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형제도 몰라보는 재벌가 분쟁
총수에게 반기 들었지만 모두 실패
개인주주들은 명분보다 ‘실리’ 선택
전문가들 “오너 권력집중 분산해야”
반란은 반드시 진압된다? 재계를 뜨겁게 달궜던 한진가(家) ‘남매 전쟁’과 금호가(家) ‘조카의 난’이 최근 정기주총을 계기로 일단락되면서, ‘쿠데타는 성공할 수 없다’는 재벌가 불문율이 다시금 확인됐다. 재벌 2곳 중 1곳이 혈족 간에 경영권 다툼을 벌인 기록을 갖고 있지만, 대부분은 난(亂)을 일으킨 쪽의 패배로 끝났다. 이유가 뭘까. (CNB=도기천 기자)
재벌가의 경영권 분쟁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재계에 따르면, 자산 기준 30대 그룹에서 지금까지 총수 일가가 다툼을 벌인 곳은 절반이 넘는다.
이는 오너 일가가 대를 이어 경영지배하고 있는 한국 재벌의 특성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전문경영인(CED) 체제가 주를 이루는 서구사회와 달리, 우리나라 대기업 대부분은 ‘총수와 그 가족’이 대주주이자 경영자다.
<한국재벌사>의 저자 이한구 수원대 명예교수는 CNB에 “수백년 된 주식회사의 역사를 가진 선진국들과 달리 우리나라 기업의 역사는 70년이 되지 않는다. 급격한 산업화 시기를 거치면서 총수는 ‘회사가 내 것’이라는 사고를 갖게 되었고, 이것이 오너2·3세에게 그대로 대물림되어 경영분쟁의 불씨가 된 것”이라고 분석했다.
주목할 점은 분쟁이 발생해도 지배구조에는 큰 변화가 없다는 것. CNB가 최근 5년 사이에 가족 간에 경영권 다툼이 일어난 롯데·효성·금호석화·한진 등을 살펴보니 총수 지위가 변한 곳은 없었다. 모두 가족 구성원 중 일부가 총수에게 도전장을 낸 경우인데, 공교롭게도 전부 실패로 돌아갔다.
두달 천하로 끝난 금호석화 ‘조카의 난’
가장 최근의 사례는 금호석유화학그룹이다.
지난 1월 최대주주인 박철완 상무가 박찬구 금호석유화학 회장과의 ‘특수관계인 관계 해소’를 선언하면서 갈등이 시작됐다. 박 상무는 박 회장에게 경영진 교체, 획기적인 고(高)배당 등을 요구했다.
박 상무는 금호그룹 창업주 고 박인천 회장의 차남인 고 박정구 금호그룹 회장의 아들이다. 박찬구 회장은 박정구 회장의 동생이며, 박 상무의 삼촌(작은아버지)이다. 따라서 재계에서는 박 상무의 행동을 ‘조카의 난’이라 불렀다.
박 상무 측은 모친과 장인(허경수 코스모그룹 회장)까지 동원해 회사주식을 장내매수하며 박 회장과맞섰다. 양측의 지분차가 크지 않다는 점에서 팽팽한 주총 표대결이 예고됐었다.
하지만 박 상무 측은 지난달 26일 열린 정기주총에서 완패했다. 회사 측이 내건 안건들이 60% 넘는 득표로 통과됐고, 박 상무가 제시한 주주제안은 전부 부결됐다.
재계는 박 상무의 경영권 찬탈 시도가 애초부터 무리였다고 보고 있다. 금호석화가 창립 후 최대 실적행진을 이어가고 있는 상황에서 삼촌에게 도전하는 악수를 뒀다는 점에서다. 국민연금 등 기관투자자가 박 회장의 손을 들어준 것도 마찬가지 맥락이다.
주총 직후 금호석화는 박 상무와의 고용계약을 해지했다. 해외영업 담당 임원으로 재직한 박 상무는 주총에서 선임된 상법상 등기이사가 아니기 때문에 회사 측이 계약을 해지하면 즉시 해임된다. 회사 측은 “박 상무가 충실의무를 위반해 사규에 의거해 해임했다”고 밝혔다. 이로써 ‘조카의 난’은 불과 두달여 만에 막을 내렸다.
한진家 남매전쟁, 누나의 완패
금호석화와 같은날 정기주총이 열렸던 한진그룹도 이날 주총을 기점으로 경영권 분쟁이 사실상 마무리 됐다.
한진가(家) 가족 갈등은 2019년 4월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이 숙환으로 별세하면서 시작됐다.
조 회장의 뒤를 이어 장남(조원태)이 회장 자리에 올랐지만, 경영에서 손을 뗐던 조현아(조원태의 누나) 전 대한항공 부사장이 복귀를 시도하면서 크고 작은 분란이 이어졌다. 당시 조 전 부사장은 2014년 발생한 이른바 ‘땅콩 회항’ 사태에 대한 책임을 지고 회사를 떠난 상태였다.
조 전 부사장이 경영복귀를 노리자 조 회장은 “선친이 타계하기 전 대한항공을 나에게 맡겼다”고 주장했다. 조 전 부사장은 자신의 복귀를 막으려는 독단적인 행태라며 반박했다.
조 회장은 또 ‘7성급 호텔’ 건립 계획이 무산된 바 있는 종로구 송현동 부지를 매각하기로 결정하는 등 과거 조 전 부사장이 지휘해온 그룹 내 호텔·레저사업을 대부분 정리했다. 표면적으로는 비주력 사업을 매각해 재무구조를 개선하겠다는 것이지만, 반대쪽에서는 ‘조현아 흔적 지우기’로 해석했다.
