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류·유제품 없이 7일간 사투(?)
‘요리꽝손’ 기자는 간편식 위주로
체중은 그대로지만 숙면효과 최고
뭐든 해봅니다. 대리인을 자처합니다. 모이지도 말고 움직임도 줄이고 마스크 없이는 대화도 금해야하는 ‘자제의 시대’. CNB가 대신 먹고 만지고 체험하고, 여차하면 같이 뒹굴어서라도 생생히 들려드리겠습니다. ‘해보니 알게 된’ 후기가 안방으로 배달 갑니다. 이번 편은 일주일 동안 채식주의자로 살아본 이야기입니다. <편집자주>
국내 채식인구 150만 시대. 150만1번째가 되기로 했다. 건강, 환경 보호, 동물복지를 생각해 육류와 유제품 등을 제한하는 이들의 대열에 합류해 보기로 했다. 오래는 아니고 딱 일주일로 정했다. 좋은 취지에 비해 자신이 없어 기한을 짧게 잡았다. 갑자기 식단을 바꾼다는 게 생각보다 걱정됐다. 바꾼다기 보단 무언가를 끊는다는 말이 더 적확할 것이다. 육류, 유제품, 달걀 섭취를 금해야 하기에.
어쨌든 7일 동안 ‘비건식’이란 이름을 달고 나온 제품만 먹었다. 어설픈 시도는 건너뛰었다. 요리다. 어느 정도 만들어져 나온 음식만 먹었다. 요리 실력이 형편없기 때문에 전자레인지에 데우거나 프라이팬에 살짝 굽거나 뜨거운 물을 붓기만 하면 되는 간편식 위주로 골랐다. 이마트가 채식주의자들을 위한 음식만 따로 모아 파는 ‘채식주의존’에서 일용할 양식을 구해와 쟁였다. 오뚜기, 동원F&B, 농심 등 국내기업이 내놓은 제품이 냉장고의 대부분을 차지했는데, 종류가 한식 중식 양식으로 다양해 선택의 폭이 넓었다. 그래도 부족한 것은 인터넷 쇼핑몰을 이용했다. 채식의 삶 속으로 들어가는 시작이었다.
#D-1일. 채식파냐 육식파냐…‘배고파’인데요?
당신은 채식파(派)인가 육식파인가? 나는 이 물음에 ‘배고파’라 답하고 싶다. 배고프면 그냥 눈앞에 있는 걸 먹어왔다. 크게 따지지 않았다. 어렸을 때도 반찬투정 따위는 없었다. 다만 젓가락이 향한 빈도를 되짚어보니 조금이나마 육식에 가까운 것 같다. 고기 세 점에 채소 한스푼이 나만의 룰이었다. 밭이 고향인 반찬은 삼보일배의 절과 같은 것이었다.
선택지가 두개라면 어쨌든 무게추가 육식파로 기운다. 섭취량의 차이가 컸다. 내가 여태껏 잡아먹은 닭, 소, 돼지만 해도 4열 종대 앉아 번호로 연병장 10바퀴쯤 될 것 같다. 그동안 미안했다. 많이도 먹었다. 당분간 안녕이다.
#1일차. 주린 배를 잡고 길을 잃다
새벽배송으로 주문한 샐러드가 문 앞에 도착해 있었다. 어젯밤 에어프라이어로 돌려놓은 고구마와 함께 아침상을 차렸다. 양상추, 파프리카, 그리고 이름 모를 풀들이 가득한 샐러드를 우걱우걱 씹었다. 썼다. ‘아메리칸 소스’ 뿌리는 걸 깜빡했다. 비닐을 뜯어 농번기 밭에 물을 주듯 흥건히 뿌렸다.
단언컨대 샐러드의 팔 할은 소스다. 필드의 지배자가 메시라면 이 작은 풀밭의 주인공은 소스다. 쓴맛은 사라지고 간이란 게 은혜롭게 스민다. 그 위에 얹는 고구마는 단비같은 존재다. 단맛을 극대화해준다. 비슷한 구성으로 도시락을 여러 개 꾸렸다. 앞으로 틈틈이 먹을 양식을 저장했다.
여기까진 수월했다. 문제는 저녁에 발생했다. 준비없이 나온 세상은 추웠다. 먹을 게 없었다. 밖에서 볼일을 마쳤다. 머릿속 파파고를 돌렸다. 빵은 고기가 아니니까 괜찮겠지? 파파고에 랙이 걸렸다. 빵의 기초가 계란이란 걸 깜빡했다. 급하니까 유리한대로 해석한 거다. 검색창을 열어 ‘비건 식당’ ‘채식 식당’을 쳤다. 그나마 가까운 곳이 차로 30분, 그마저도 집과 반대 방향에 있었다. 귀가를 택했다. 주린 배를 잡고 버스에 올랐다. 집에 도착해서 두부 한 모를 에어프라이어에 넣고 돌린 뒤 마늘 플레이크를 뿌려 먹었다. 아, 고단한 끼니 해결의 길이여.
