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세들간 갈등 끝나니 ‘조카의 난’
조카가 삼촌들 화해에 태클건 셈
재벌가 ‘고질병’ 언제나 사라질까
‘삼촌’ 박찬구 금호석유화학 회장과 ‘조카’ 박철완 상무 간의 경영권 분쟁이 시간이 흐를수록 첨예해지면서 금호가(家)의 옛 수난사(史)가 다시 조명받고 있다. 1950~60년대 금호고속과 ‘삼양타이야’로 시작된 금호 신화는 무리한 사업확장으로 인한 워크아웃과 이후 그룹 재건, 아시아나항공의 쇠락 등 영욕(榮辱)으로 얼룩졌다. 특히 오너가 2세들 간 분쟁에 이어 최근 ‘조카의 난’까지 발발하자 이를 보는 재계의 시선이 착잡하다. CNB가 금호의 고난한 반세기를 되짚어봤다. (CNB=도기천 기자)
지난해 아시아나항공 매각으로 경제계 이슈의 중심에 섰던 금호가(家)가 올해는 금호석유화학그룹(이하 금호석화)의 내분으로 주목받고 있다.
금호석화의 경영권 분쟁은 지난 1월 최대주주인 박철완 상무가 박찬구 금호석유화학 회장과의 ‘특수관계인 관계 해소’를 선언하면서 시작됐다. 박 상무는 박 회장에게 경영진 교체를 요구하며 도전장을 내민 상태다.
박 상무는 금호그룹 창업주 고 박인천 회장의 차남인 고 박정구 금호그룹 회장의 장남이다. 박찬구 회장은 박정구 회장의 동생이며, 박 상무의 삼촌(작은아버지)이다. 따라서 재계에서는 이번 박 상무의 행동을 ‘조카의 난’으로 부른다.
박 상무의 난은 일회성으로 끝날 것 같지는 않아 보인다. 겉으로는 주주가치 제고를 내세우며 배당 확대를 요구하고 있지만 이는 시작에 불과하다는 게 재계의 분석이다. 궁극적인 목표는 경영권 장악이고, 배당 확대는 주총 표심을 얻으려는 1단계 전술일 뿐이라는 얘기다.
박 상무는 전년 대비 무려 7배나 늘어난 배당액을 요구하고 있다. 지나친 배당은 투자할 자금을 갉아먹게 된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아는 박 상무가 상식 밖의 행동을 취했다는 점에서, 결국 주주들의 환심을 사기 위한 전략으로 읽힌다.
지난해 말 주주명부가 폐쇄됐기 때문에 올해 정기주총에서는 의결권이 인정되지 않는 지분을 매입하고 있는 점도 장기전을 대비한 포석으로 보인다.
박 상무는 지난 2일 회사 주식 9550주를 장내 매수해 지분율이 10.0%에서 10.03%로 높아졌다. 박 상무의 모친인 김형일씨도 같은날 지분율 0.08%에 해당하는 2만5875주를 매입했다. 박 상무의 장인인 허경수 코스모그룹 회장 역시 지난 9일 1만4373주를 장내 매수했다. 두 사람은 모두 박 상무 측 특수관계인으로 등재됐다.
이를 모두 합하면 박 상무 측의 현재 지분율은 10.16%로, 박 회장 지분 14.84%(특수관계인 포함)를 바짝 추격하고 있다. 박 상무는 최근 기자간담회에서 “저와 제 가족은 회사와 함께 운명공동체로 간다”고 선언했다. 사실상 선전포고인 셈이다.
‘택시 2대 신화’ 역사 저편으로
이처럼 금호석화가 내분에 휩싸이자, 재계에서는 금호가의 과거 ‘형제 분쟁’이 다시 회자되고 있다. 이번에 조카로부터 공격받고 있는 박찬구 회장이 그의 형인 박삼구 전 금호아시아나그룹 회장과 벌인 경영권 갈등 얘기다.
금호는 1946년 박인천 창업주가 전남 광주에서 택시 2대로 시작한 기업이다. 금호아시아나와 금호석화의 모(母) 기업인 금호산업은 60~70년대 경부선과 호남선 고속버스 사업에 뛰어들어 ‘금호 신화’를 창조했다. 이후 토목·건축을 비롯해 공항․물류시설, SOC, 환경, 주택, 도로 등 건설 전 분야에서 활발한 사업을 펼친 결과, 2000년대 초반에는 재계서열 7위까지 올라갔다.
