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의회장 선출 시작…재계 새판짜기 돌입
최태원式 사회적기업론, ‘뉴노멀’로 부상
기업혁신과 사회공헌 ‘양날개 전략’ 기대
‘상생 전도사’ 자처한 최 회장, 총대 멜까
급변하고 있는 미국 정세와 한일관계 개선 움직임, 백신 개발에 따른 ‘포스크 코로나’ 시대의 부상 등 글로벌 시장 환경이 빠르게 달라지고 있는 가운데, 4대그룹 총수들이 최근 연달아 비공개 회동을 가져 주목된다. 특히 이들 중에서도 재계에서 ‘맏형’을 자처하고 있는 최태원 SK그룹 회장의 역할론에 재계의 시선이 쏠린다. (CNB=도기천 기자)
4대그룹 총수들, 잇단 비밀회동 ‘왜“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과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 최태원 SK그룹 회장, 구광모 LG그룹 회장은 지난 5일 서울 모처에서 만나 비공개 만찬을 가졌다. 지난 9월에 이어 2개월 만에 또 만난 것. 이날 만찬은 오후 7시경부터 시작돼 밤 11시를 넘긴 시간까지 이어진 것으로 알려졌다.
재계에서는 이들의 회동 시점이 매우 절묘하다고 보고 있다.
표면적으로는 부친상을 치른 이 부회장을 위로하고 고인의 생전 업적을 기리는 자리였다고 한다. 이 부회장의 부친인 고(故) 이건희 회장은 6년전 숙환인 급성 심근으로 쓰러져 치료를 받아오다 지난달 25일 영면했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단순히 위로만 전하는 자리는 아니었던 것으로 본다. 최근 급변하는 국내외 경제 상황에 대응하기 위해 정기적인 모임을 갖기로 하는 등 일종의 연합체를 모색했을 것이라는 추측이다. 최대 무역 파트너인 미국이 대선을 통해 새정권 출범을 앞둔데다, 각종 기업규제 법안이 국회 통과를 앞두고 있어 어느 때보다 재계 공동대응이 절실한 상황이라는 점에서다.
특히 재계는 이날 모임을 최 회장이 주선했다는 점에 주목하고 있다. 최 회장이 대한상공회의소(상의) 회장으로 거론되는 시점에 본인이 앞장서 모임을 가졌기 때문이다. 상의 회장 선출은 통상 회장이 추천한 사람을 회장단이 논의해 추대하는 방식으로 이뤄지는데, 재계에서는 지난 9월경 박용만 상의 회장이 최 회장에게 차기 회장직을 직접 제안했다는 얘기가 돌고 있다.
상의는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 한국경영자총협회(경총), 중소기업중앙회, 한국무역협회와 함께 재계를 대표하는 경제5단체로 꼽힌다. 전체 회원사 수가 약18만 곳으로 박근혜 정권과의 정경유착으로 인해 쇠락한 전경련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대기업뿐 아니라 중소기업은 물론 지방기업들까지 아우른다.
하지만 대부분 회원사가 중소·중견기업이라는 점에서 재계를 대표하는 창구로 보기에는 한계가 있다. 대한상의에서 삼성, 현대차 등 주요 대기업들의 역할이 사실상 전무한 것도 이 때문이다.
형처럼 친근…”과거에는 상상못할 일“
따라서 재계는 최 회장이 대한상의 회장이 되어 목소리를 대변해 줄 것을 기대하고 있다. 한때 경제계에서는 문재인 정부의 핵심전략인 ‘한국판 뉴딜’을 매개로 4대그룹이 연합체를 만들 가능성이 점쳐지기도 했지만 실현 가능성은 낮아진 상태다.
한 대기업 고위임원은 CNB에 “한국판 뉴딜의 핵심분야로 미래차(수소·전기차)가 부각 되면서 최근 4대그룹 총수가 서로 만나 협력방안을 논의 했지만, 이는 비즈니스 차원일 뿐 재계동맹으로 보기에는 무리”라며 “대한상의를 중심으로 정부정책 등에 대응하는 것이 가장 현실적이라는 판단에서 최 회장이 거론되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최 회장이 상의 수장으로 언급되는 이유는 다양하다. 우선 세대교체를 이룬 젊은총수들 중에서 맏형 역할을 하고 있다는 점에서다.
최근 5~6년 사이에 재계 1·2세대들이 은퇴하거나 유명을 달리하면서 지금은 40~50대 젊은 나이의 3·4세들이 기업을 이끌고 있다.
정의선 회장은 부친 정몽구 명예회장의 뒤를 이어 지난달 현대차그룹 총수 자리에 올랐고, 이재용 부회장은 이건희 회장의 타계로 조만간 삼성그룹의 경영권을 승계할 예정이다. 구본무 회장의 별세로 2018년 6월 그룹 총수 자리에 오른 구광모 LG 회장은 재계 최연소(78년생) 회장이다.
