미술품 등 문화재 보관을 위한 박물관은 경주가 최적지”라고 밝혔다.
진주시 “창업주, 지수초 다녔다…여기가 최적지”
경남 진주시와 의령군도 삼성가와의 인연을 내세워 유치전에 뛰어들었다.
1910년 경남 의령에서 태어난 이병철 창업주는 옆 지역 진주 허씨 가문의 허순구씨와 혼인한 둘째 누나 이분시씨를 따라와 진주시 지수면에서 유년기를 보냈다. 당시 그는 지수보통학교(현 지수초)를 1922년부터 다녔다. 지수초는 LG그룹 창업주 고 구인회 회장, 효성그룹 창업주 고 조홍제 회장 등 숱한 기업 총수들이 거쳐 간 재벌의 산실로 알려진 곳이다.
지수초 교정에는 이병철과 구인회 등이 함께 심은 소나무가 지역의 명물로 자리잡고 있다. 또 의령 정곡면에는 이병철 창업주의 생가가 보존돼 있다. 진주시와 의령군은 이런 인연을 들어 삼성 미술관 건립의 최적지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밖에 여수시는 이건희 회장이 생전 하트모양의 섬으로 유명한 여수시 소라면 모개도를 매입했다는 점을 들어 ‘이건희 미술관 여수유치위원회’를 발족했으며, 경기도는 문재인 정부의 공약인 ‘미군 반환공여지 국가개발’과 연계해 경기 북부에 미술관을 건립하겠다는 계획을 밝혔다. 대전·세종·창원·청주·인천·수원·평택 등도 저마다 이유를 들어 이건희 미술관을 원하고 있다.
“국민 10명 중 6명, 이재용 사면 찬성”
이처럼 삼성가의 ‘단군 이래 최대 기증’이 사회적 화두로 부상하면서 삼성의 기업 이미지 또한 크게 개선되고 있다.
특히 지난 1월 ‘박근혜·최순실 국정농단’ 사건으로 실형을 선고받고 구속 수감 중인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건희 회장의 장남)의 사면론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
삼성가의 미술품 기증 발표 직후인 지난 10∼12일 엠브레인퍼블릭·케이스탯리서치·코리아리서치·한국리서치 4개기관이 전국 만18세 이상 1003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이 부회장의 사면에 찬성한다’는 응답이 무려 64%였다. 국민의힘 지지층의 92%가 ‘찬성한다’고 답했으며, 더불어민주당 지지층에서도 반대(44%) 보다 찬성(47%)이 높았다. (표본오차 95% 신뢰수준에 ±3.1%포인트. 자세한 내용은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원회 홈페이지 참조)
이런 흐름을 타고 정치권에서는 여야 할 것 없이 사면논의가 본격화되고 있다. 지난 17일 경기도 화성시 삼성전자 반도체 캠퍼스를 방문한 김기현 국민의힘 대표 권한대행은 문재인 대통령에게 사면 결단을 촉구하기도 했다.
설왕설래 속 보존방안 뒷전
더구나 이건희 회장의 부인 홍라희 여사와 이재용 부회장, 장녀 이부진 호텔신라 사장, 차녀 이서현 삼성복지재단 이사장 등 오너 일가는 이번 미술품 기부 외에도 코로나19 등 감염병 대응을 위한 전문병원설립 및 연구지원에 7000억원, 소아암·희귀질환 어린이 지원에 3000억원을 내놓기로 했다.
12조원에 달할 것으로 추정되는 천문학적인 상속세에 대해서도 유족들은 “세금 납부는 국민의 당연한 의무로, 마땅히 해야 할 일”이라고 밝혔다. 약속한 사회공헌과 세금납부가 실행되면 사면 논의는 더욱 급물살을 탈 것으로 예상된다.
하지만 이번 이슈를 곱지 않게 보는 시선도 있다. 세금 문제에서 비롯된 사안에 표심을 의식한 지자체장들이 지나치게 편승하고 있다는 것이다.
정의당의 한 당직자는 CNB에 “2만여점이 넘는 미술품을 상속할 경우 천문학적인 상속세를 내야하기에 세금을 줄이려는 과정에서 기부가 결정되었는데 마치 엄청난 사회공헌을 하는 것처럼 비춰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민창기 시각언어문화연구소 소장은 CNB에 “삼성가가 내놓은 어머어마한 문화재가 우리 문화산업을 획기적으로 끌어올릴 수 있음에도, 작품의 가치와 보존방안 등에 대한 담론은 후순위로 밀리고 지방자치단체장들의 유치경쟁만 부각되고 있어 씁쓸하다”고 말했다.
(CNB=도기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