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 “선대 회장 뜻” 단군 이래 최대 기부
초라한 국립미술관, 단박에 세계적 미술관
재계·미술계 “문화충격 그 자체” 삼성 찬사
전시회만 최소 2년…문화계 르네상스 열려
삼성이 한국 문화예술의 역사를 다시 썼다. 고(故) 이건희 회장 소유 예술품 2만3천여점의 기부로 국립현대미술관은 단숨에 세계적인 미술관으로 격상됐다. 이중섭을 대표하는 ‘황소’, 피카소와 모네의 그림 등 세계적 희귀작들이 대거 공개되자 미술계는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전국 수십 곳의 미술관·박물관에서 특별전이 준비되고 있으며, 정부는 방대한 규모의 작품들을 보관하기 위해 별도 미술관 신설을 검토 중이다. CNB가 ‘이건희 컬렉션’이 몰고 온 ‘문화 충격(culture shock)’을 들여다봤다. (CNB=도기천 기자)
“한국미술의 역사는 이건희 기증 전과 기증 후로 나뉘게 됐다”
문화비평가 민창기 시각언어문화연구소 소장은 CNB기자에게 이번 삼성가(家)의 역대급 기부를 이렇게 표현했다.
이건희 삼성 회장의 유족들이 미술품 기증을 결정하기 전만 해도, 미술공기관(국립·시립·도립미술관 등)들의 작품 소장 실태는 초라했다. 국립현대미술관에는 피카소와 모네 그림이 단 한 점도 없었고, 근대서양화의 거목인 이중섭(1916~1956)을 대표하는 ‘황소’도 소장하지 못했다. 1971년 작 ‘우주’로 국내 미술품 경매 사상 최고가 기록을 세운 김환기(1913~1974) 작품을 19점 소장하고 있지만, 작가의 예술적 기량이 절정에 달한 1970년대 전면점화는 한 점도 없다.
이런 상황에서 지난 28일 이건희 회장의 부인 홍라희 여사와 장남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장녀 이부진 호텔신라 사장, 차녀 이서현 삼성복지재단 이사장 등 유족들이 김환기, 박수근, 이중섭, 클로드 모네, 파블로 피카소, 마르크 샤갈 등 국내외 거장들의 근현대미술 작품 1600여점을 국립현대미술관 등에 기증한 것이다.
기증품에는 김환기의 ‘여인들과 항아리’(1950년대)와 전면점화 2점, 박수근의 ‘절구질하는 여인’(1954)과 ‘농악’(1960년대), 이중섭의 ‘황소’(1950년대) 등 한국 근대 대표작가 작품들이 총망라돼 있다.
프랑스 인상주의 창시자 중 한 명인 모네의 ‘수련이 있는 연못’(1919~1920), 유럽 초현실주의 미술을 대표하는 살바도르 달리의 ‘켄타우로스 가족’(1940), 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 ‘책 읽는 여인’(1890년대) 등 서양미술 걸작들도 대거 기증됐다. 피카소 작품 112점을 비롯, 호안 미로, 마르크 샤갈, 카미유 피사로, 폴 고갱 등 미술 교과서에서나 볼 법한 세계적 명인들의 작품이 즐비하다. 작품에 따라 시장 가격이 수백억 원에 달한다.
고향으로 돌아온 박수근 유작들
삼성가의 기증품은 이뿐이 아니다. 앞서 언급한 1600여점을 포함, 이 회장이 평생 수집한 2만3천여점(1만1천여건)이 문화계의 품에 안겼다.
문체부에 따르면 국립중앙박물관은 9797건(2만1600여점)을 기증받았다. 기증품 중에는 겸재 정선의 ‘인왕제색도(仁王霽色圖)’(국보 제216호), 현존하는 고려 유일의 ‘고려천수관음보살도(千手觀音菩薩圖)’(보물 제2015호), 단원 김홍도의 마지막 그림인 ‘추성부도(秋聲賦圖)’(보물 제1393호) 등 국가지정문화재 60건(국보 14건, 보물 46건)이 포함됐다.
지역 미술관들도 고무됐다. 유족들은 대구미술관, 전남도립미술관, 광주시립미술관, 제주 이중섭미술관, 강원 박수근미술관 등 지역 미술관 5곳과 서울대 등에도 총143점을 기부했다.
대구미술관에는 김종영, 문학진, 변종하, 서동진, 서진달, 유영국, 이인성, 이쾌대 등의 작품 21점이, 전남도립미술관에는 허백련, 오지호, 김환기, 천경자, 김은호, 유영국, 임직순, 유강열, 박대성 등의 작품 21점이 소장됐다.
특히 한국 근현대미술을 대표하는 1세대 서양화가 박수근(1914∼1965)의 작품 18점이 작가의 고향인 강원 양구로 돌아왔다. 삼성이 소유하고 있던 박 화백의 유화 4점과 드로잉 14점이 ‘박수근미술관’ 품에 안긴 것.
외신 “삼성, 피카소 나왔다…세계 최대 규모”
이번 기증은 국내 미술·박물관의 역사를 다시 썼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국립중앙박물관은 1946년 개관 이래 이번 기증품을 포함해 현재까지 총43만여점의 문화재를 수집했다. 이 가운데 5만여점이 기증품으로 이번 2만점 이상 기증은 기증된 문화재의 43%에 이른다. 국립현대미술관은 1969년 개관 이래 이번 기증품을 포함해 현재까지 총1만200여점의 작품을 수집했다. 이 중 5400여점이 기증품이며, 이번 1400여점의 기증은 역대 최대 규모다.