박삼구 회장과 박찬구 회장은 한때 재계에서 ‘형제경영의 모범’으로 칭송 받았지만 2006년 금호그룹이 대우건설, 대한통운을 인수하는 과정에서 견해 차이를 보이며 틀어졌다. 결국 대우건설 등의 인수는 그룹 전체를 뒤흔드는 유동성의 위기를 불러왔고, 금호산업이 워크아웃 되기에 이른다.
이후 박찬구 회장은 금호석화의 계열분리를 시도하며 지분 경쟁을 벌였다. 2011년 박찬구 회장은 공정거래위원회에 계열분리를 신청했고, 이후 대법원 판결로 금호석화 등 8개 계열사가 그룹에서 완전 분리됐다. 이로써 형제는 서로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게 된다.
이런 가운데 양측은 여러 건의 소송과 폭로전을 벌였다. 이로 인해 박찬구 회장은 비자금 조성 의혹 등으로 검찰에 기소돼 실형을 선고받았으며, 박삼구 회장도 4000억원대 배임 혐의로 고소당했다. 양측은 상표권 소송을 비롯, 아시아나항공 주식매각청구소송, 아시아나항공 주주총회 결의 무효소송과 형사고발건 등으로 전면전을 치렀으며, 심지어 박삼구 회장이 박찬구 회장의 운전기사를 고소한 사건도 있었다.
두 사람은 최초 갈등이 시작된지 10여년 만인 2016년이 돼서야 서로 간에 모든 소송과 고발을 취하했다.
하지만 금호가의 불행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박삼구 회장이 채권단에 넘어간 금호산업과 금호고속을 되찾는 과정에서 금호아시아나그룹 전반의 재무구조가 급격히 악화됐다.
결국 그룹의 핵심계열사인 아시아나항공과 그 자회사들이 매각 수순을 밟게 된다. 박 회장은 아시아나를 판 자금으로 빚을 청산하고 그룹을 재건할 심산으로 2019년 12월 HDC현대산업개발과 2조5000억원 규모의 매매계약을 체결했다.
하지만 코로나19 사태가 터지면서 매각 협상이 결렬됐고, 결국 채권단인 산은은 결국 작년 11월 아시아나항공을 대한항공에 넘겼다. 결과적으로 박 회장은 한푼도 못건지고 아시아나를 날린 셈이 됐다.
금호家 마지막 자존심 건드린 조카
비록 금호가의 자존심인 아시아나는 금호 품을 떠났지만 박삼구-찬구 형제 간에는 극적인 화해 무드가 싹트기도 했다.
금호그룹이 아시아나항공 매각 무산에 따른 자구책의 일환으로 금호리조트를 매물로 내놨는데 금호석화가 손을 내민 것. 금호석화는 지난달 23일 이사회를 열어 총2553억원에 금호리조트를 인수하기로 결정했다. 형제의 난 이후 두 사람 사이의 첫 거래다.
하지만 이는 박 상무에게 공격의 빌미를 준 셈이 됐다. 박 상무는 “이사회가 부채비율 400%에 달하는 금호리조트를 높은 가격에 인수하기로 결정한 것은 회사의 가치와 주주의 이익을 훼손하는 행위”라며 이사진 교체를 요구하고 있다. 박 상무는 오는 26일 주총에서 이사 선임 등을 놓고 회사 측과 표대결을 벌일 예정이다.
앞뒤 상황을 종합하면, 결과적으로 조카(박 상무)가 삼촌들(박삼구-찬구 형제) 간 화해를 가로막고 있는 형국이 됐다.
금호가의 이런 모습을 바라보는 재계의 심정은 착잡하다. 한 대기업그룹 지주사의 임원은 CNB에 “아시아나항공이 대한항공에 넘어감으로써, 이제 마지막 남은 금호 신화의 자존심이 금호석화인데 내부적으로 갈등을 겪고 있어 안타깝다”고 말했다.
<한국재벌사>의 저자 이한구 수원대 명예교수는 “가족경영을 기반으로 하는 한국 재벌의 특성상 대부분 재벌기업들이 숱한 분쟁을 겪었고, 금호 역시 2세들간 갈등에 이어 이번에 2세와 3세가 충돌했다”며 “삼성, 현대, LG 등 숱한 사례에서 보듯, 그룹의 덩치가 커지면 자연스레 가족 간에 계열분리가 이뤄지게 되는 만큼 이번 금호석화의 경우도 기업 분리로 종착될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CNB=도기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