자려고 누웠는데 눈꺼풀이 떨렸다. 허기가 졌다. 관심을 돌리려 유튜브를 켰다. 백종원 선생님이 돼지고기 생강구이 만드는 법을 설명했다. 위장에서 굉음이 들렸다. 스마트폰을 껐다. 어디서 종소리가 들렸다. “근처에 학교도 성당도 교회도 보신각도 없는데….” 헛것이라도 들리나? 의구심과 공포심에 사로잡힌 채 까무룩 잠이 들었다.
#2일차. 쉑쉑과 군대리아 사이
어제보다 몸무게가 0.8kg 줄었다. 뭘 먹어야 할지 몰라 안 먹은 대가다. 오늘은 먹어야 한다. 그것도 잘.
아침부터 함박스테이크를 구웠다. 작심 하루만에 실패 했다는 의심의 수군거림이 들린다. 아니다. 100% 식물성 대체육이란다. 직접 다진 건 아니다. 마트에서 샀다. 동원F&B가 미국에서 수입해 국내에 판매하는 식물성 대체육 브랜드 '비욘드미트'의 버거다. 요리 솜씨 없는 사람에게 이렇게 만들어져 나온 제품은 금과옥조로 삼아야할 존재다. 프라이팬에 굽기만 하면 된다. 이렇게 날로 먹을 수 있다니!
백종원 선생님의 표현을 빌리자면 식감이 재미있다. 몽글몽글하게 씹히는 맛이 오래간다. 첫맛은 쉑쉑버거의 불맛 가득한 패티와 별반 다르지 않다. 다만 갈수록 무게감이 떨어지는 게 흠. 2000년대 초반에 군대 다녀온 사람은 알지도 모르겠다. 지금은 맛이 어떻게 변했는지 모르겠으나 햄버거 또는 빵식이라 불리는 아침 메뉴에 나오는 패티맛과 비슷하다. 진짜 고기와 견줬을 때 어딘가 모르게 가볍고 싱겁다.
그래서 좋은 건 포만감은 확실한데 속이 부대끼지 않다는 것이다. 부른 배를 잡고 잠시 누웠다. 뱃속에 평안이 찾아오니 창밖이 고요했다.
#3일차. 홍콩 변두리에서 먹은 그 맛
10년 전 홍콩에 갔을 때다. 관광지나 도심에서 벗어나 외딴 곳에 호텔을 잡았다. 현지인들의 주거구역이었다. 머무는 내내 비가 내렸다. 이른 아침에 커튼을 걷으면 우산을 쓴 채 지하철역으로 쏟아져 들어가는 출근길 인파가 보였다. 그들 중 일부는 역과 가까운 식당에서 아침식사를 해결했다.
그 무리에 휩쓸려 간판조차 없는, 딤섬이 걸린 사진으로만 정체성을 알 수 있는 식당에 따라 들어갔다. 주인과 말도 안 통했다. 메뉴판에 아무렇게나 걸린 그림만 보고 손짓으로 딤섬 몇 개를 주문했다. 어떤 재료를 썼는지도 모른 채 몇 판을 비웠다. 씹히는 식감의 중독성이 강했다. 덥고 습한 홍콩에서 자란 채소라 다른 건가? 생각했다. 자꾸만 젓가락이 가는 생소한 맛이었다. 궁금해서 주인장을 향해 “이거 네임? 이거 네임?”했다. 맛있게 먹었다는 줄 알았는지 그는 사람 좋은 미소만 지어보였다. 지금도 저거 네임은 알지 못한다. 다만 확실한 건 그때 맛본 딤섬은 여지껏 다시 만나지 못했다는 거다.
그런데 웬일? 그로부터 10년이 지나고 홍콩에서 비행기로 약 4시간 떨어진 서울의 가정집에 그 만두가 강림했다. 냉동상태로 날아들었다.
맛이 아니라 식감의 유사성이 기억을 소환했다. 냉동실에서 미리 사놓은 오뚜기 그린가든 만두를 꺼내 쪘다. 씹어도 씹어도 아삭아삭한 것이 홍콩의 어느 역 주변 식당을 떠올리게 했다. 씹히는 맛의 지속성은 아마 여기에 들어간 10가지 채소에서 나오는 것이리라. 만두에 길들여진 올드보이의 최민식이 장도리를 들고 적진에 뛰어들었을 때처럼 씹을 상대가 계속해서 나왔다. 물밤, 양배추, 양파, 대파, 당근, 송화버섯, 부추, 무, 마늘, 생강이 차례로 치아의 수직운동에 걸려들었다. 만두를 곱씹을수록 비 내리는 홍콩의 눅눅한 뒷골목이 스쳐갔다. 혀에서 한 번 기억에서 한 번.
