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구소리가 끝나는 저녁이 오면
독특한 그림들, 셔터 전면 등장
‘힙(Hip)지로’가 이젠 ‘예(藝)지로’
당장은 가치를 환산할 수 없다. 도시의 배경 곳곳을 새롭게 디자인하는 작업은 미래를 밝히는 일이다. 음습한 골목에 벽화 새기기, 공공시설물에 따스한 그림 덧칠하기가 대표적인데 변화는 천천히 일어난다. 침울했던 길이 환해지면 주민 불안이 덜어지고, 시설물 주변에 쌓이던 쓰레기는 점차 사라진다. CNB가 기업들의 이 같은 ‘디자인 사회공헌’을 연재하고 있다. 세 번째는 을지로 뒷골목에 예술을 덧입힌 신한카드다. (CNB=선명규 기자)
[관련기사]
① KCC의 붓질, 거리 곳곳에 소방관 세우다
② 기업은행 ‘IBK희망디자인’, 백년 유산 수제화거리 바꾸다
낮 12시. 일과의 정점인 시간. “툭, 드르륵”. 트럭에서 짐을 내리고 끄는 소리. “위이잉”. 공구가 정신없이 돌아가는 소리. 을지로 뒷골목의 소음은 바쁘다. 이러한 아우성은 근대 제조업의 산실로 불리는 이 거리가 제대로 기능하고 있다는 신호기도 하다. 책 <다시, 을지로>(김미경 저)에 나오는 묘사처럼 ‘제조업 장인들의 삶이 있는 곳’은 매일 이렇게 흘러간다.
저녁 6시. 하루의 근로가 저문 시간. 거리의 모습이 급격히 바뀐다. 생활의 터전에서 예술의 장으로. 일 마친 가게를 덮는 문이 내려오면 그곳에 그림이 새겨져 있다. 낮에 썼던 도구들, 꽃밭, 개성있는 캐릭터 등이 해가 지면 작화가 되어 나타난다. 장인들이 지배하던 곳이 예술인의 거리로 하룻저녁에 전환된다.
개성 넘치는 그림들…밤낮 풍경 달라져
낮과 밤의 외관이 달라지기 시작한 건 지난해 7월. 신한카드가 서울시 중구청과 함께 진행한 거리환경 개선 디자인 작업으로 모습에 ‘일교차’가 생겼다. 지역 소상공인과 아티스트를 잇는 ‘을지로 셔터갤러리’ 프로젝트로, 이곳 상점의 이야기가 담긴 고유의 볼거리를 제공해 간접적인 홍보를 돕자는 것이 취지다.
그러므로 개성이 있을 수밖에. 가게마다 그림의 등장소재가 다르다. 전동공구, 스패너, 드라이버, 나사, 타일, 도기 등이 집집에 그려졌다. 각자의 업종 특성을 반영한 것이다. 문 닫은 상점이 영업시간에 무엇을 다루는지, 야간에 그림을 통해서 식별할 수 있다.
전문가에 더해 다양한 직군에서 참여했다. 김건주, 김다예, 김선우, 275C, 잭슨심 등 아티스트 5명과 신한카드 임직원, 이 회사 고객자원봉사단이 합심해 그림을 그렸다. 그렇게 24개 상점의 낡은 셔터 43개가 독특하고 따스한 그림들로 탈바꿈 했다. 이 동네의 예명을 힙지로(유행에 밝다는 뜻의 ‘힙(Hip)’과 을지로의 ‘지로’를 합친 말)에서 이젠 예(藝)지로로 바꿔 불러도 좋은 이유다.
이번 작업이 시사하는 또 다른 점이 있다. 폭넓게 알려지지 않은 을지로의 정체성이 드러났다. 이곳 장인과 예술인은 이음동의어로 봐도 좋은데, 자세한 까닭은 <다시, 을지로>에 나온다.
‘문화예술가들은 문화예술 실천의 장에 을지로의 장인들을 끌어들이기도 한다. (중략) 이들은 작가들과 대화하며, 혹은 예술 작업에 필요한 재료를 만들어 주며 프로젝트의 일원이 된다. 을지로의 제조업 장인들은 청년 예술가들과 함께 을지로 특정적 예술을 만들어 나가는 숨은 공신들이다’. 제조와 예술은 이 거리에서 늘 함께 숨 쉬고 있었다.
전국으로 뻗는 상생…다음은 대구로
특정 지역의 변신은 여기가 끝이 아니다. 을지로 셔터 갤러리는 신한카드의 지역상생히어로(Here:路) 프로젝트 1탄이다. 둘째는 대구, 정확히는 서문시장이다. 전편과 차이가 있다면 특별한 공간 조성과 미디어아트 도입으로 사업과 장르의 범위를 넓혔다는 점. 대대적 도모의 결과물은 지난해 11월 공개됐다.
예컨대 시장 외벽에 이 도시의 밤이 비친다. 대구의 밤 풍경을 주제로 제작한 ‘미디어 파사드’가 어둠을 밝힌다. 야시장의 활성화를 위해 설치한 현란한 조명쇼로 조망 1순위다.
볼거리만 생긴 건 아니다. 상인이든 방문객이든 누구나 쉬어갈 수 있는 ‘만남의 광장’, 성곽·툇마루 등 문화유산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해 만든 소통공간 ‘서문마루’ 등의 편의시설이 들어섰다. 예술과 휴게가 어우러진 장으로 모습이 바뀐 것이다.
신한카드 관계자는 “지역사회 기반 ESG프로그램인 히어로(Here:路) 프로젝트가 지역 발전에 기여하고 소상공인, 지역 작가, 시민을 연결하는 가교 역할을 해주길 기대한다”며 “앞으로도 ESG전략에 맞춘 사회공헌 활동을 통해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다할것”라고 밝혔다.
(CNB=선명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