이에 조 전 부사장은 사모펀드 KCG, 반도건설과 손 잡고 이른바 ‘3자연합’을 구성, 조 회장 측과 맞섰다.
양측의 충돌이 정점에 이른 때는 작년 3월 정기주총이다. 3자연합은 조 회장 해임안을 상정하는 등 총공세를 펼쳤지만, 캐스팅보트인 카카오, 국민연금 등이 조 회장의 손을 들어줬다. 모친 이명희 정석기업 고문과 여동생 조현민 한진 부사장 또한 조 회장을 택했다.
이후 3자연합은 점차 동력을 잃게 된다. 특히 작년 11월 산업은행이 아시아나항공을 대한항공에게 넘기자 조 전 부사장은 큰 타격을 입게 된다. 자신과 대척점에 서 있는 조 회장이 산은을 든든한 우군으로 얻은 셈이 됐기 때문이다.
결국 3자연합은 지난달 한진칼(한진그룹 지주사) 정기주총에서 주주제안을 포기하기에 이른다. 산은이 조 회장의 백기사가 된 이상 지분 다툼이 무의미하다고 판단한 것. 3자연합 중 하나인 KCGI는 지난 2일 “주주연합간의 공동보유계약 해지를 공시했다”고 밝혔다. ‘반(反) 조원태 동맹’이 해체됐다는 얘기다.
롯데, 씁쓸함 남긴 ‘장자의 난’
롯데가(家)에서는 창업주 고 신격호 명예회장의 장남인 신동주 전 일본롯데 부회장이 동생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을 상대로 벌인 ‘장자의 난’이 유명하다.
2015년 7월 신 전 부회장은 자신을 해임하고 신동빈 회장 편에 섰던 일본롯데 이사들을 아버지(신격호)를 앞세워 해임했다. 완전한 복수전이 되는듯했던 이 사태는 신 회장과 이사들이 되레 당시 신격호 총괄회장을 대표이사회장직에서 해임함으로써 일단락됐다.
하지만 신 전 부회장은 신 총괄회장이 자신을 후계자로 지목했다며 신 회장을 압박했다. 일본롯데홀딩스 주총에 무려 여섯 번에 걸쳐 신 회장 해임안을 제출하고 여러 건의 소송을 제기했다.
그럼에도 주주들은 신 회장을 절대적으로 신임했다. 신 총괄회장이 은퇴한 2017년 이후 롯데는 ‘신동빈 원톱 체제’로 재정비됐으며, 급기야 신 회장은 2020년 7월 일본롯데홀딩스 사장으로 취임했다. 일본롯데홀딩스에서 신 회장의 우호지분은 종업원지주회, 관계사, 임원지주회사, 신 회장 개인지분 등 60%를 넘는다고 알려져 있다.
효성 조현문, ‘나홀로 전쟁’ 중
효성그룹에서는 조석래 명예회장의 차남 조현문 전 부사장(변호사)의 난(亂)이 세간의 주목을 받았다.
조 전 부사장은 형제들과 함께 착실히 효성그룹 경영에 참여해오다 2014년 1월 돌연 자신과 아들 명의의 회사 주식을 전부 매도해 효성과의 지분관계를 정리했다. 이후 조 전 부사장은 형인 조현준 효성그룹 회장을 비롯해 그룹 계열사 전·현직 임원들을 배임·횡령 등 혐의로 검찰에 고발하면서 가족과 완전히 등을 돌렸다.
조 전 부사장은 고발장에서 조 명예회장과 조 회장 등이 수익과 무관한 거래에 투자하거나 고가로 주식을 사들이는 방식 등으로 회사에 최소 수백억원의 손실을 입혔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대다수 주주들은 조 회장 편에 섰고, 마침내 조 회장은 2017년 부친의 뒤를 이어 그룹 총수자리에 올랐다. 아직 일부 재판이 진행 중이지만 조 회장 체제가 굳어지면서 조 전 부사장의 난은 사실상 막을 내렸다.
주주들, 가족분쟁보다 주가에 관심
이처럼 굴지의 대기업들에서 흔하게 ‘가족 쿠데타’가 발생했지만 모두 실패한 이유는 뭘까.
우선 명분보다 실리를 중시하는 주주들의 성향이 원인으로 꼽힌다. 증권사 한 관계자는 CNB에 “월가 점령 시위나 공매도 폐지 운동 등에서 보듯, 외국에서는 자본정의를 내세운 주주행동주의가 보편화 돼 있지만, 우리나라 주주들은 총수 일가 전횡에 대한 분노보다 주식가치에 더 관심이 크다”고 분석했다. 불확실성에 따른 주가하락 염려 때문에 결국 기존질서를 바라게 된다는 얘기다.
도전장을 내민 쪽의 정당성 자체가 부족하단 지적도 있다. 재벌가 분쟁의 주요 사례들을 보면 대부분 재산 상속, 경영권 등에 관한 것들이다. 사업재편, 주주가치제고 등과는 거리가 있다.
전문가들은 재벌가의 분쟁이 기업가치를 훼손하고 경영효율성을 떨어뜨리는 요인이라고 지적한다.
구병두 (사)한국빅데이터협회 부회장은 CNB에 “총수일가가 지배하고 있는 한국 재벌의 특성상 혈족들은 주도권 다툼에서 이기지 못하면 모두 다 잃는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가족 분쟁을 줄이는 근본적인 해결책은 이사회의 경영 참여를 확대하고 주주의 권한을 높여 총수에게 집중된 권력을 분산하는 쪽으로 지배구조를 개선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CNB=도기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