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후원하기
  • 인쇄
  • 전송
  • 보관
  • 기사목록
  • 오탈자제보

[기자수첩] 가족의 음식 ‘통닭’(a.k.a. 치킨)

  •  

cnbnews 선명규기자 |  2021.01.21 09:27:51

드라마 응답하라 1988에서 덕선이 가족이 전기구이통닭을 나눠 먹는 장면 갈무리

웃음 버튼이다. 눈물 자판기도 하다. 한없이 딱딱해진 마음이 누군가를 긁을까, 그래서 상처 입힐까 싶을 때 누른다. KBS ‘다큐3일’ 수원 통닭골목편이다. 76세 아버지가 건장한 오토바이를 이끌고 식당 앞에 도착한다. 카메라를 보고 말한다. "우리 딸이 치킨 먹고 싶다 해서 사러왔습니다." 리포터가 묻는다. "이 시간에 오자마자 닭이 먹고 싶대요?" 밖이 환하다. "어린애도 아니고 올해 나이가 쉰네 살인데…. 내가 볼 땐 항상 어린애니까 아기라고 생각하죠. 그런데 오자마자 얘기해서 알았다. 내가 사다주마 하고 나왔어요" 환하게 웃는 얼굴에 주름길이 한여름 밭고랑처럼 깊숙이 났다. 가족과 함께 걸어온 여로가 그대로 정착한 것이다.

손에 따끈한 봉투를 건네받아 든 남자는 오토바이에 앉아 발걸음을 재촉한다. “통닭 사서 집에 가면 애들이 좋아하니까 더이상 안 바라지요. 그 이상 좋은 게 어디 있어. 우리 가정 다 편안하고 애들 건강하고 다들 그런 마음으로 지내는 게 좋은 거 아니에요?" 행복이 다른 게 없어요. 이런 게 행복이지" 말의 잔상을 흘리며 남자는 빠른 오토바이에 몸을 얹고 골목길로 사라진다. 프로그램이 끝나면, 통닭을 앞에 두고 두런두런 대화하는 한 가정의 모습이 떠오르며 굳었던 마음이 갓 튀긴 닭다리처럼 눅진해진다.

통닭은 가장의 땀이요 가족의 음식이다. 어릴 적 먹던 통닭은 포장부터 달랐다. 단출했다. 누런 종이봉투가 흔했고 몇 안 되는 프랜차이즈도 포일로 통닭을 감싼 뒤 얇은 상자에 담아서 줬다. 마감은 고무줄 튕기기가 전부였다. 밀봉될 리 없는 통닭을 아버지는 이따금 퇴근길에 품속에 끼고 집에 들어오셨다. 음식의 온기를 유지할 요량이었는지, 식구들을 깜짝 놀래줄 심산이었는지는 모르겠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그 모습이 마법사 같았다. 양복 재킷을 자랑스레 걷으면 김이 피어올랐으니까. 재킷 안에서 통닭의 훈기가 크게 돌다가 박차고 나왔다. 그 연기가 공기에 흩어지는 장면을 어린 눈에 담았다. 아마도 그날 아버지의 양복 반대편 주머니엔 노란 월급봉투가 들어있었을 것이다. 한 달의 땀이 밴 노란 봉투가.

형제가 달려들어 고무줄을 허겁지겁 벗겨내면, 통닭은 기름바다에서 나온 지 오래 됐음에도 안에서 바짝 엎드린 채 육수를 흘리고 있었다. 아버지의 체온 때문에 꽤나 더웠을 게다. 다시금 빛을 본 통닭은 새로 누울 접시도 허락하지 않았다. 뚜껑을 열거나 봉투를 반으로 가르면 그 자체로 그릇이 되니, 이렇게 소박할 수 없는 캐릭터다.

치킨의 유래에 대해선 설왕설래가 있다. 한동안 미국의 흑인 노예들이 농장주가 먹다 남은 닭의 부위를 튀겨 먹는 음식이란 게 정설처럼 여겨졌다. 그런데 최근에는 백인들도 먹었다는 주장이 거세다. 진실이 뭐가 됐든 나는 보편적으로 먹었다고 믿는다. 특정 집단만 먹었을리 없다. 맛있으니까.

국내로 시선을 돌려볼까. 언제부터 먹었을까? 치킨의 역사는 생각보다 유구하다. 1450년 경 쓰인 조선시대 조리서 ‘산가요록’에 '포계'라는 요리가 나온다. 통째로 구울 포(炮), 닭 계(鷄)를 쓴다. 닭고기구이라는 뜻이다. 참기름, 식초, 간장을 사용하고 반죽 없이 기름에 지져 요리했다고 책에 나온다.

선조들이 즐겨 지져 먹던 닭은 현재에 이르러서도 각광받고 있다. 2019년 KB금융그룹이 발간한 자영업 분석 시리즈 '치킨집 현황과 시장 여건 분석' 보고서에 따르면 2018년 기준 전국 치킨 브랜드 수는 409개, 2019년 2월 기준 치킨집 수는 8만7000여 곳이다. 우리가 어떤 민족인가 묻는다면, 치킨의 민족이라고 말할 수도 있는 수준이다. 전란, 정치적 혼탁 같은 풍파를 겪으면서도 역사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이토록 굳건한 음식을 먹으면 극복을 향한 강건한 힘도 생기지 않을까? 지독한 바이러스가 마음을 딱딱하게 할지라도 가족과 치킨 한 마리 나누며 도타운 한해 보내시길.

(CNB=선명규 기자)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