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임대차법 ‘계약갱신권’ 보장했지만
집주인 “들어가니 비워달라” 한마디에
전·월세 인상률 ‘5% 제한’ 있으나마나
임대인 처벌규정 없어 세입자 속수무책
“집주인이 전세금을 올려달라는 대로 올려줘야 할 처지입니다. 세입자를 위한 법이라는데 왜 이렇게 힘든지 모르겠습니다.”
지난 8월부터 개정·시행된 주택임대차보호법(일명 임대차3법)의 허점이 속속 드러나고 있다. CNB가 여러 건의 제보사례와 국토교통부, 주택임대차분쟁조정위원회 등을 두루 취재한 결과, 임대인(집주인)이 임차인(세입자)에게 ‘실거주’를 구실삼아 전세금을 법적 상한선 이상으로 올려 받더라도 현행법상 규제할 방법이 없는 것으로 확인됐다. (CNB=도기천 기자)
집주인 ‘뻥카’에 속타는 세입자들
임대차3법의 핵심은 전월세상한제와 전월세신고제, 계약갱신청구권이다. 2년 계약으로 전세살이를 하고 있는 세입자가 집주인에게 1회(2년 추가)에 한해 계약갱신을 요구할 수 있는 권리다. 이때 집주인은 5%이상 전세금을 올릴 수 없다. 법안을 최초 발의한 더불어민주당 박주민 의원은 계약갱신청구권의 기한을 정하지 않도록 했으나 법안심사 과정에서 최대 4년(2년+2년)으로 수정돼 통과됐다.
하지만 전월세 시장에서는 집주인(직계존비속 포함)이 실제 거주할 의사가 없음에도 이를 구실 삼아 세입자의 계약갱신요구권을 무력화하는 사례가 갈수록 늘고 있다.
CNB에 제보한 전제성씨(52·가명)의 경우가 대표적이다.
전씨는 작년 2월 서울 마포구 상암동의 한 아파트단지에 전세입주해 내년 2월 전세만기를 앞두고 있다. 그는 임대차3법 시행 소식을 듣고 지난달 집주인에게 2년 더 계약을 연기하고 싶다고 통보(계약갱신청구권 행사)했다.
그러자 집주인은 “부모님이 (전씨 거주 아파트에) 입주할 예정이라 계약갱신이 불가하다”고 답했다.
이후 집주인은 부동산중개업소를 통해 전씨에게 “시세대로 재계약할 의사는 없느냐”고 물어봤다. 시세대로 올려준다면 부모 입주는 없던 일로 하겠다는 의미였다.
문제는 시세가 법적 상한선(5%)을 훌쩍 뛰어넘는다는 점. 전씨는 작년 2월 5억6천만원에 해당 아파트를 전세계약했는데 지금 시세는 7억원이 이른다. 따라서 전씨가 시세대로 계약하면 무려 25%(1억4천만원)나 올려줘야 한다.
그래서 전씨는 집주인에게 6억5천만원 선에서 합의하자고 제안했다. 하지만 집주인은 여전히 7억원을 고집했고, 양측은 며칠간 줄다리기를 하다 결국 6억7000만원 선에서 타협점을 찾았다. 이는 법적상한선 5억8800만원(5%인상 기준) 보다 무려 8200만원이나 높은 금액이다.
주변시세와 이사비용을 감안하면 다른 선택지가 없었던 전씨는 비록 합의는 했지만 임대인에게 속았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애초부터 집주인이 전셋값을 올리려고 거짓으로 실거주 운운했을 가능성 때문이다.
‘갑질’이 위법은 아니다?
CNB는 이 사례의 위법성 여부를 국토교통부 주택정책과와 대한법률구조공단 주택임대차분쟁조정위원회에 각각 질의해 봤다. 분쟁조정위는 임대인과 임차인 간 분쟁을 중재·조정하는 법무부 산하 공공기관이다.
결론부터 말하면 두 기관의 공통된 답변은 “위법성을 따지기 힘들다”였다.