황희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은 관련 브리핑에서 “고 이건희 회장 소장품의 기증으로 우리의 문화적 자산이 풍성해졌으며 해외 유명 미술관·박물관과 비교해도 손색없는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됐다”고 평가했다.
외신들도 희대의 문화 충격 현상을 앞다퉈 보도하고 있다.
미국 유력 경제지인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삼성 일가가 피카소, 모네를 내놓았다”며 미술품 기증 계획을 상세히 소개했다. AP통신도 서울발 기사로 “삼성가에서 진귀한 미술품 수만 점을 기증했는데 여기에는 피카소와 달리가 포함됐다”고 설명했다. 영국 로이터 통신은 “전세계에서 최대 규모의 상속세”라고 기사화했다.
모네 ‘수련 연못’·이중섭 ‘황소’…희귀 역작 ‘전시회’
문화당국은 이번 기증품 2만3천여점을 오는 6월부터 특별전 등을 통해 순차적으로 공개한다. 13개 지방박물관 전시와 국외 주요 박물관 한국실 전시 등 다양한 전시를 이어간다.
국립현대미술관은 오는 8월 서울관에서 ‘고 이건희 회장 소장 명품전(가제)’ 개최를 시작으로, 9월에 과천, 내년 청주 등에서 특별 전시와 상설 전시를 통해 작품을 공개한다. 대구미술관, 전남도립미술관,박수근미술관 등도 조만간 특별전을 연다.
정부는 방대한 규모의 기증이 이뤄져 국립중앙박물관과 국립현대미술관 등의 수장고가 부족한 실정이기 때문에 수장고나 별도 미술관 신설 등을 검토할 방침이다.
문체부 관계자는 CNB에 “워낙 작품 규모가 방대해 전국의 미술관·박물관들이 각자 나눠서 특별전을 준비할 계획을 갖고 있다”며 “최소 2년 이상 전시회가 계속될 것으로 예상된다”고 말했다.
시각언어문화연구소 민창기 소장은 CNB에 “이 정도 상황이면 한국판 르네상스 시대가 왔다고 해도 말이 될 정도”라며 “문화인들이 이번 기회를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따라, 한국의 문화적 위상이 국제사회에서 새로 정립될 수도 있다”고 말했다.
유족들 “고인 뜻 이은 것…상속세와 무관”
삼성이 이런 파격적인 기부 결정을 내리게 된 것은 이건희 회장의 평소 유지를 받들었기 때문이다.
이 회장은 평소 “인류의 건강과 삶의 질을 높이는 것은 기업의 사명이며, 문화유산을 모으고 보존하는 일은 인류 문화의 미래를 위한 시대적 의무”라고 강조해왔다.
삼성 측은 이번 기부에 대해 “국가경제 기여, 인간 존중, 기부문화 확산 등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역설한 고인의 뜻을 기리기 위한 취지”라며 “유족들은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다양한 사회환원 활동을 진행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실제 유족들은 이번 미술품 기부 외에도 코로나19 등 감염병 대응을 위한 전문병원설립 및 연구지원에 7000억원, 소아암·희귀질환 어린이 지원에 3000억원을 내놓기로 했다.
유족들은 천문학적인 상속세에 대해서도 “세금 납부는 국민의 당연한 의무로, 마땅히 해야 할 일”이라고 밝혔다.
세무당국과 재계에 따르면, 이건희 회장이 남긴 삼성생명, 삼성전자, 삼성물산 등 계열사 지분의 상속재산가액은 18조9633억원이다. 이 지분을 전부 상속인들이 물려받는다면 상속세액은 11조400억원이다. 최대주주 할증률 20%, 최고세율 50%, 자진 신고 공제율 3%를 차례로 적용한 수치다. 여기에다 부동산 등 다른 유산까지 상속에 포함하면 12조원 이상을 상속세로 내야 한다.
이는 국내는 물론 전세계적으로도 역대 최고 수준의 상속세 납부액이다. 지난해 우리 정부의 상속세 세입 규모의 3~4배 수준에 달하는 금액이다.
국내 다른 재벌들과 비교해도 압도적인 규모다.
앞서 2018년 구광모 LG그룹 회장 등 고 구본무 회장의 상속인은 ㈜LG와 LG CNS 지분 등에 대한 상속세 9215억원을 신고했다. 2019년 별세한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의 상속인 조원태 회장 등이 납부한 상속세는 2700억원이었고, 작년에 별세한 신격호 롯데그룹 회장의 유족이 신고한 상속세액은 4500억원 가량으로 추정된다. 정용진 신세계그룹 부회장과 정유경 신세계 총괄사장 남매는 상속세가 아닌 증여세로 지난해 약 3천억원을 냈다.
이처럼 삼성가는 단군 이래 최대 규모의 상속세를 내야 하지만 이번 미술품 기증으로 세금이 감해지지는 않는다. 현행법상 세금을 현금이 아닌 물건으로 낼 수 있는 ‘물납제’에 미술품은 포함되지 않기 때문이다. 물납제의 대상은 대상이 부동산과 유가증권, 비상장주식으로 한정돼 있다.
미술계에서는 작품을 해외에서 팔아 세금 재원을 마련하는 경우를 막기 위해서라도 물납제에 예술품을 포함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작품의 해외유출을 막고 문화의 공적기능을 확대할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이번 삼성가의 문화재 기부는 유족들의 의사와 상관없이 물납제 논의에 다시 불을 지피는 계기가 되고 있다.
삼성 관계자는 CNB에 “이번 사회환원 계획은 갑자기 결정된 게 아니라 그동안 면면히 이어져온 선대 회장의 정신을 계승하는 것”이라며 “상속세(물납제) 사안과는 무관하다”고 일축했다.
(CNB=도기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