#4일차. 떡볶이에 와인 한 잔 없다면
삼겹살에 소주 한 잔 없다면
아, 이것마저 없다면
안도현의 시 ‘퇴근길’을 2021년에 맞게 바꾸면 삼겹살의 자리에 분식이 들어가야 한다. 서울시가 작년에 전국 1만여명을 대상으로 코로나 시대에 '나를 위로하는 음식'을 조사한 결과 '떡볶이'가 1위에 선정됐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서 드는 의문. 이 위로의 음식이 채식에 맞춰 나온 게 있을까? 유레카! 있었다. 그것도 동네 편의점에 떡하니 있었다. GS리테일이 운영하는 GS25가 출시한 베지가든 떡볶이인데, 소스를 비롯한 모든 양념과 제품에 육류성분을 사용하지 않아 한국비건인증원의 비건인증을 받았단다. 바야흐로 편의점에서 별걸 다 파는 시대다.
짜장맛 떡볶이에 뜨거운 물을 붓고 와인을 뜯었다. 채식 체험을 준비하면서 가장 먼저 구매한 것이 이 와인이다. 롯데백화점이 최근 판매하기 시작했다. 재배 과정에서 화학비료 등을 사용하지 않아 비건 인증을 받았다고 했다. 그래서 더욱 깔끔할 거라고 매장 직원이 말했는데, 신세계와 구세계의 중간적인 맛 같은 건 모르겠고 산뜻하긴 했다. 달큼한 짜장 떡볶이에 더할 나위 없이.
어쨌든 코로나 시대 넘버원 소울푸드 떡볶이와 와인이 있으니 어찌 행복하지 아니한가! 비몽사몽 하는 4일차가 이렇게 저물었다.
#5일차. 야구엔 치킨? 탕수육!
주말이 찾아왔다. 프로야구가 개막했다. 치킨의 시즌이 시작됐다. 치맥없는 야구가 말이 되는 소리인가. 날씨마저 궂다. 기름진 음식이 필요하다. 고무신이라도 튀겨야 한다. 끓는 기름에 투하된 음식의 자진모리장단이 빗소리에 맞춰 휘몰아쳐야 한다.
프라이팬에 기름을 흠뻑 두르고 채식용 탕수육을 모로 눕혔다. 익는 동안 포장지를 보며 생각했다. 이름을 바꿔야하지 않을까? 중식에서 닭을 쓰면 –기(鷄), 돼지고기를 쓰면 –육(鷄)자를 붙이니까 저건 농심의 베지가든 탕수육이 아니라 탕수채(菜) 정도로 지어야 맞지 않을까? 아니면 탕수콩? 잡생각을 하다보니 튀김옷이 잡다하게 익어갔다. 재빨리 이리저리 굴려가며 골고루 태닝을 시켜줬다.
이것은 채식의 위엄인가 봄날 먹성터진 이의 먹부림인가. 500g에 1125kcal라는 무시무시한 숫자를 보고서도 게 눈 감추듯 먹어치웠다. 튀긴 음식인데도 가벼워 입 안에서 ‘탕수채’가 경공술을 펼쳤다. 치악력의 역할이 크지 않았다. 흔히 고기를 튀기면 고기와 튀김옷을 씹느라 턱이 아프기 마련인데 치아에 닿아 슬며시 분쇄되니 턱에 부담이 가지 않았다. 소스에 얹은 당근이 오히려 부담스럽게 느껴질 정도였다.
티비로 시선을 옮겼다. 응원하는 야구팀이 한 점차 신승을 거뒀다. 시즌 전망을 밝게 만드는, ‘탕수채’처럼 산뜻한 출발이었다.
#6일차. 요리(?)를 하기 시작했다
전직 요리 유튜버이자 요식업계 작은 손인 지인에게 물었다.
“채식을 더 맛있게 먹는 방법 없을까?”
“방법이야 많지. 근데 넌 똥손이라 뭘 해도 똥맛이 날껄? 괜히 요리에 기웃거리지 말고 비교적 쉬운 소스에 신경써봐”
그가 알려준 방법은 이랬다. 순두부(연두부도 괜찮다), 식초, 머스타드 소스, 다진 마늘을 믹서에 넣고 돌리면 그럴듯한 갈릭디핑 소스가 된단다. 비율은? 어차피 집에 계량컵도 없을 테니 대충 더 먹고 싶은 걸 넣으라고 했다. 어차피 마늘향이 강해서 큰 차이를 못 느낄 거라고.