분쟁조정위 관계자는 CNB에 “임차인의 계약갱신청구권을 임대인이 부당하게 거절한 경우 손해배상 청구대상이 된다. 하지만 법적상한선을 초과하는 전세금을 받기 위해 임차인과 거래를 시도한 행위 자체를 ‘부당한 계약갱신청구 거절’로 보기는 어렵다”고 말했다.
국토부 관계자는 “임대인이 전셋값을 올리기 위한 협상 카드로 실거주 운운하는 경우까지 제재하는 규정은 없다”며 “단, ‘전세금을 30% 올려달라. 안올려주면 내가 들어가 살겠다’는 식의 노골적인 ‘조건부 갱신거절’은 부당한 사례로 볼 수도 있다. 하지만 이번 경우는 여기에 해당되지 않는 듯하다”고 말했다.
두 기관의 얘기를 종합하면 임대인이 임차인을 내보낸 뒤 실거주하지 않을 때나, 정당한 이유 없이 계약갱신을 거절한 경우 등 명백한 경우에만 규제할 수 있다는 얘기다.
전씨 사례처럼 집주인이 세입자와의 합의로 법적상한을 넘는 전세금을 받는 경우나, 거주 의사가 없음에도 압박 수단으로 이를 활용한 경우 등에 대해선 제재할 수단이 사실상 없다는 것이다.
“과거는 묻지마” 집주인 입주하면 재판 ‘끝’
더구나 이런 사례들이 분쟁조정위나 소송으로 가더라도 세입자가 이길 가능성은 낮아 보인다.
조정이나 재판 과정에서 임대인이 실거주 의사를 명백히 밝히거나 실제 실거주 한다면 임차인이 패소할 가능성이 높다는 게 법조계 판단이다. 국토부 관계자는 CNB에 “분쟁조정 과정에서 임대인이 실제 입주를 해버리면 갱신거절 사유(실거주)대로 실행(입주)한 것이 되기 때문에 임차인은 손해배상을 청구하기가 어려울 수 있다. 사실 이 점이 가장 어려운 부분이고 애매한 부분”이라고 털어놨다.
다만 이 경우 세입자 보호막이 전혀 없는 건 아니다. 임대차법에 “임대인이 임차인을 퇴거시키고 실거주할 경우, 2년 내에는 타인에게 전세를 줄 수 없다”고 규정돼 있기 때문. 집주인이 2년 내에 다른 세입자와 전월세 계약을 하면 원래 임차인(퇴거한 세입자)에게 손해배상을 해야 한다는 얘기다.
국토부는 이 점을 들어 임대인이 무리하게 실거주 카드를 휘두르진 않을 것으로 보고 있다.
국토부 관계자는 CNB에 “임대인이 실제로는 거주할 의사가 없음에도 전·월세를 올리기 위해 입주할 것처럼 행동하다가 임차인과 법적분쟁이 발생하게 되면, 임대인이 부득이하게 2년간 거주해야 하는 경우가 발생할 수도 있다”며 “그렇게되면 임대인도 손실이 큰 만큼, 임차인 입장에서는 계약갱신이나 손해배상을 받을 수 있는 유인책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국토부의 바람과 달리 대부분 세입자들은 전씨처럼 집주인의 요구를 들어줄 수밖에 없는 ‘을’의 처지다. 법정에서 다투자니 재판(변호사) 비용과 시간이 부담이 되고, 이사 하자니 주변 전세값이 이미 치솟을 대로 치솟았기 때문이다.
법조계 관계자는 CNB에 “임차인 입장에서 보면, 지금처럼 전월세가 오르는 상황에서는 적당한 선에서 집주인 요구를 들어주는게 최선책이 될 수밖에 없다”며 “임대차법이 제구실을 하려면 임차인이 알아서 법적대응 하라는 식이 아니라 지자체별로 피해구제센터를 만들어 법률 지원을 강화하고, 임대인의 위법행위에 대해서는 과태료를 물리는 등 보완책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CNB=도기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