이들은 사석에서 호형호제(呼兄呼弟) 할 정도로 친분이 도타운 것으로 알려졌는데, 이중 최 회장이 맏형으로 통한다고 한다.
실제로 이 부회장, 최 회장, 구 회장 세 사람이 경제계 대표 자격으로 2018년 평양을 방문했을 때, 서로를 챙기고 배려하는 모습이 자주 카메라에 잡혔다. 지난달 이건희 회장이 타계했을 때는 이들 모두 빈소를 찾아 이 부회장과 유족을 위로했다.
한 대기업 지주회사 관계자는 CNB에 “과거 한국 재계는 특유의 보수성과 경쟁심리 때문에 총수들간의 사적인 만남은 사실상 전무했다. 하지만 지금은 실리가 권위보다 우선이 되고 있다”고 분위기를 전했다.
사회적 기업론, 18만 회원사로 확대할 기회
최 회장의 평소지론인 ‘사회적 기업론’이 기업인들로부터 공감대를 얻고 있다는 점도 추대론에 힘을 싣는다.
최 회장은 우리나라 사회적기업 시장 규모를 국내총생산(GDP)의 3% 수준으로 키우겠다는 이른바 ‘10만 사회적기업 양성’의 비전을 갖고 있다. 그는 빈부격차와 실업 등 우리사회가 당면한 문제를 가장 효과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공유 경제’라 믿고 이를 전사적으로 실천하고 있다.
최 회장은 최근 경북 안동에서 열린 인문가치포럼에서 기조강연을 통해 “기업인의 한 사람으로서 사회가 기업과 기업인에게 요구하는 새로운 역할에 앞장서겠다”고 공언했다. 앞서 지난 6월 발간한 ‘SK㈜ 지속가능경영보고서’에서도 사회적 가치 추구에 있어 SK그룹의 선도적 역할을 강조했다.
사회적 기업론은 대한상의의 존재 이유와도 잘 맞아 떨어진다. 전국의 상공인이 협력해 사회에 기여하자는 것이 대한상의의 설립목적이기 때문이다.
만약 상의가 최 회장 중심으로 재편된다면 사회공헌과 경제혁신이라는 양날개 전략이 펼쳐질 것으로 예상된다.
현재 국회에는 공정경제 3법 등 기업규제 법안 수백개가 통과를 앞두고 있지만 경제단체들은 한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있다. 대표적인 사례가 ‘감사위원 선임 시 지배주주 의결권을 3%로 제한’하는 상법 개정안을 바라보는 시각이다.
중견·중소기업이 주축이 된 상의는 법안의 취지를 받아들이면서 대안입법 등 수정안을 마련하고 있지만, 대기업 중심의 경총 내에서는 법안 자체를 막아야 한다는 기류가 팽배하다.
따라서 이런 사안들을 통합·절충해 합리적인 대안을 만드는 것이 최 회장의 첫 과제가 될 전망이다.
멈춰 선 한일(韓日) 간 경제교류를 재개하는 일도 당면과제다. 일본이 한국정부의 일제 강점기 징용 피해자 보상 요구에 대해 수출규제로 맞서면서 한일 관계는 2년 가까이 얼어붙은 상태다. 하지만 최근 박지원 국가정보원장이 일본을 방문해 스가 요시히데(菅義偉) 일본 총리와 면담을 가진 만큼, 새로운 돌파구가 마련될지 주목되는 상황이다.
이밖에 최대 교역국인 미국이 정권교체로 보호무역 기류가 바뀌고 있는 점에도 선제적으로 대응할 필요가 있다. 상의는 전세계 130여개국 상공회의소와 네트워크가 구축된 범세계적인 기구라는 점에서 새로운 역할론이 기대되고 있다.
여기까지가 기업의 생존과 직결된 사안이라면, 사회공헌은 또다른 한 축이다. 최 회장은 평소 지론인 기업의 사회적 가치 창출을 위해 상의를 기반으로 다양한 실험을 전개할 것으로 보인다.
4대그룹 중 한곳의 고위관계자는 CNB에 “과거에는 전경련의 위세에 밀려 대한상의는 별로 존재감이 없었지만 지금은 그때와 상황이 180도 다르다”며 “대·중소기업 상생이라는 정부 기조에 적극 부응하면서도 기업을 옥죄는 각종 규제에는 강력하게 대응하는 등 강온 양면 전략이 요구되고 있다. 최 회장이 (상의 회장에) 언급되는 것도 그가 주창하는 상생(사회적 기업론)이 재계의 새로운 가능성이 될 수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대기업만 잘나가던 과거와 달리 지금은 대·중소기업이 함께 공존할 방법을 찾아야 한다는 점에서 최 회장이 주목받고 있다는 얘기다.
한편 상의는 내달 회장단이 모여 3년 임기의 차기 회장 선임을 위한 논의를 시작한다. 박 회장의 임기는 내년 3월까지다.
(CNB=도기천 기자)