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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수첩] 글쎄, 코에 빨대가 박힌다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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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선명규기자 |  2021.03.18 09:31:00

플라스틱 빨대 사용 자제를 외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환경오염의 주범으로 지목 됐기 때문에 외면해야 한다는 외침이다. 상황이 이렇자 최근 음료업체들도 빨대를 제거한 음료나 생분해 되는 친환경 빨대를 하나둘 내놓고 있다. (사진=선명규 기자)

 

안면은 틀대로 텄다. 그렇다고 서로 살갑진 않다. 특별히 말을 주고받은 적도 없다. 하지만 안다. 그는 분명 친절한 사람이다. 과묵한 그가 시중에서 자주 동나는 곰O맥주나 OO칩이 방금 들어왔다고 귀띔해주는 것만 봐도 그렇다. 단골 대우가 확실한 마음씨 좋은 편의점 직원이다.

그에게 또 한 번 도타운 감정을 느낀 건 며칠 전. 매대에 올라온 플라스틱 빨대 없는 음료를 한아름 안아다가 계산대에 올려놓았을 때였다. 최근 음료업체들이 환경을 생각해 빨대를 뺀 음료들을 내놓고 있다는데, 불편함은 없을까 알고 싶어서 그러모은 거였다. ‘무빨’ 음료들만 계산하겠다며 내놓자 그의 눈이 돌변했다. 친절을 베풀 기회를 포착한 맹수의 눈빛으로 바뀌며 희번덕거렸다. 바코드를 찍은 그는 카드를 건네받기도 전에 서랍을 뒤져 빨대 한 다발을 함께 내주었다. 마스크를 써서 입모양은 볼 수 없었지만 그는 분명 웃고 있었던 것 같다. 눈이 반달이 됐다.

집에 돌아와 호의 가득한 빨대 꾸러미를 내려놓고 제품들을 하나씩 살폈다. 얇은 비닐을 벗겨서 그대로 마실 수 있는 제품은 쉬웠다. 그냥 까서 마시거나 컵에 부어 마시면 되니까. 예컨대 요구르트 같은 건 난이도 최하다. 우유팩이 고난도다. 손아귀 힘으론 못 뜯는다. 스트롱맨급 악력이 없다면 가위가 있어야 한다. 방에서 가위를 가져와 팩에 새겨진 절취선을 자르다가 잊었던 본능이 깨어났다.

나에게 파괴본능이 있다는 건 어릴 적 삶은 계란을 깔 때 처음 알았다. 아무리 세심하게 손톱으로 살살 긁어도 흰자가 같이 뜯겼다. 흰자가 벗겨질대로 벗겨져 이내 노른자가 누런 눈을 들어냈을 때 꽉 움켜쥐어 터트리고야 말았다. 그때의 감정을 또 느낀 것이다. 가위로 우유 멸균팩 모서리를 자르자 우유가 하얀침을 질질 흘리며 쏟아졌다. 얄팍한 인내심이 끊어졌다. 움켜쥐었다. 하얀 액체가 김치냉장고며 식탁이며 바닥이며 사방에 튀었다. 나는 파괴의 신이었다.

빨대만 있으면, 빨대만 쓰면 파괴본능은 다시 얼굴을 감출텐데. 그때 떠올렸다. 태평양이 고향인, 이름도 예쁜 올리브바다거북의 사진을. 처음 봤을 때 역지사지의 고통이 자동재생됐다. 코에 빨대가 박힌 채 발견되어 구조대가 핀셋으로 빨대를 뽑는 장면이다. 올리브바다거북은 고통스러운 나머지 눈을 질끈 감았고 그 광경을 보는 나도 눈을 감았다.

그러나 이제 불편하다고 고개 돌릴 일이 아닌 것이다. 번거롭다고 짜증낼 일도 아니다. 되돌릴 순 없지만 이제라도 인간들이 노력하기 시작한 건 고무적이다. 소비자가 음료회사에 편지를 보내 빨대가 필요없다는 의사를 명확히 하자 바로 수용한다든가, SNS에서 제로 웨이스트 챌린지(환경 보호를 위해 쓰레기 배출량을 줄이는 캠페인)를 벌이며 빨대없는 음료 구매 인증샷을 올리는 것만 봐도 그렇다. 불편해도 해야하는 일이다. 마음씨 좋은 판매자의 선의도 이제 그만. 나는 가위와 다회용 빨대를 가지고 다니기로 했다. 귀찮지 않냐고? 글쎄, 코에 빨대가 박힌다잖아요!

(CNB=선명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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