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화거는 동안도 참을 수 없다
지루함 지워주는 ‘짧은 콘텐츠’
컬러링·드라마 등 두루 활용돼
‘빨리빨리 문화’ 힘입어 ‘훨훨’
사람의 인내심은 얼마나 될까? 적어도 한국인은 3분이란 게 정설이다. ‘컵라면 이론’이 이를 뒷받침한다. 컵라면 용기에 물 붓고 뚜껑을 열어보지 않은 채 끝까지 참는 한국인은 드물다. 설익어도 좋다. 완숙이 아니어도 상관없다. 오래 기다리느니 그냥 해치워버리는 습성이 있다. 장르 불문 콘텐츠를 볼 때도 마찬가지. 터무니없이 길면 안 먹힌다. 요즘 대세인 ‘숏폼 콘텐츠(short-form contents)’의 등장 배경이기도 하다. 단 수초에서 수분 사이에 눈을 붙드냐 마느냐의 싸움. 최근 킬러 콘텐츠 확보에 주력중인 이통사들도 이 ‘짧음의 미학’을 활발히 만들고 있는데, 종류가 컬러링, 드라마 등으로 다양하다. 단 공통점은 하나. 빠른 전개다. (CNB=선명규 기자)
“얘야 나도 임영웅이 전화받게 해다오”
중랑구에 사는 김보라씨는 처음에 무슨 말인가 했다. 어머니가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더니 대세 트로트 가수 임영웅이 받았다는 거다. 머리가 복잡해진 김씨는 거듭 물었다. “그 이모가 안 받고? 둘이 무슨 사이인데요?” 그러자 어머니가 통화버튼을 눌러 보여주었다. 진짜 그 ‘트롯맨’이 나왔다. 음성만이 아닌 영상과 함께 나타났다. 화면을 가득 메운 그는 해사한 얼굴로 구성지게 “대박나라”라고 꺾어 부르며 새해 인사를 건넸다. 이모가 “어~ 또 어쩐 일이여”라며 받을 때까지 계속. 어리둥절한 김씨는 얼핏 들어본 트로트 가사가 떠올랐다. “니가 왜 거기서 나와~”
상대가 성질 급한 이라면 1초만에 통화가 되겠지만, 부재 중이라면 기다림은 길어진다. “연결이 되지 않아 삐 소리 후….” 고작 1분 남짓인데 이 안내멘트가 나오기 직전이면 보통 지루함을 견디다 못해 폭발직전에 이른다. 참을성이 인화성이 된다. ‘뚜우~ 뚜우~’ 하는 신호음이 길어지면, 이 박자에 맞춰 마음에 불길의 쓰나미가 덮친다.
SK텔레콤이 내놓은 보이는 컬러링 ‘V 컬러링’은 평온한 성정을 위협하는 불꽃을 막아주는 차단벽이다. 성질이 불연성이다. 짧은 무료함도 견딜 수 없는 이들에게 눈요깃거리가 되어 인내의 시간을 늘려준다.
설정하기 나름이다. 김연아, 임영웅 등 인기높은 사람이나 펭수 같은 화제를 모으는 캐릭터가 등장하는 영상, 좋아하는 가수의 뮤직비디오를 ‘대기용 볼거리’로 걸 수 있다. 독특한 시도를 하고 싶다면 ‘치멍’(잔잔하게 치킨이 튀겨지는 장면을 보며 멍 때리기)이 제격. 이처럼 플랫폼에 있는 영상을 쓸 수도 있지만 ‘틱톡’처럼 자유롭게 만들거나, 찍어둔 동영상을 그대로 올려도 된다. 1일을 3개 시간대로 나눠서 다른 영상을 설정하거나, 최대 7개의 전화번호에 각각 다른 영상을 보이게 할 수도 있다. 개성의 분할이 가능하다.
지난해 9월 첫 선을 보인 이 서비스는 약 3개월 만에 가입자 약 100만명을 끌어 모았는데, 연령별로 어떤 영상이 주로 선택됐는지를 보면 그 나이대 관심사를 알 수 있다.