소스가 내 손에서 어떻게 탄생할지 모르니 신뢰감 높은 음식을 먼저 준비했다. 떡갈비다. 올해부터 비건 식품 브랜드 사업을 확장하고 있는 농심이 만들었다. 이 회사에 따르면 지난 2017년 시제품 개발 이후 채식 커뮤니티, 서울 유명 채식식당 셰프들과 함께 메뉴를 개발하고, 소비자의 평가를 반영하는 과정을 반복하면서 제품의 맛과 품질 완성도를 높였다. 전문가들의 손길을 거쳐 탄생한 음식이니 초보가 만든 소스와 만나도 민망한 맛은 안 날거란 믿음이 생겼다.
콩과 채소로 만든 떡갈비를 구웠다. 신기하다. 싱겁게 느껴졌던 대체육이 입에 맞기 시작했다. 2% 부족하거나 고기를 흉내낸 게 아닌 개별적인 존재로 부상했다. 채소가 흠뻑 박힌 콩고기는 그 자체로 하나의 음식이 됐다. 고기의 아류가 더 이상 아닌 것이다.
이제 소스를 만들 차례. 믹서에 순두부를 주먹 크기만큼, 그 위에 머스타드 소스를 세 큰 술 정도, 식초는 쪼르르, 다진마늘은 한 큰 술 넣었다. 그리고 돌렸다. 큰 기대는 없었다.
그런데 웬걸, 소스가 화룡점정을 찍었다. 영락없는 갈릭디핑 소스가 탄생했다. 마늘 기반의 소스가 떡갈비와 만나니 담양의 떡갈비 맛집을 방불케 했다. 입안이 풍요로워지면서 자화자찬도 익어갔다. 나는 요리에 소질 있는 사람이었다.
#7일차. 한국인은 밥심으로 산다
한국인은 무엇으로 사는가? 밥이다. 한국인의 안부 묻는 법은 “밥 먹었어?”이다. 아픈 사람을 걱정할 때도 마찬가지다. “밥 먹고 약 먹어. 속 버려” 기약없는 약속을 정할 때도 요긴하게 쓴다. “언제 밥 한 번 먹읍시다” 한국인에게 밥은 타인과 벌어지는 어떤 상황에서나 쓸 수 있는 만능열쇠와 같은 단어다.
이 여정의 끝을 밥으로 정한 이유다. 한국인답게 든든한 밥 한공기로 마무리 지었다. 채식으로도 얼마든지 밥을 맛있게 먹을 수 있다. 기름이란 바다에 채소와 밥을 띄워 들들 볶으면 된다. 냉동식품(오뚜기 그린가든 모닝글로리볶음밥)을 쓴 건 비밀이다.
밥은 본디 외로운 존재다. 찬이 있어야 존재감을 발휘한다. 먹다 남은 떡갈비, 함박스테이크를 함께 상에 올렸다. 비로소 만찬이 되었다. 풍성한 한상차림이 완성됐다. 채식의 중심에서 포만감을 외쳤다.
#에필로그. 채식을 하자 숙면이 찾아왔다
일주일간의 채식 섭취를 끝냈다. 전부 적진 못했지만 샐러드, 두부, 고구마, 채소, 제철과일로 많은 끼니를 해결했다. 내심 뱃살 제거나 극적인 체중감량 효과를 기대했지만 200g 정도 줄었을 뿐이다.
하지만 얻은 게 있다. 숙면이다. 그동안 떨어지는 소화능력 탓에 자려고 누워서도 뒤척이는 시간이 길었다. 저녁을 먹고 4시간은 지나야 음식이 역류하는 느낌이 덜했다. 이번에 채식을 하면서 달라진 건 빨리 잠들고 깊은 수면에 빠졌다는 점이다. 가벼운 음식이 가벼운 몸을 가져다주었다.
본래 채식의 목적인 동물과 환경 보호 같은 윤리적 소신, 이와 더불어 몸이 느끼는 장점이 많아서 일까? 어디서나 채식을 할 수 있는 환경이 갖춰지고 있다.
서울시교육청은 이번 달부터 관내 모든 학교에서 매달 두 번 채식하는 '그린 급식의 날'을 운영하고 있다. '그린(GREEN) 급식'이란 성장(Growth)·책임감(Responsiblity)·생태시민(Ecological citizen)·친환경(Ecofriendly)·자연에 대한 예절(Nature etiquette)의 약자다. 개인의 육체적·정신적 건강을 넘어서 지구환경까지 생각하는 삶의 태도를 형성해 나간다는 뜻이 담겼다.
국방부도 지난해 급식방침을 개정하면서 채식주의자, 무슬림(이슬람교도) 병사를 위해 고기와 햄 등 육류가 들어간 품목을 제외한 ‘비건 식단’을 짜서 제공하기로 했다.
교육 현장에도, 군부대에도 녹색 바람이 불고 있는 것이다. 채식의 사각지대가 빠르게 사라지고 있다.
(CNB=선명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