가령 10-20대는 재미(약올링, 받을까 말까 댄스)와 아이돌(BTS, SuperM, 백현, 태민), 애니메이션 영상을, 30~40대는 캐릭터(펭수), 셀럽(김연아, 박진영) 콘텐츠를 선호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50~60대는 자연 풍경이나 트로트(임영웅, 영탁) 콘텐츠를 가장 많이 설정했다. SK텔레콤에 따르면 특히 임영웅과 BTS의 Dynamite 뮤직비디오 영상은 전 연령대에서 고르게 인기를 끌며 가장 많이 설정한 콘텐츠로 집계됐다.
성격이 빠른 콘텐츠의 빠른 안착은 동종업계 간 합종연횡도 끌어냈다. SK텔레콤과 KT가 지난달 업무 협약을 맺고 KT 가입자도 해당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게 한 것이다.
한명진 SK텔레콤 구독형 상품 CO장은 “V 컬러링 서비스가 성공적으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며 “이번 KT 고객에 대한 공동 서비스 제공을 시작으로 서비스 확장과 화제성 콘텐츠 발굴을 통해 고객에게 재미와 즐거움을 줄 수 있는 구독형 영상 서비스로 사랑받을 수 있도록 하겠다”고 밝혔다.
편당 15분 드라마 “실화냐”
드라마는 분량이 길다. 편당 대개 90분에 육박한다. 그보다 짧은 장르인 시트콤도 30분을 상회한다. 사람들은 말한다. 글이건 영상이건 늘리기보다 줄이는 게 어렵다고. 15분 내외에 기승전결도 있고, 희로애락도 있다. 숏폼 드라마에는.
KT가 자사 OTT(온라인동영상서비스) 첫 오리지널 드라마로 제작한 ‘연남동 패밀리’는 총 8부작. 얼핏 미니시리즈 같지만 아니다. 회당 15분~20분 분량으로 구성됐다. 시간을 전부 합쳐도 일반 드라마 두 편 수준이다. 따라서 호흡이 빠르다. 1회를 예로 들면 등장인물들의 성격 소개와 집을 쟁취하기 위해 가족들 간에 사투를 벌여야 하는 이유를 한 회차에 전부 담았다. 잠깐 한눈이라도 팔면 전개를 따라가기에 어려움을 겪을 수도 있지만 흡인력이 상당하다.
LG유플러스는 해당 콘텐츠 사업의 덩치를 키우고 있다. 지난해 국내 1위 숏폼 콘텐츠 제작사인 플레이리스트와 손을 잡고 양사의 장점을 모으고 있다.
플레이리스트가 제작하는 콘텐츠에 LG유플러스의 가상현실(VR)과 증강현실(AR) 기술을 접목해 VR용 웹드라마, AR뮤직비디오, 3D PPL 등 다양한 종류의 5G 콘텐츠를 공동 제작하는 것이 핵심.
LG유플러스 관계자는 CNB에 “현재 국내 최초 8K VR 드라마 ‘리필-이프온리’의 촬영을 마친 상태”라며 “후속작업이 끝나면 ‘U+VR’ 앱에서 오픈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양사는 중장기적 관점에서 웹드라마, 예능 콘텐츠와 연계한 커머스 등 미디어 기반의 신사업 기회 발굴과 자체제작 오리지널 콘텐츠의 해외판매도 추진할 방침이다.
“짧아야 맛있다”
숏폼의 성공 가능성은 보장된 것인지도 모른다. 15초짜리 짧은 동영상을 제작해 공유하는 동영상 기반 SNS 플랫폼 ‘틱톡’이 세계적 인기를 끄는 사례만 봐도 그렇다. ‘틱톡’은 미국에서만 1억명 이상, 150여개 국가에서 10억명이 사용 중이며 국내 사용자도 1000만명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졌다.
하나 더. 짧은 게 맛있다는 이론은 입증된 바 있다. 스낵 컬처(Snack Culture)란 단어를 기억하시는지. 2010년쯤 스마트 기기가 대중화되면서 장소에 구애없이 과자(스낵)를 먹듯 5~15분 분량의 짧은 영상 콘텐츠를 소비하는 사람이 늘자 생긴 말이다. 숏폼은 스낵 컬처를 팍팍 줄인 형태다.
한 대중문화 관계자는 CNB에 “이통사는 숏폼을 기획하는 것은 물론 배급까지 해야하는 입장이기 때문에 질도 중요하지만 짧고 빠르게 소비되는 영상물을 최대한 많이 확보하는 게 유리한 고지를 선점하는 지름길”이라고 조언했다.
(CNB=선명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